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철우 (1) >
다행히도 세상에는 크레이지 독과 같은 미친 놈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 마주한 대부분의 길드들이 각자의 활동지역으로부터 몬스터들을 배제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벌였고, 몇몇은 장렬한 희생을 하며 몬스터들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지난 경험 덕분인지 대체로 재빠른 대응을 해낸 덕분에 피해는 최소화 됐지만 지역의 주요 길드가 던전에 들어가 있는 동안 몬스터에 노출된 지역들은 제법 피해를 입었다.
영민과 두 사람이 향한 곳 역시 바로 그런 곳이었다.
“대장. 여기 수준이 꽤··.”
“형, 이거 살아남은 사람이나 있으면 다행이겠는데요?”
간혹 1,2레벨 던전 몬스터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3레벨 이상. 심지어는 5레벨 던전 몬스터도 제법 많았고, 저 멀리서는 6레벨 던전 몬스터들의 기운까지 느껴진다.
반면 지역을 방어해야 할 헌터들은 숫자도 적었지만 수준도 낮았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
그러나 영민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이 이번에도 잘해주고 있나 보군.’
원래대로라면 지역 길드인 모멘텀이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어야겠지만 그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하필 던전에 들어간 사이 던전 쇼크가 터진 듯 했다. 시기가 앞당겨져 혹시나 했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번 역시 그들은 나서지 못했다.
남은 것은 중소 길드의 헌터들과 약간의 개인 활동 중인 헌터. 그리고 새롭게 각성한 헌터들이 전부였다.
“어?? 이 정도 마나라면··?!”
덕분에 겹겹이 잔뜩 쌓여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천천히 도시 안으로 진입하던 민호가 호들갑을 떨며 어느 방향을 바라보았다.
강대한 마나를 지닌 어떤 존재를 감지한 것이다. 무려 6레벨 던전 보스에 준하는 수준. 영민이 씨익 웃으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래. S등급이지··.”
뭔가 뒷말을 삼킨 것 같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S등급의 헌터라는 것은 그만큼 희귀하고 대단한 존재였으니까.
헌터 강국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도 오직 10대 길드의 길드장들 중 일곱만이 S등급이었고 전 세계를 다 뒤져도 S등급의 헌터는 200명을 넘지 않았다.
희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따로 관리를 할 정도로 능력 또한 어마어마했는데, 이미 A등급의 수준만 되어도 인간병기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니 S등급 헌터는 어떻겠나. ‘핵’에 비견되는, 지속 파괴력으로 따지자면 그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는 것 아니에요? S등급이면 6레벨이고 뭐고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몬스터를 이만큼이나 몰아 잡으면 들어오는 경험치가 쏠쏠하니 자신들이야 좋았지만, 왠지 괜한 짓을 하는 가도 싶은 것이다.
괜히 나섰다가 S등급 헌터에게 미움 받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가 나쁘게 마음을 먹는다면 제 아무리 영민이 있다고 해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영민의 힘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상대는 측정 불능의 괴물인 S등급 헌터였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S등급이긴 한데, ‘반쪽짜리’거든.”
“에?”
“일단은 뚫어야 한다는 말이군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는 민호와 달리 가람은 절대적인 신뢰로 영민의 말에 무조건 수긍하며 더 힘껏 창을 내질렀다.
휘익- 쩌적 펑!
A등급에 오르며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가람의 창술은 실로 무시무시해졌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소드 마스터, 아니 스피어 마스터라도 된 듯 그의 창 주위로 푸른 마나가 맺혀 뿜어졌고 애병인 ‘빙룡의 일격’이 가진 특수능력이 얼린 부위를 관통하고 폭파시키며 단번에 적들을 무력화시켰다.
+7까지 강화된 무지막지한 데미지에는 4레벨 이하의 던전 몬스터가 일격에, 5~6레벨 몬스터도 몇 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내렸다.
“민호야, 뭐하냐. 일 해라!”
“윽. 합니다. 해요!”
거기에 민호의 폭격급 광역 마법이 더해지니 길을 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주변의 몬스터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까 염려하여 몸을 사렸지만 애초에 제대로 사냥을 하는 헌터가 자신들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신경 쓰지 않고 제대로 힘을 뿜어내버렸다.
어차피 싸워야하고, 온갖 포션들을 부족할 걱정 없이 들이킬 수 있다면 그냥 저질러버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민도 그들의 행동을 크게 제지하지 않았으니 포션은 빠르게 줄어들고, 몬스터의 수는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 소란의 가운데에서 영민은 ‘감독’과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별 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경험치만 챙기다가 보스급이 나타날 때만 날 듯이 움직여서 멱을 따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문제의 S등급 헌터와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놈들! 내 뒤로는 못 지나간다!!”
어설픈 갑옷이 넝마가 되어 입지 않은 것과 비슷한 몰골로 대피소로 향하는 외길을 막아선 사내. 온 몸에 피칠갑을 했으면서도 꿋꿋하게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는 사내의 기개가 보는 이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사내는 마땅한 무기하나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며 막무가내로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공격에 실린 힘은 형편없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은 후방에서 간간이 날아오는 마법과 화살의 지원, 그리고 몬스터들의 살벌한 공격을 튕겨내고 막아내는 강철 같은 근육 덕분이었다.
“헐. 저게 뭐에요?”
덕분에 민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도 황당함을 나타내는 그것이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몬스터의 수준은 낮지 않다. 대부분이 무려 5레벨 던전 몬스터들. 사이사이에 6레벨 던전 몬스터까지 몇 마리 끼어있어서 어지간한 A등급 헌터가 장비 풀세트를 갖춰도 혼자서는 버티기 어려울 텐데 사내는 홀로, 그것도 맨 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충 보아도 그가 이곳을 막아선 시간이 꽤나 길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S등급이라는 건가.”
