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너냐? (4) >
“신성한··!”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이미 살기가 그를 꿰뚫고 가는 순간, 늦었음을 깨달은 영민은 1회에 한해 절대 방어를 부여하는 신성한 가호를 일으켰다.
“#^$%&.”
푹!
허나, 상대가 조금 더 빨랐다. 중국어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암살자가 내지른 검이 극쾌의 기운을 머금고 영민의 심장을 꿰뚫었다.
“컥!”
이미 한껏 끌어올려진 기운은 +7까지 강화된 방어구마저 파괴했다. 단순히 방심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이 무시무시한 것이다.
고작 A등급 헌터의 수준이 아닌 완연한 S등급 헌터의 파괴력이었다.
“··미친····!”
심장을 관통 당한 영민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중국인의 어깨에는 중국의 상위 길드 중 하나의 문양인 흑전갈이 자리잡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는 듯, 환히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하는 강정오.
대한민국 10대 길드의 수장이란 작자가 중국의 길드와 손을 잡은 것이다.
손을 잡은 것인지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식으로든 붙어먹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쪽으로.
털썩
영민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무릎을 꿇고 팔로 땅을 짚어보지만 허물어지는 몸을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심장을 관통 당한 인간은 살 수 없다는 법칙이 영민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
“$&%&.”
그 때문인지 두 놈들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제 목이 살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
흑갈파의 S등급 헌터, 왕 첸에게 샴페인을 건네던 강정오의 얼굴이 한 순간 하얗게 질렸다.
분명 죽었는데? 심장이 관통 당한 것을 확인 했는데? 그냥 찌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검을 비틀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당한 건 분신 같은 것이었나?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강정오의 얼굴이 혼란으로 범벅이 되었다. 영민이 아무리 A등급의 헌터라지만, 규격외 판정을 받는 자신이나 S등급 헌터인 왕 첸의 이목을 속이기는 무리였다. 애초에 그런 타입의 능력도 아니라고 했고.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일까.
왕 첸도 혹시 연기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불과 몇 초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과 의문을 떠올리며 핏기가 가시는 강정오의 바람과 달리, 영민은 무너져내린 왕 첸의 시체를 짓밟고 그의 앞에 여전히 서있었다.
[고유 능력 슬롯이 모두 찼습니다.]
[하위 단계로 변환 됩니다.]
[특성 ‘치명적 일격’을 흡수합니다.]
‘위험했다.’
태연하게 서있었지만 영민의 상태도 사실 정상은 아니었다. 왕 첸의 기습을 그대로 허용하고, 심장을 꿰뚫린 것이 모두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S등급이 아니라 SS등급이 나타나도 어찌 할 수 없는 치명상. 원래대로라면 심장 관통으로 목숨을 잃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게이머’의 능력을 얻은 영민은 인간과 캐릭터의 중간쯤에 위치한 존재였다.
‘심장이 터져도 체력만 빠지다니··.’
‘심장’이 터져나간 것은 맞지만 그것은 시각화 된 표현일 뿐, 실제로는 게임 캐릭터처럼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만 처리가 된 것이다.
물론 다른 곳도 아닌 심장이기에 일반 크리티컬 데미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데미지가 들어오고 쇼크로 인한 ‘경직’효과가 발동했다. 하지만 드레인과 비약의 도핑으로 높아진 체력은 한 번 쯤 그것을 감당할 만한 수준이 충분히 되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조금 이르게 승리를 자축했고 그 방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운도 따라줬고··.’
사실 왕 첸을 일격에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 시야도 흐릿한 상황에서 온 힘을 끌어모아 반격을 한 것인데 그것이 놈의 목을 자르고 생을 빼앗은 것이다.
덕분에 드레인이 발동하며 놈의 ‘특성’을 흡수했다.
고유 능력도, 스킬도 아닌 그 무언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여유를 부리기에는 눈 앞의 강정오도 상당한 강적이었다.
“흐압!!”
위기감을 느낀 강정오가 먼저 손을 썼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눈앞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선공을 날리고 본 것이다.
‘젠장.’
묵직하게 들어오는 일격을 영민 역시 마나를 뿜어 대항했다.
좋지 않다.
태연한 척 했어도 사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영민인지라 분위기라도 잡으며 최대한 회복할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는데 상대가 생각처럼 무르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S등급이 뒈졌으면 좀 쫄아야 할 거 아니야!’
강정오가 필사적이듯 영민 역시 이를 빠드득 갈며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과연 ‘규격 외’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놈의 힘이 결코 얕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이다.
엄밀히 말해 여러모로 자신보다는 반수 쯤 아래였지만 컨디션을 고려하면 승리를 장담 할 수 없었다.
‘뒤로 더러운 짓은 다 하는 주제에 빛 속성이라니.’
더구나 상성도 좋지 않았다. 녀석은 영민과 같은 ‘성기사’ 타입의 능력을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무상성’이라 불리는 빛 속성인지라 암흑을 제외한 모든 속성에 대해 저항력을 갖고, 당연히 동일 속성인 빛 속성끼리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빛과 빛이 붙는다면 무속성 간의 대결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는 뜻이다.
결국 힘 대 힘. 더 많이 때리고, 더 잘 버티는 놈이 이기는 싸움인데 체력적인 면에서 영민이 큰 패널티를 안고 있었다.
만약 놈이 같이 죽자는 식으로 택배에 사용했던 폭탄이라도 사용한다면 정말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엘릭서를 써야하나··.’
때문에 단 두 개 밖에 남지 않은 엘릭서를 사용해 상황을 반전시켜 볼 생각까지 했다. 강정오가 죽기 살기로 힘을 휘둘러대는 통에 포션을 사용할 기회조차 만들기 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충돌에 의한 데미지가 차곡차곡 몸에 쌓이고 있었다.
