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신벌의 대지 (2) >
영민은 즉시 태블릿을 조작해 헌터넷에 접속했다. 등록자를 익명으로 하고 한 개의 ‘비약’을 경매에 내놓았다. 경매 기한은 3일. 그 정도면 충분히 소문이 퍼질 터였다.
그리고 영민의 예상대로, 헌터넷이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능력치라는 개념에 대해 갸웃하는 모습이었지만 곧 ‘게이머’ 계열의 헌터가 나타나면서 제대로 불이 붙었다.
아무런 노력 없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키는 아이템이라니? 더구나 중복 적용을 이용해 최대치까지 사용한다면 상위 헌터들이라도 적지 않은 스펙 업이 가능하다는 점이 큰 화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이건 고유 능력의 종류와도 관계가 없지 않은가? 강화계만 강한 힘과 체력을 갖는 것이 아니고 변화계, 방출계, 조작계만 강인한 정신력과 마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 대한민국 10대 길드는 물론 세계의 대형 길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민이 곧 헌터협회를 찾아 아이템의 존재와 능력을 공증 받으면서 논란과 경쟁은 정점을 찍었다.
그렇게, 최초의 비약이 300억원에 팔려나갔다.
모두가 이 아이템을 경매에 올린 이를 혈안이 되어 찾았지만 영민이 공증을 받을 때도 제 3의 신분을 내세웠기에 누구도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대신 비약이 팔린 바로 그날 저녁, 또 다른 비약이 경매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이틀의 경매 기한. 첫 번째 비약을 손에 넣기 위해 돈을 끌어 모았던 자들이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번에야 말로 비약을 손에 넣기 위해 자금력을 한계까지 끌어모았다.
320억. 340억.
그럴수록 비약의 인기와 가격은 치솟아만 갔다. 물량이 풀렸으니 가격이 내려갈 것이다? 그런 허술한 생각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한 개 두 개씩 물량이 풀렸지만 수요는 어마어마하게 많았기에 오히려 갈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추세였다.
물론 거기에는 영민이 민호의 헌터넷 계정을 이용해 익명의 고액 입찰을 걸어댄 까닭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비약이 세상에 20개쯤 풀렸을 때, 영민은 비로소 목적했던 행동을 개시했다.
일본의 헌터 협회에 익명으로 ‘현상금’을 건 것이다. 대가는 다름 아닌 ‘비약’. 헌터계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비약이 현상금으로 걸린 만큼 미션 보상에 대한 관심도 커지겠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기 어려운 애매한 아이템일 뿐이다.
그런 애매함 때문에 과연 일본이 비약을 포기 할 수 있을까?
아마 일본의 대형 길드들이 어떤 로비와 압력을 행사해서라도 비약을 받아내고,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 할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국부 유출 따위보다도 비약을 손에 넣어 강해지는 것이 더 큰 관심사일 테니까.
헌터란 원래 그런 존재다.
‘어쩌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고.’
그리고 현상금 보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일본의 대형 길드들이 스스로 미션을 클리어하고 영민과 거래를 하려 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던전을 클리어하는 수고로움까지 덜 수 있지 않겠나?
영민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차분하게 소식을 기다렸다.
* * * * *
‘실패, 실패, 실패. 에라이. 못난 놈들.’
그러나 상황은 영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만 않았다. 호들갑스럽게 달려들었던 일본의 대형 길드들이 줄줄이 물을 먹으면서 시간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영민은 비약의 유통까지 줄여버리며 그들이 더욱 간절해지도록 만들었지만 생각처럼 미션을 수행해내는 일은 없었다.
시간만 지체되자 변화가 생겼다. 바로 미국, 중국 등에서 일본을 압박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던전 입장료는 충분히 내겠다. 그러니 능력이 없으면 던전을 개방해라.
듣기 좋게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주요 골자는 이거였다. 일본으로서는 크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래도 버티나 보자.’
그러는 사이 영민이 국제사회의 행동에 호응하듯 현상금을 높여버렸다. 바로 비약의 수를 1개에서 3개로 올려버린 것.
그러자 일본 내의 길드들은 필사적이 되고, 다른 국가들의 압박이 거세졌다.
3개 중 1개를 팔아줄테니 던전을 개방해라. 그렇지 않으면··.
거의 협박성의 말들과 함께 각국의 던전 개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5레벨 이상의 고레벨 던전을 클리어 할 능력이 없는 국가들이 보물상자처럼 꽁꽁 감추고만 있다가 지난 던전 쇼크와 같은 상황이 발생 할 수 있으니 고레벨 던전에 한하여 출입 제한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던전 쇼크 당시 6레벨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한 두 개 지역이 초토화 된 국가가 한 둘이 아니라 일 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나마 6레벨 던전 몬스터까지는 화기가 어떤 식으로든 통하니 다행이지 미사일로도 단 번에 죽일 수 없는 7레벨 던전 몬스터라도 풀려나면 그야말로 재앙이 일어난다. 헌터력이 약한 국가들의 경우 자국 헌터의 성장을 기다리다 되돌릴 수 없는 타격과 함께 몬스터들에게 국토의 상당수를 내어주게 되고, 그로인해 진입이 불가능해진 던전들에서는 또 다시 브레이크가 일어나 수복을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민처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강대국들의 주장은 비슷했다. 그 전에 타국의 헌터들을 들여서라도 던전을 없앨 수 있도록 각국의 규제를 완화하자는 것. 비단 현상금 던전 뿐 아니라 일반 5레벨 이상의 던전부터는 조금 더 비싼 입장료를 내더라도 타국 헌터들이 이용 할 수 있게 하자는 목소리가 높게 일어났다.
