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또 다른 천재 (2) >
섬전 같은 찌르기.
따로 버프를 건 것은 아니지만 이미 B등급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속도에 한가람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역시.’
그러나 무모하게 맞서려 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영민의 검 끝을 정확히 바라보고 몸을 움직였다.
파앙
공기가 터져나갈 정도의 강맹한 위력이었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차이로 몸을 숙여 피해냈다.
휘릭
그 뿐이 아니다. 그 위태로운 순간, 오히려 창을 놀려 반격까지 가해왔다.
능력 이상의 공격을 피하느라 제대로 힘이 실리지는 못했지만 어지간한 헌터들도 몸이 꿰뚫릴 만큼 중심이 잡힌 찌르기였다.
‘기억대로군.’
물론 그 또한 영민에게 닿지는 못했다. 만약 비슷한 스펙이었다면 영민 역시 위태로웠을지 모르나 그러기엔 이미 격의 차이가 너무 컸다.
‘약점까지 그대로.’
그것이 바로 한가람의 약점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이들은 학살을 할 수 있고, 비슷한 수준의 상대까지는 거의 확실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지만 스펙의 차이가 현격할 경우 크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혹은 극도의 변화와 변칙을 섞는 상대에게는 초반에 다소 고전한다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초반’에 고전을 한다는 것이다. 이 녀석도 워낙 어마어마한 천재이다보니 극도의 변화와 변칙을 섞는다 한들 한 번 파악 되고 나면 그 변칙과 변화의 간격까지 ‘계산’해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괴물’이다.
단 한 번의 격돌일 뿐이지만 영민은 그에 대한 강태성의 기억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합격입니다.”
그 순간 영민은 검을 내리고 대치 상태를 풀었다.
“····.”
쉬익!
그러나 한가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세를 고쳐잡자마자 상대를 꿰뚫을 수 있는 최단거리로 창을 연달아 찔러냈다.
채앵 챙 챙
영민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검으로 쳐내기는 했지만 공격 자체는 꽤나 매서웠다.
이어지는 3연격.
찌르기의 정수이자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깔끔한 일격이지만 이번에도 영민에게 닿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영민은 그의 장점이자 특징인 ‘최단거리 공격’을 역으로 이용해서 투로를 예측하고 있었으니까. 재능은 천부적이지만 아직 갈고 닦을 부분이 많이 남아있었다.
“계속 할 겁니까?”
몇 번이고 계속되는 공방. 이제는 일방적으로 한가람이 공격하고 영민이 방어하는 모습이지만 단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영민이 생글거리는 낯으로 물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여전히 경계심이 잔뜩 어린 모습.
영민은 더 이상 말을 돌리지도, 떠보지도 않았다.
“당신의 재능을 사고 싶습니다.”
“··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한 표정. 영민은 그가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용건을 말했다.
“‘간격’을 파악하는 당신의 능력을 사고 싶습니다. 이런 곳에서 재능을 썩히지 말고 제 팀에 들어오십시오.”
“그게 무슨··.”
‘간격’에 대한 것은 어떻게 아는 거지? 한가람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럴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할···.”
“당신의 ‘빚’은 제가 갚아드리죠.”
“!!”
혹시나 했던 한가람의 마음에 큰 동요가 일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해도 이자를 갚고 아내와 아이에게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그런데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내 빚이 얼만줄 알고···.”
“10년 계약에 이백억. 제가 당신에게 지급할 금액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사실 강태성도 그의 빚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백억이 넘고, 이백억까지는 안 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세게 지른 것. 부담은 되지만 영민의 재산이 현재 일천 하고도 수백 억에 달하니 무리까지는 아니었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작스러운, 또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놀라운 제안에 한가람이 어쩔 줄을 몰라 눈알만 굴렸다.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만약 생각이 있다면 이번 주 내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영민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주고 슬쩍 가면을 썼다.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만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당신은···!”
그가 럭키맨이라는 것을 한가람도 알아본 모양. 영민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더한 뒤 은신과 함께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오늘부로 실직자가 되시겠네요. 오늘 이 작업장을 망가뜨릴 생각이거든요.”
그를 부추기기 위해서는 당장 일할 곳을 날려버리는 편이 나았기에 영민은 주저없이 섬을 누비고 다녔다. 몬스터를 강화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몬스터 사육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으로 온갖 커뮤니티를 통해 실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심지어는,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직접 손을 써 한 두 명의 헌터들을 죽음으로 몰고가기도 했다. 살인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헌터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과 ‘헌터들조차 당할 수 있다’는 인식은 아주 커다란 것이기에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연출한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한 지옥도가 아직도 선명히 머릿속에 남아있기 때문인지 그 광경을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사태를 파악하는 즉시 아리랑과 몬스터 작업장을 가진 대형 길드들에서 영상을 강제로 삭제하고, 반박 기사와 글들을 올려대는 등 대응을 하겠지만 이미 영상과 사진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상태일 것이다.
이후는 언론과 대중의 몫.
그렇게 영민은 적당히 일을 벌리다가 유령마를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
‘첫 타자는 매를 많이 맞는 법인데 아리랑이 욕 좀 먹겠군.’