그랬다. S등급 헌터의 숨 막히도록 짙은 마나가 감지되는 이가 바로 저 사내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도 됐지만, 반대로 그가 무기를 휘두를 때면 머릿속에 온통 물음표만 가득 들어찼다.
“근데 뭐가 저렇게 약해?!”
체력과 방어력은 확실히 엄청나다. 과연 S등급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
헌데 이 터무니없이 약한 공격력은 대체 뭐지?
힘껏 내려친 일격을 맞았음에도 고작 4레벨 던전 몬스터가 벌떡 일어난다. 체력이 닳기는 한 모양인데 잠시만 뒤로 빠져있으면 자가 회복을 할 수 있을 만큼 어설픈 공격이라는 소리다.
“보통 저 정도 능력이면 툭 쳐도 픽픽 쓰러져야하는 거 아닌가?”
평범한 강화계가 아닌 건가?
혼란스럽기는 가람도 마찬가지였는지 한참이나 멍하니 사내가 하는 요량을 지켜보았다.
사내의 능력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극강의 체력(혹은 방어력)과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잡을 공격력.
그럼에도 불타오르는지 끊임없이 몬스터들에게 호통을 치고, 마주 싸워가는 모습이지만 아무리 지켜봐도 스스로 쓰러뜨리는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저거, 도와줘야 하는 거죠?”
덕분에 민호와 가람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S등급의 헌터라면 고유 능력이 무엇이든, 자신들보다 강력할 것이 분명하니 ‘돕는다’는 말이 무색할 텐데 사내의 상황은 좀 애매한 것이다.
자신들이 아니라도 ‘막아내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자니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고.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영민을 쳐다보자 그가 활짝 웃으며 답을 내놓았다.
“이만하면 됐겠지. 체인 라이트닝.”
쿠르르릉-
영민은 대뜸 사내가 포함된 몬스터들의 영역으로 강력한 전격의 힘을 내리꽂았다.
기본 2배, 일부에게는 6배의 데미지로 다가온 체인 라이트닝이 몰려든 놈들의 내부를 헤집으며 게거품을 물게 만들었다.
어디 그 뿐인가? 활을 꺼내 화살을 매긴 영민은 사내의 어깨 너머로 저격과 같은 활 솜씨를 뽐내며 몬스터의 개체수를 크게 줄여놓았다.
“정령 융합.”
하이 엘프의 궁술이 유감없이 힘을 발휘하며 놈들의 속성과 반대되는 데미지로 심장에 틀어박혔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계속 하세요! 이곳은 내가 막겠습니다!!”
이쯤되면 흥분해서 달려 나갈 만도 하지만 사내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 점이 바로 영민이, 강태성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분수와 역할을 안다는 것.
그러는 사이, 민호와 가람이 개입하며 몬스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세 사람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거의 모든 몬스터들이 해치워지자 숨어있던 헌터들이 나와 환호했다. 누군가는 영민이 뒤집어 쓴 울트라맨 가면을 알아보고 ‘럭키맨’을 연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활약을 한 세 사람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숨어 있던 이들 중에는 A등급의 헌터도 있던 것이다.
힘을 합쳤다면 영민들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헤쳐 나갔을 수 있는 이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가 위험이 사라지자 나타나는 것이 결코 좋게 보일 수는 없었다.
“유명한 분이셨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철우라고 합니다.”
물론 단 한 사람에게는 예외다.
자신을 강철우라고 밝힌 사내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뻗어 인사를 건넸다.
“럭키맨이라는 팀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누군가는 꺼려할 수도 있었지만 영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마주 잡았다.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손. ‘최강의 딜탱’으로 불리던 철우의 미숙한 모습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혼자서 저 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각성을 했으니, 힘 닿는 데까지 역할을 할 뿐이죠. 보신 것처럼 실상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하.”
겸손한 것인지 정말 스스로를 낮게 보는 것인지 자신을 낮추는 철우였다.
실제로 몬스터들을 막아낸 것은 큰 일이었으나 원래대로의 미래에서도 ‘공격력의 부재’로 인해 철우의 공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S등급 헌터라는 타이틀 덕분에 던전 쇼크가 정리 된 후 이름을 알리고 10대 길드에 스카웃이 되기는 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철우의 고유 능력인 ‘생명의 전사’는 어마어마한 생명력과 생명력 회복속도를 자랑하지만 ‘금속 방어구 착용 불가’라는 패널티로 뭔가 애매한 반쪽짜리 능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높게 쳐줘도 D등급 헌터 수준인 공격력은 탱커로서의 효용성마저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철우는 S등급 헌터로 인증을 받았음에도 6레벨 이하의 던전만을 전전하며 ‘고기 방패’ 취급을 받다가 회의를 느끼고 길드에서 스스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정확히는 길드에서 그것을 유도한 것이었다.
어쨌든 S등급 헌터인 만큼 초기 계약에 따라 철우에게 지급해야 할 연봉과 배분율이 꽤나 높았고, 길드는 그것이 너무나 아까웠던 것이다.
강철우가 강태성을 만난 것도 바로 그 이후.
당시 마땅한 메인 탱커를 보유하지 못했던 강태성의 팀에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등급만 높은 고기 방패’에서 ‘최강의 딜탱(딜러 겸 탱커)’로 극적인 변신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영민 역시 그 변화의 이유와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철우님과 동료가 되고 싶습니다.”
< 82화 - 철우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