< 89화 - 넝굴째 굴러온 선물 (1) >
제로의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뇌전의 용은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력을 다해 저항하는 것 뿐.
모든 속성에 대한 높은 저항력을 가지는 빛 속성의 힘이 극한까지 끌어올려졌다. 주인의 숨결을 미약하게나마 붙여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뿜어냈다.
“끄르르륵····.”
결론적으로 빛의 힘은 제 역할을 다해냈다. 전격의 힘을 버텨내고, 주인을 회복시켜가며 저항하기를 한참만에 어떻게든 해소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것만으로 이미 힘을 다해버린 기운은 영민의 후속타를 막아내기에 무리가 있었다.
거품을 물고 부들거리던 강정오의 몸이 서서히 멈추어갔다.
[‘신성 폭발’ 스킬을 흡수했습니다.]
“쳇.”
당초의 계획보다 너무 쉽게 죽어버렸다는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놈을 살려냈다가 다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잔해만 남음 골든 크로스의 사옥 위에서 영민은 혀를 차며 놈의 시체를 고등어 굽듯 이리저리 뒤집었다.
“다 박살이 났군.”
전투가 너무 격렬했던 것일까. 강정오의 장비도, 왕 첸의 장비도 정상인 것이 없었다. 내구도가 깎인 정도가 아니라 바닥을 쳐서 툭 건드리면 바스라져 버렸다.
최상위 헌터들인 만큼 장비 또한 대단할 것이라 예상을 했는데 이래서는 건질 것이 없었다.
“건진 건 이것 뿐인가.”
물론 건진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레인을 통해 놈들에게 흡수한 ‘특성’과 ‘스킬’.
먼저 스킬인 ‘신성 폭발’은 조금 전 그를 괴롭힌 것이라 대충 알고 있었다. 내면의 힘을 격발시켜 한계 이상의 힘을 얻는 능력. ‘버서크’의 신성버전으로 봐도 무방했다.
재미있는 것은 버서크와 중복 사용도 가능 할 것 같다는 것. 증폭에 증폭을 거친 S등급 헌터의 힘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혹시 다섯 군주 중 하나와 맞대결을 기대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으으음, 방심 할 수는 없지.’
잠시 유일하게 쓰러뜨린 적 있는 군주, 용제를 떠올린 영민이 부르르 몸을 떨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다섯 군주는 자만을 하기에 너무나 무지막지한 상대였다.
다시 침착을 되찾은 영민은 나머지 하나에 관심을 돌렸다.
S등급 헌터에게서 흡수한 ‘특성’이라는 것.
‘고유 능력 슬롯이 다 찼다고 했었지.’
아무래도 강태성에게서 온전히 계승한 고유능력 ‘게이머’ 때문인 듯 했다. 헌터의 능력 그 자체인 ‘고유 능력’을 흡수하는 것에는 제한이 있는 듯. 그럼 하위 능력이라는 ‘특성’은 무엇일까?
‘이런 거군.’
영민은 특성 ‘치명적 일격’을 확인한 순간, 그 의미를 대충 파악했다. 하위 능력이라는 말이 맞다. 얼마든지 발전 시킬 수 있고 관련 능력들을 개발해낼 수 있는 고유 능력과는 달리 ‘능력이 고정된 여러 가지 스킬의 집합’이라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했다.
왕 첸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십여 가지 스킬들이 고스란히 영민에게 체득된 것이다.
그런데 그 능력이 꽤 쓸만했다.
치명타 확률 증가
치명타 데미지 증가
치명타 적중 시 추가 효과 발동
능력의 효과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었지만 ‘치명타’라는 한 단어로도 정의 할 수 있었다.
행운 Max의 영향으로 뭘하든 치명타가 터지는 영민에게 확률 증가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나머지 능력들은 그야말로 ‘꿀’이었다. 당장 평균 데미지가 크게 증가할 뿐 아니라 모든 공격에 추가 효과가 붙는다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 뿐이 아니다. 이렇게 얻은 스킬들은 숙련도 증가를 통한 ‘발전’이 가능했다.
과연 ‘진화’까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는 특성이 더욱 강화 될 수 있다면 어지간한 고유 능력도 부럽지 않을 듯 했다.
‘아, 그렇지.’
체감 전투력 상승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강태성의 기억으로도 감히 짐작 할 수 없는 능력 강화에 몸이 근질근질한 영민이지만 곧 주변에서 겁에 질린 어린 양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쨌거나 상대는 ‘표면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양심적이고 선량한 10대 길드가 아니던가.
‘기원’의 맛을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평판이나 대의 명분 따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다 죽일까.’
목격자가 없다면 수근거림 따위 알 게 무언가.
순간 영민의 마음에 살심이 솟는 것을 가만히 눌러 참았다. A등급 쯤 되는 놈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어두운 구석에 한 발 걸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B등급 이하의 수백 명의 헌터들 중에는 무고한 이들이 대부분일 공산이 컸다.
오히려 자신들이 선량하고, 나라와 세상을 위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 헌터들.
잠시 생각에 잠긴 영민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A등급 헌터에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살 길을 주지. 지금 당장 부길마라는 놈을 데려와라.”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서는 냉기가 풀풀 흘렀다.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법 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낀 헌터는 부리나케 달려 부길마를 찾았다.
도망을 친다거나 하는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든, 어디에 숨든 그의 말을 거역하고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그를 움직였다.