슬쩍 인터넷을 살피니 동영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랑에서는 아직까지 전혀 모르는 기색. 헌터넷이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SNS와 동영상 사이트에 올린 터라 반응이 느릴 것은 분명했다.
계정이나 스마트폰 모두 이것을 위해 철저하게 세탁한 것이었기에 걸릴 위험은 없지만 영민은 사진과 영상을 찍고 업로드 한 스마트폰을 바다 속에 던져버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던전에 들어가봐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한가람에게서 연락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
* * * * *
띠리리리-
한가람이 영민에게 전화를 건 것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정확히 3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아리랑이 신속히 섬을, 작업장을 폐쇄하고 모든 몬스터들을 도축하는 한 편 ‘연구 시설’이었다며 연막을 친 것이다. 사실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도축 이외에 각종 생체 실험을 하기도 하니까.
나중에 언제고 터질 일이기는 했지만 미리 터져버린 탓에, 아직까지는 길드의 힘이 정부를 넘어설 만큼 커지지 못한 탓에 멈추지는 않아도 다소 위축 될 수밖에 없으리라.
실제로 일이 터지자 정부에서는 각 길드에 곧장 압박을 넣었다. 사태가 의외로 심각하니 ‘몬스터 작업장’의 운영을 정지 시켜야 할 수 있다는, 반쯤 떠보는 말이었지만 각 길드들은 알면서도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는 내지 않던 거액의 뒷돈을 로비로 찔러 넣어줘야 했다. 상황이 정말로 더 커진다면 누구 하나 ‘본보기’가 필요하게 될 수 있었으니까.
딱 거기까지.
정부도, 길드도, 기업도 몬스터 작업장 운영을 그만 둘 생각 따윈 없었다. 지난 던전 쇼크 이후 꼭 던전 주변이 아니라도 언제든 몬스터의 습격으로부터 대비해야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마나석을 이용한 일반인용 무기나 방어구 따위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나 돈이 되는 사업을, 뒷돈을 마련 할 수 있는 창구를 고작 여론 때문에 닫아버릴 리가 없었다.
‘일단 목적은 한가람의 영입이었으니까.’
그럴 것이라는 사실은 영민도 예상하던 바였기에 새롭거나 놀랍지 않았다. 원래는 한 차례 더 던전 쇼크가 터지면서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길드의 힘이 너무나 커져버린 상태라서 정부가 뭐라하든, 대중이 뭐라하든 배째라는 식으로 나왔었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당장 작업장의 수를 크게 늘리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것으로 만족했다.
“······거기서 뵙죠.”
한가람과의 통화는 간단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다.
약속 시간은 30분 뒤.
이미 마음이 달은 한가람이 근처까지 와서 전화를 한 탓에 굳이 멀게 잡을 필요가 없었다.
“여, 여기입니다.”
영민은 굳이 시간에 딱 맞춰 나가지 않았다. 10분 정도 늦장을 부려 카페에 도착했고 한가람이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전혀 기분이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잔뜩 긴장한 모습. 강태성과 함께 고레벨 던전을 누비던 용맹한 모습과는 쉽게 매치가 안되는 모습이다.
“마음의 결정을 하셨나요?”
영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것이 두 사람 모두가 원하는 바였으니까.
“예.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큰 돈을··.”
뭐라 대답을 하는 대신 테이블 위로 하얀 종이가 올라왔다. 영민이 미리 작성해둔 계약서의 초안이다.
그곳에는 정확히 10년 간 200억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고 그 큰 돈을 일시에 지급한다는 내용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거기까지 내용을 읽던 한가람이 놀란 눈으로 영민을 올려다보았다.
“당장 급하신 불부터 끄셔야죠. 뒷부분도 읽어보세요.”
다시 눈을 돌리니 뒷 부분에는 인센티브 조항이 걸려있었다. 던전을 몇 회 이상 클리어 할 시 얼마, 영민과 함께 팀을 이뤄 던전에 진입할 시 전체 정산금의 얼마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A등급까지 지원한다고요?”
“그 정도는 되야 영입한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다른 말로는 당장은 써먹을 데가 없다라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가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10년이나 계약 기간이 잡혀있기는 하지만 200억이면 당장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가 풍족하게 생활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었다. 거기다 이후 돈 나올 구석이 없는 노예 계약인 것도 아니지 않나? 아니, 이미 200억 만으로도 노예 계약을 충분히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데 인센티브에, A등급에 오르는 것까지 지원해준다니 다시 한 번 사기가 아닐지 의심해보게 될 지경이다.
하지만 계약서를 몇 번이고 다시 봐도 문제가 될 구석은 전혀 없어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사인을 마치자 영민은 즉시 계약서에 명시된 계좌로 200억을 이체시켰다.
통장에 찍힌 200억이라는 거금을 확인하자 거의 울먹거리는 지경이 된 한가람.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 거의 충성 맹세의 표정으로 영민의 손을 맞잡았다.
‘어차피 10년 뒤에 세상이 망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질 돈으로 이만한 전력을 얻으면 내가 고맙지.’
민호에 이은 노예 2호, 최고의 지속 데미지 딜러이자 회피 탱커인 한가람이 팀에 합류했다.
< 69화 - 또 다른 천재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