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너냐? (3) >
김광구를 족쳐서 ‘배후’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쉬워서 진짜인지 의심을 해봐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영민은 코인 상점에서 ‘진실의 동전’을 구입해 진위여부를 확인했다. 질문을 던진 뒤 상대가 답변을 하면 동전을 튕기는 방식이다. 동전이 앞면이면 거짓, 뒷면이면 진실. Yes or No라는 극단적인 방식의 확인만이 가능했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김광구의 대답은 ‘진실’
하지만 그날 김광구와 크레이지 독의 간부들, 그리고 길드 하우스에 모인 길드원들 중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A등급의 헌터가 몇 명이나 남아있었음에도 그랬다. 능력을 전력으로 개방한 영민의 앞에서는 김광구도, A등급 헌터의 합격도 아이의 버둥거림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그들이 영민을 새로운 S등급의 헌터로 착각했을까.
제대로 된 전투라고 하기도 무색할 만큼 간단히 놈들을 제압하고 해치운 영민이지만 일부러 길드 하우스 곳곳에 격렬한 전투의 흔적들을 만들었다. 잠시나마 이목을 속이기 위함이다.
전문가들이 시간을 들여 확인한다면 인위적인 전투 흔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테지만 어중간한 인물이라면 격렬한 전투, 그리고 동귀어진 쯤으로 착각 할만 했다.
이쪽 역시도 전문가인 강태성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몸을 숨긴 영민은 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 좀 더 몸을 숨기고 있도록 이야기한 뒤 자신은 적들의 본거지를 향해 숨어들어갔다.
놈들의 근거지는 부산이었지만 크레이지 독의 근거지 또한 진주였기 때문에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내면의 빛 스킬 덕분에 피로도 거의 쌓이지 않았다.
무사히, 그리고 은밀히 부산으로 진입한 영민은 은신을 유지한 채 적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주 활동 범위와 규모. 구성원들의 수준까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유료 서비스까지 이용하며 정보를 긁어모았다.
‘돈이 좋긴 좋군.’
제법 많은 돈을 지불하자 길드 전체에 대한 세부 정보와 길드원 각각의 수준과 고유 능력, 응용 방식에 대한 정보까지 모조리 다운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공식적인 능력의 사용 대상이 ‘몬스터’인 까닭에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듯 공개한 것이다.
물론 감춰둔 부분들도 있겠지만 우습게도 대부분이 스포츠 스타처럼 주특기나 필살기 따위의 정보까지 자랑스레 공개해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영민은 대략의 견적을 낼 수 있었다.
놈들 가운데 섞여있는 ‘진짜배기’들은 강태성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었으니까.
‘일단 S등급은 없다라··.’
다행히 놈들은 10대 길드 중에서도 S등급을 보유하지는 않은 곳이었다. 만약 지금의 영민이 S등급과 상대하려면 그 역시도 목숨을 걸어야만 할 정도로 만만치 않았겠지만 S등급이 없다고 해도 방심 할 수는 없었다.
S등급이 아님에도 10대 길드로 당당히 다른 곳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길드장이 ‘예외적인’ A등급 헌터이거나 그런 인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준 S등급’이나 ‘S등급(진)’으로 불리는 이들. 그리고 수십 명의 A등급 헌터. 어쩌면 이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상황이건만 영민은 겁을 먹긴커녕 묘한 흥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골든 크로스.’
놈들의 정체는 ‘나쁜 놈의 대명사’ 강철대오가 아니었다. 굳이 선과 악을 나누자면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선쪽에 가장 가깝게 분류되는 자들 중 하나인 골든 크로스였다.
황급 십자가를 상징으로 쓰는 만큼 성스럽고 존귀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들이 뒤로는 크레이지 독과 같은 자들을 움직여 더러운 일들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민과 시비가 붙고, 게이트 키퍼가 해체시킨 ‘미믹’ 역시 그들의 하수인 중 하나였다.
이래저래 영민과는 악연이 깊은 셈이다.
영민은 놈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골똘히 생각하며 놈들의 사옥 인근 모텔에서 밤을 보냈다.
기습을 하자면 밤을 이용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밤이면 족쳐야 할 놈들이 없을 테니 재미가 없지.’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이 찾아왔다.