‘어느 쪽이냐.’
그 동안 영민은 기감을 확장했다.
반경 수십 킬로 내에서 살아움직이는 이들의 마나를 감지했다. 부자연스럽게 황급히 도망치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이 목표다.
영민은 모두를 죽이는 대신, 가장 핵심에 있던 몇몇 놈들의 목을 치는 것으로 응징을 대신 할 생각이었다.
‘어라?’
그렇게 레이더를 활짝 열어둔지도 한참, 영민은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단의 강한 마나의 무리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깥이 아닌 바로 자신이 있는 곳이었다.
‘해보자는 건가?’
뇌신 강림의 쿨타임은 한참이나 남았지만 S등급도 아닌 녀석들 몇 정도는 우스웠다.
도망치는 대신 역공을 해오는 것이라 생각한 영민은 어떠한 수작에도 대응 할 수 있도록 서서히 힘을 끌어올려 갔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영민을 향해 달려온 세 명의 헌터는 대뜸 그를 향해 납작 엎드렸다. 추진력을 얻기 위한 웅크림? 그런 것이 아니다. 오체투지를 하며 항복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마나의 움직임을 스스로 동결시키고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이쯤되니 영민도 무작정 목을 치기 어려워졌다. 명예니 명분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함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 놈들은 이러는 것일까.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도망이라도 칠 것이지, 자신을 찾아죽이려는 사람을 굳이 찾아와 항복하는 것은 무슨 수작일까?
영민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지긋이 내려보자 헌터 답지 않게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거리던 녀석들 중 하나가 머리를 조아린 상태 그대로 목청을 높여 간청했다.
“제발 저희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힐끗 살피니 그 놈이다. 헌터넷에서 찾아 본 골든 크로스의 부길마라는 놈. 자신에게 전화로 개소리를 지껄인 장본인.
“말해봐라.”
허락했지만 영민의 표정은 여전히 마뜩찮아 보였다. 헛소리를 하거나 개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대번에 목을 쳐버리겠다는 듯, 그 짧은 음성에 서슬이 시퍼랬다.
“먼저 사과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존을 몰라뵈고 전화로 망발을 지껄인 것은····.”
“그만. 용건만 간단히.”
벌벌 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놈의 말을 끊어놓자 꿀꺽 침을 삼키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다음 한 마디로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장담 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지존께서도 아시겠지만 이 골든 크로스는 ‘표면적으로’ 아주 깨끗한 길드입니다. 길드장인 강정오도 그렇지요. 그런 길드가 넘어갔으니 어떤 식으로든 이슈가 크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아마도 이참에 지존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크게 준동하겠지요.”
“협박이라도 할 셈인가?”
“아니,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존께서 이 상황을 반전 시킬 계책입니다.”
이 상황에 평판이나 소문을 가지고 시덥잖은 협박으로 살아남아 보려는 것인가 하며 영민이 코웃음을 치자 부길마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부정했다.
그리고 진짜 ‘본론’을 꺼내놓았다.
상황을 반전 시킬 계책?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살짝 관심이 갔다.
‘기원만 아니었다면 콱··.’
계책이고 나발이고 생각 같아서는 콱 죽여버리고 싶지만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으니 일단은 귀를 기울였다. 놈이 어떤 수작을 부리든 자신을 해하는 것은 무리였고, 얕은 함정을 파봤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강태성의 경험을 속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
니까.
“말해봐라.”
그 다음 순간,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무척이나 의외의 것이었다.
“골든 크로스를 가지십시오.”
“····뭐?”
자신이 무너뜨린 골든 크로스를 가지라니? 상징을 때려 부수고 길드장을 죽인 원수에게 머리를 숙이겠다는 건가?
아니,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굴욕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설사 그런다 해도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충성이겠나? 그런 시덥잖은 소리를 하려는 것이었냐는 듯 영민의 눈초리가 다시금 차가워지자 부길마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되도록 저희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속사정’을 아는 인원은 극소수이니 정보를 조금만 만지면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마침 ‘흉수’의 시체도 확보했으니 길드를 재정비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이 놈 봐라? 영민의 눈초리가 길어졌다.
흉수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뒤집어 쓸 존재이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인물이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시체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비록 이로 인해 중국의 흑갈파와 척을 지게 되겠지만 그로 인한 위험보다 골든 크로스를 통째로 꿀꺽 한다는 것에 대한 메리트가 훨씬 컸다.
새롭게 길드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이미 대한민국 10대 길드로서 훌륭한 인프라가 갖추어진 놈을 한 입에 삼키는 것이 아닌가? 영민으로서도 혹하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자세한 계획을 들어보지.”
“물론입니다.”
영민의 대답에 부길마의 눈이 야망으로 다시 살아났다.
강정오라는 인물도 크게 모자람이 없긴 했지만 'S등급‘이 아니라는 치명적 단점이 무척이나 아쉬웠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인물은, 그 모자란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터였다. 강철우라는 8번째 S등급 헌터를 동료로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S등급에 달하는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강정오를 꺾고도 멀쩡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 순간부터 그는 영민을 확실한 S등급 헌터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10대 길드 중 하나를 통째로 양도 받을 계책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위험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폭발 선물 하나 받은 대가로는 무척 커다란 대가였다.
< 89화 - 넝굴째 굴러온 선물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