“신성 폭발!”
먼저 승부수를 던진 것은 오히려 강정오였다. 전력을 다해 몰아치는데도 굳건하게 버티고 맞받아치는 영민의 힘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비장의 한 수를 꺼낸 것이다.
‘규격 외’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A등급인 그가 여느 S등급 헌터들보다 아래로 평가되지 않게 만들어준 필살기.
자신의 모든 광휘를 폭발시켜 한순간 강력한 힘을 손에 넣는 신성 폭발 스킬이 발현되었다.
“으흐흐흐!”
제한 시간이 끝나면 일정 기간 동안 티끌만큼의 광휘도 발휘 할 수 없다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따질 틈이 없었다.
격을 뛰어넘는 힘이 내면에 차오르고 마약 같은 쾌감이 뇌 내에 가득 퍼졌다.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이 상태라면 왕 첸도 자신의 상대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씨발.”
놈의 변신(?)을 보고 있자니 영민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회복하면 이길 수 있는’ 상대에서 한 순간 ‘전력을 다해 저항해야 할’상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인벤토리를 열어 엘릭서 한 병을 손에 쥐었다.
“어?”
그 순간, 영민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놈과 못지않은 광휘가 그를 감싸 안더니 몸 상태가 급격히 회복되고 몸속의 기운이 크게 강화되는 것이다.
뭐지? 내가 벌써 엘릭서를 마셨나?
얼떨떨하게 손에서 찰랑거리는 엘릭서 병을 보던 영민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한 줄의 문구가 떠올랐다.
[‘기원’의 힘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기원.
영민의, 럭키맨의 무사안녕을 바라는 수만의 염원이 그의 몸에 내려앉은 것이다.
모두 골든 크로스가 내놓은 기사 덕분이었다.
그 기사와 뒤늦게 양산 된 수십 개의 후속 기사들이 럭키맨에게 구원을 받고, 호의를 가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 기원이 강력한 회복과 강화의 힘이 되어 이 순간 영민에게 깃들었다.
‘이거라면 해볼만 하지!’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자신의 몸 상태를 완전히 파악한 영민이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정도면 자신있다.
신성 폭발로 뻥튀기 된 강정오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강화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고 마력이나 스텟은 대충 비슷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승부를 가르는 것은 ‘경험’과 ‘템빨’이다.
그리고 영민은 그 어느 쪽에서도 그를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어디 다시 해볼까?”
두 명이 초인이 다시 격돌했다.
“으악! 무너진다!!”
“도망쳐!!”
그 충돌의 여파만으로도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길드의 상징과도 같은 사옥인 만큼 설계부터 자재까지 모두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들었건만 무너지는 데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격돌이 만들어낸 충격은 단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죽어라! 죽어, 죽어!!”
강정오가 광기에 가까운 힘을 쏟아내며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이미 A등급의 힘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두 사람에게 건물의 붕괴 따위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A등급 헌터들의 주도하에 사옥에 머물던 골든 크로스의 길드원들이
황급히 대피했다.
용호상박.
주변에 A등급 헌터만 수십이 있었지만 도저히 끼어들 틈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공방이 수십 분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런 박빙의 전투가 지속 될 수 있는 것도 영민이 ‘파워업’을 하지 않은 덕분이라는 것을.
‘제법이긴 하네.’
골든 크로스의 강정오라면 강태성의 시대에서도 제법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기는 했다.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마지막까지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3차 던전 쇼크 이전까지는 여기저기에서 방귀 좀 뀌고 다녔지.
그게 다 키워놓은 ‘세력’ 덕분이라는 평이 있었던 만큼 본신의 능력보다는 다른 것들에 신경을 썼겠지하는 짤막한 감상만 남아있긴 했지만 최후의 한 수까지 사용한 녀석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사실 이 정도면 자신 할 만 했고 개인의 성장에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만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최강의 자리를 논할 수 있는데 뭐하러 고단한 수련에 목을 매겠나. 더 달콤한 유혹들에 손을 뻗는 것도 언뜻 이해는 되었다.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그 안일한 마음가짐이 이번 생에서도 명을 재촉했다.
만약 그가 S등급에 오른 뒤 신성 폭발을 사용했다면 제 아무리 영민이라도 지금으로서는 어찌해보기 힘들었을 것.
그러나 지금은 그를 상대할 방법이 몇 가지나 있었다.
‘굳이 버서크로 위험을 부담할 필요는 없고··. 이게 상책인가.’
쿠르르릉-
영민이 마음을 먹은 순간 그의 주변으로 조금 다른 ‘빛’이 뿜어져나왔다.
“뇌신강림.”
빛이라기보다는 샛노란 뇌전.
뇌신의 강림이었다.
스킬 창에서 모든 스킬들이 사라지고 뇌신 전용의 몇 개의 스킬만 남았다.
다행히 장비는 그대로 사용이 가능한 상태.
필사의 의지를 담아 휘둘러대는 강정오의 공격을 수월히 받아내면서도 또 다른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뇌력 분출.”
파지지직!
한순간 뇌전의 기운이 영민을 중심으로 뿜어졌다. 그가 가진 기운에 비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저릿한 느낌을 일으키며 공격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뇌조의 일격.”
그 틈을 타 이격이 짓쳐들었다. 강대한 뇌전의 기운이 실린 오른 손을 뇌조의 부리처럼 말아쥐고 강정오의 머리를 향해 나아갔다.
“안 돼!!”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격.
그것을 감지했는지 강정오가 허둥지둥 손을 들어막았지만 머리 대신 손목을 내어주고 말았다.
“뇌룡 출격.”
뇌조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뇌전의 용이 놈을 향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 88화 - 너냐? (4)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