영민은 거리로 나가 신문을 종류별로 하나씩 구입했다. 놈이 자신있게 말한 대로의 기사가 실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사는 진짜 있었다. 주요 일간지 중 한 곳이 독점으로 기사를 실었다. 다만 밤 사이 내용을 수정한 것인지 전화로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 실려 있었다.
팀 내 불화와 분열로 인한 동반자살 대신 크레이지 독과의 마찰로 인한 공멸로 바뀐 것이다. 크레이지 독의 궤멸이라는 좋은 소스가 있는 마당에 굳이 의심을 살만한 내용을 실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는지 ‘이권 다툼’ 쪽으로 몰아가려는 시도가 보이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몇 줄 안 되는 ‘카더라’ 식의 삽입이라 ‘믿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로 보아도 좋을 듯 했다.
“이제 서프라이즈 파티를 할 차례인가?”
영민은 신문을 꾸깃하게 접어 쓰레기통에 내버리고 골든 크로스의 사옥으로 이동했다.
‘양의 탈을 쓰고 많이도 긁어모았군.’
아리랑 길드와 달리 골든 크로스의 사옥은 그 일대가 모두 길드의 소유인 도심 속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뭐가 그렇게 찔리는 것이 많고 감출 것이 많은지 주변 일대를 일반인 출입금지의 사유지로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다.
대신 독거노인이나 결식아동 등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사유지 내로 초청하여 삭사를 대접하는 등의 활동들로 긍정적 여론을 만들어갔다.
그것이 모두 가식이었음을 깨달은 영민은 골든 크로스의 사옥 꼭대기에 달린 황금 십자가가 역겹게만 느껴졌다.
강태성의 기억에는 왜 이런 내용이 없었을까? 그건 놈들이 사라질 때까지 강태성이 그들의 본성을 알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대단한 배우들 나셨네.’
그럴 노력을 던전 공략에 썼다면 좀 더 오래 살아남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가볍게 골든 크로스의 담을 넘었다.
그리고 한참을 들어가 사옥에 가까워 졌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
그저 상징으로만 여겼던 황금 십자가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은신해있던 영민을 비춘 것이다.
동시에 은신이 강제로 해제되며 경비들이 영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이것봐라?”
아무래도 저 황금 십자가가 던전에서 나온 아티펙트였던 모양. 가만 느껴보니 은은한 신성의 기운이 담겨져 있는 듯 했다.
“침입자다!!”
“B급 경보 태세!”
“무장한 침입자가 나타났다. 각 지역은 경계를 철저히 하고 진압 대기조는 출동하라!”
소란이 일자 영민은 가면을 벗어버렸다. 이미 크게 알려진 울트라맨 가면보다 맨 얼굴이 적에게 더욱 혼동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과연 10대 길드로 불리는 이들답게 대응은 재빨랐다. 침입자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대신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고, 건물 내부에 대기해있던 대기조가 서둘러 출동했다. 건물의 입구를 봉쇄하는 일 같은 건 오히려 하지 않았다.
상대가 A등급 이상의 헌터라면 상위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특수 금속이 아닌 이상 가두는 것은 물론 조금의 시간도 지체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A등급 셋에 B등급 스물? 제법인데.’
영민은 건물 내부에서 쏟아져나온 일단의 무리를 보고 이채를 띄었다. A등급만 무려 셋에 B등급이 스물이다. 어지간한 중형 길드 이상의 전력. 이만한 전력이 사옥 내에 있던 것도 아니고 상시 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챙기는 것이 있어도 어마무시하게 있다는 소리였다.
“웬 놈이냐!!”
그 놈의 이미지 때문인지, 아니면 오해 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진압조의 선두는 영민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영민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체인 라이트닝.”
그물 같은 전격의 갈래가 그들을 덮쳤다. 스텟과 아이템 효과로 한껏 끌어올려진 힘이 2배로 증폭되어 치통처럼 느닷없이 덮쳤다.
‘어쩔 수 없지.’
물론 저들 중에는 정말로 선량한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말로 해서 통할 상대들도 아니고 어차피 몇 년 내에 던전 안에서, 혹은 던전 쇼크로 풀려난 몬스터들에 의해 개죽음을 당할 목숨들이었다. 그것이 조금 앞당겨지는 것이라 생각하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컥!!”
이미 첫 방에 B등급 헌터의 대부분은 전투 불능이다. 간신히 해소해낸 것은 A등급과 B등급 헌터 일부가 고작. 그런 이들의 급소를 노리고 영민의 +10 바이킹 소드가 휘둘러졌다.