‘다행인건가.’
물론 5레벨 던전을 소화하지 못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없다시피 했으니 꼼수였지만 영민은 어찌됐건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강태성의 기억 속에서 이와 같은 움직임이 벌어지는 것은 다음 던전 쇼크 이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미 몇 개의 국가가 국민의 절반을 잃을 만큼 큰 타격을 받은 뒤이기도 했다.
영민의 행동으로 인해 미래가 변화한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먼저 던전을 공략하고 그로인해 몬스터들이 지역을 차지하는 일이 없어진다면, 또 보다 적극적으로 헌터들이 던전을 공략해서 빠르게 성장해간다면 멸망을 막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영민은 이 일이 얼마나 큰 나비효과를 불러 올지 모른 채 긍정적으로만 생각했다.
각국의 던전 출입 완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가 완료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일본이 백기를 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과 삼일 만에 조건을 수용한 것.
그 삼일 동안 대형 길드들이 각자, 또 연합하여 현상금 미션 수행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세 개의 비약 중 하나라도 확보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것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어떤 압력을 넣었는지 무상 양도도 아닌 ‘판매’의 개념이었다. 스텟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팔렸던 비약의 값이 500억 정도였으니 그 정도는 내야 할 테고 일본 정부는 그것을 다시 자국 길드 중 하나에게 팔아먹을 것이다. 세 개나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려먹었으니 괘씸죄가 적용되어 꽤나 비싼 값을 치러야하겠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헌터력이 낮다는 콤플렉스가 있던 일본은 욕심을 부리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 셈이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미국, 중국, 러시아의 내노라 하는 길드들이 앞다투어 일본에 입국했다. 심지어 미국은 아예 전원을 A등급 헌터로 맞추기도 했다.
비약의 제작자 혹은 습득자를 포섭하는 것이 베스트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시중에 나온 비약이라도 쓸어 담아야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헌터 강국의 위상을 계속해서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이쯤되자 영민은 천둥의 구슬을 스스로 획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경제력도, 군사력도, 헌터력도 상대적으로 뒤지는 대한민국에까지 진입 기회가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것이다.
만약 돌아온다 해도 대형 길드의 몫일 테고 모두에게 개방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슬쩍 정보를 흘렸다. 강태성의 기억 속에 있던 단편적인 힌트였지만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관건인 현상금 미션에서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전투력이 부족한 건 아니니까 말이야.’
영민이 ‘익명의 제보’를 한 것은 미국과 중국, 일본의 길드들이 각각 한 번씩 던전에 진입하고 난 뒤.
한 차례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힌트를 제공하자 방향이 잡혔다. 마구잡이로 이것저것을 만져보았던 1회차 진입보다 확실히 포커스를 맞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미국에서 3회차 입장 시 미션을 클리어 해낸 것이다.
천둥의 구슬을 확보한 미국은 즉시 아이템에 대한 실험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특이점이나 효용성을 찾지 못했다.
과연 이것이 비약 3개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 비약의 소유자는 대체 무엇을 보고 그만한 현상금을 건 것일까. 많은 고민과 의심이 있었지만 애초에 미션을 클리어 하기 전까지는 아이템의 이름 이외에 다른 정보를 얻을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러니 뭔가를 알고 현상금을 걸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나마 유추 할 수 있는 것은 ‘전격’ 계열의 고유 능력을 지닌 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 외에는 알아낼 길이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이 천둥의 구슬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동안 영민은 민호와 가람을 한국에 남기고 홀로 하와이로 향했다.
하와이라고 하면 신혼여행의 성지이자 지구 최고의 휴양지, 쇼핑의 천국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곳이지만 영민이 열 시간도 넘는 비행을 거쳐 이곳으로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곳에 신벌의 대지로 향하는 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이 천둥의 구슬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현상금의 수령 장소를 이곳 하와이로 통보했다.
어느 국가여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미국령인 하와이라면 그들로서도 땡큐다. 현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그들의 영토에 나타난 셈이니 그들의 위상도 살고 온 김에 휴가도 즐길 수 있으니까.
더불어 한 가지 더.
의문의 ‘비약 공급책’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와이는 바다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져있는 몇 개의 섬이다. 비행기가 아니고선 쉽게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니 누가 들어왔는지 공항의 출입국 기록만 뒤지면, 그 중에서 헌터를 추려내면 본인의 정체 또는 하수인의 정체를 밝혀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모두 영민의 계산에 들어 있는 일이었지만.
애초에 그럴 줄 알고 LA에 내려 유령마를 타고 밀입국한 영민이었다. 덕분에 며칠이나 걸려 망망대해를 달려야했지만 정체를 들켜 귀찮아지는 것보다야 백번 나은 일이다.
“확인하시죠.”
사실 그렇게 바다를 건너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은 ‘공간’을 고유능력으로 다루는 헌터들 중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니 방심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 탓인지 미국팀은 영민과의 교환에서 별다른 수작을 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 했다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셈이 될 수 있으니 오히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꽤나 친절한 모양새였다.
덕분에 수월하게 천둥의 구슬을 손에 넣은 영민은 혼령질주와 은신 스킬 등을 이용해 시선을 따돌리고 최종 목적지인 오하우 섬의 하나우마 베이로 향했다.
깊지 않은 수심에 맑디 맑은 바닷물. 가까이에 산호들도 많아 스노쿨링의 명소로도 꼽히는 곳.
그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에 이름부터 사나운 ‘신벌의 대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 74화 - 신벌의 대지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