“미친!!”
분명 검인데, 파괴력이 둔기 이상이다. 한 번 한 번 무기를 맞댈 때마다 내구력이 팍팍 깎여나가고 실금까지 그어지는 것이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반면 검의 내구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거침없이 휘둘러대는 영민의 연격에 진압조는 시종일관 밀리기만 하다가 순식간에 바닥에 몸을 뉘었다.
[‘포박의 달인’ 스킬을 흡수했습니다.]
[‘물리저항’ 숙련도를 흡수했습니다.]
[‘보호의 권능’ 스킬을····.]
“오호?”
놈들을 베어내자 과연 10대 길드라는 것인지 제법 쓸만한 스킬들이 흡수되었다. B등급 헌터들에게서도 숙련도가 제법 많이 흡수되어 이곳이 노다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철 대오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대놓고 나쁜 놈들이면 이목이고 뭐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 죽여 버렸을 텐데. 능력이고 숙련도고 모조리 흡수해버렸을 텐데.
일단 겉으로는 ‘착한 놈’들이라 전면전이 불가능한 것이 안타까워하며 영민은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놀랍게도 사옥에 항시 대기하던 것은 진압대기조 뿐만이 아니었다. 1층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영민은 매 층마다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마나를 읽어 확인 할 수 있었다.
A등급만 따져도 다 합치면 오십은 족히 될만한 숫자다.
던전에 진입 중이거나 파견을 나간 일부 인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위 헌터들이 집결해있는 것. 마치 영민의 방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한 조치였다.
‘그런가.’
생각해보니 신문기사 어디에도 영민이 확실히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들 역시 한가닥 의심을 품고 있다는 소리.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인원을 긁어모아두었다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흡수해버리고 싶지만··.”
바깥에 널브러진 A등급 헌터 셋의 시신을 보아서인지 잔뜩 긴장한 채 얼어있는 이들을 슬쩍 돌아본 영민이 입맛을 쩝 다시고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유령마 소환. 혼령질주.”
유령마가 소환되는 즉시 갈기를 붙잡고 수직으로 혼령질주를 사용해 솟구쳐 올랐다.
A등급의 거의 끝자락에 다달은 마나를 지닌 녀석이 있는 최고층을 향하여.
혼령질주의 효과로 벽이며 집기 따위는 모조리 무시하고 통과되었고 영민이 올라오기만을 숨죽이며 기다리던 이들은 한순간 벙진 표정으로 표적을 놓치고 말았다.
“위, 위다! 위로 올라갔다!!”
“길드장이 위험하다!!”
뒤늦게 반응해보지만 그때는 이미 영민과 골든 크로스의 길드장, 강정오가 마주친 상태였다.
“네가 ‘럭키맨’인가? 아니면 강철우?”
땅에서 솟아나듯 나타난 갑작스런 등장이건만 강정오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를 한잔 홀짝이며 느긋하게질문을 던질 정도다.
S등급에 준한다는 규격 외 A등급 헌터의 자신감일까? 일단 두들겨 패고 시작하려던 영민도 흥미를 느끼고 잠시 감정을 추스렀다.
“럭키맨. 이라고 해두지. 어제의 일은, 네가 지시한 건가?”
“그렇군. 나도 그렇다고 해두지.”
나는 몰랐지만 책임은 진다. 뭐 그런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시를 했든 방조를 했든 가담한 것은 분명했으니까.
“그 택배를 받고도 용케 살았군?”
“별 것 아니던데.”
그 말을 허세로 여겼는지 강정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만이 운 좋게 해독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장 이곳에 영민 혼자 온 것만 보아도 사실 그렇게 생각 할만 했다.
정말 별 게 아니었다면 모두가 살아남았겠지. 라는 듯한 표정.
하지만 영민도 굳이 해명할 생각까진 없었다.
“많이 해본 모양이지?”
“뭐, 적당히? 새로 제작한 물건이 꽤 괜찮은 놈인가 보군. 이전까지 쓰던 물건은 S등급에게는 안 먹히던데 말이야.”
그 말이 꽤나 의미심장했다. 이미 실험을 해보았다는 소리니까.
“!!”
그러고도 어떻게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은 거지? 라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단 둘 뿐이라고 생각했던 방안 한 구석에서 찌릿한 살기가 영민을 덮쳐왔다.
< 87화 - 너냐? (3)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