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던전 강화 (3) >
영민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활이었다. 던전 쇼크 당시 주워 쓰던 활이 아닌, 레어 등급의 새로운 활. 다만 특이한 것은 이것이 바로 강철대오로부터 보상으로 받아온 활이라는 것이다.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지천에 널려있고 허접하긴 하지만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까지 있던 창고에서 들고 나온 것이 고작 레어 아이템이라니? 더 의외인 것은 활 자체의 성능도 기존의 것보다는 낫지만 객관적으로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당장 영민이 몇 억 쯤 되는 돈만 풀어도 그보다 좋은 활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대신 약속과 달리 레어 등급 아이템을 5개나 챙겨 나오기는 했지만 모두의 예상처럼 그다지 수지 맞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직 영민만큼 무척이나 만족했다. 등급도 레어이고, 성능도 썩 좋지 못했지만 구하기는 어려운 이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건 ‘오래된 뿌리’?”
엘프들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이템은 엘프들이 오랜 세월동안 찾아 온 물건인 것이다.
오래된 뿌리는 그냥 보기엔 어설프게 굽은 단단한 나무 뿌리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가능성을 품은 물건이다.
“맞습니다. 세계수의 가능성이죠.”
바로 세계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것이다. 세계수로 가꾸기 위해서는 엘프 고유의 능력과 방식이 필요하고 시간 또한 수백년 이상 필요했지만 그 가능성 하나로 충분했다. 인간들과 달리 엘프들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이었으므로.
영민은 두루마리와 마찬가지로 발 아래 내려 놓았다. 그들에게 가져가라는 듯이.
그와 함께 엘프들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아무리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오래된 뿌리’는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인연이 있다라. 그럼 ‘시험’이 있다는 것도 알겠지?”
끄덕
영민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찰자 중 하나가 오래된 뿌리를 확보하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나는 먼저 마을로 가 있겠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 됐다.
[시험 방식을 선택하십시오. 1.궁술 대..]
'1번.'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선택한 영민. 동시에 남아 있던 엘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제히 화살을 뿌려댔다.
인간으로서는 따라오기 어려운, 기예에 가까운 궁술.
다행히 마나를 싣지는 않았지만 만약 동료 중 하나가 크게 상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뒤 바뀔 것이다.
‘마나 애로우가 아니라면야.’
그것을 알기에 영민 또한 색다른 화살을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화살 촉이 없는 화살. 무기의 성능 또한 그들에 비해 크게 손색이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는 무려 하이 엘프의 궁술이 있었으니까.
“윽.”
“아앗.”
공격을 받던 영민이 오히려 반격을 가해 엘프들을 맞춘 것은 시험이 시작되고 불과 5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촉이 없는 화살에 맞은 엘프들은 패배를 인정 하듯 행동을 멈추었고 영민은 여전히 날뛰고 있는 엘프들을 골라 맞추는 신기를 선보이며 시험에 통과했다.
애초 엘프들의 능력은 대략 B등급 헌터의 수준. 능력치의 차이가 상당했던 데다 스킬마저 수준 차이가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당신을 인정합니다.”
본래는 그들의 궁술로부터 버텨내야 했지만 오히려 제압해버린 영민. 그들 역시 영민이 사용하는 궁술이 낯설지 않은 것임을 파악하고 제법 호의적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한 번 인정을 받으니 더 이상의 시험은 없었다. 엘프들은 영민을 자신들의 마을로 데려갔고, 한 가지 경고만을 더했다.
“모든 것은 키에라 님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그 분께서 당신을 거부한다면 마을을 나가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하이엘프 키에라. 영민이 이곳에 온 이유도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함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거부 할 리도 없고 말이야.’
모든 조건이 갖춰졌으니 하이엘프가 그를 거부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타이틀 ‘엘프들의 친구’를 얻으셨습니다.]
[시크릿 미션 ‘세계수를 수호하라’가 부여됩니다.]
[시크릿 미션을 달성하면 더 큰 보상을 획득 할 수 있습니다.]
예상대로, 하이엘프 키에라는 영민을 그들의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언을 구했다. 곧 닥쳐올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압도적인 숫자로 인해전술을 펼칠 그들을 이길 방법은 사실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바로 게릴라 전. 숫자는 저쪽이 월등하지만 강자의 수만 따진다면 이쪽도 만만치가 않다. 무려 삼백이 넘는 엘프가 숲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A등급 상위에 속하는 하이엘프도 셋이나 있었다.
엘프와 하이엘프는 각각 B등급과 A등급으로 분류 할 수 있지만 같은 등급 내에서도 상위의 전투 능력을 지닌 존재들. 인간측에 5명의 A등급과 서른 명의 B등급이 있다고 한들 제법 해볼만한 싸움이 될 수 있는 이유였다.
‘세계수의 수호라, 이게 문제야. 이게.’
나쁘지 않은 전력이라는 판단도 잠시, 영민은 새롭게 생겨난 시크릿 미션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항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지니고서도 엘프들의 승률이 20% 밖에 되지 않는 이유. 그것은 바로 ‘세계수를 수호하며’ 싸워야한다는 제약 때문이었다.
사실 미션 자체는 어떻게든 세계수만 지켜내면 되는 것이었지만 엘프들이 적을 요격하는데 최적화 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멀리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미리 줄여낼 수 있는 숫자가 적어지니 막상 세계수에 근접했을 때는 막기 어려운 인해전술을 감당해야하는 것이다.
“오십 명에 대한 지휘권만 주신다면 제가 나가서 적들을 요격하겠습니다.”
“상대에게 대단한 강자들이 있다고 하지만··그대라면 어쩐지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군요. 하지만 괜찮겠어요? 그래도 동족을 해하는 일인데··.”
“안타깝게도 인간들은 동족이라는 개념보다 국가나 가족,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족이라는 개념을 따지기엔, 그 수가 너무 많죠. 옳지 못한 일을 하는 이들이라면, 저는 그들과 맞설 것입니다.”
연륜이 있기 때문인지, 인간들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인지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알겠어요. 준비가 되는 대로 아이들과 함께 떠나도록 하세요. 다만, 그 전에 잠시 나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어요?”
“··알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고 따라간 하이엘프가 뜻밖의 제안을 한 것이다.
“그대가 나와 같은 하이엘프에게서 배운 것이라 들었어요. 다만 기초 뿐이라 하니 제가 조금 더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적들을 막는데 도움이 될 거에요.”
‘나이스!’
굳이 이 던전을 강화시키고 엘프들의 편으로 돌아선 이유, 바로 ‘하이 엘프의 궁술 : 중급’을 미션을 완료하기도 전에 획득했다. 코인 상점에서 검색을 해도 찾을 수 없는 ‘하이 엘프의 궁술’은 스킬북이 아닌 전수의 형태로 영민에게 전해졌다.
[하이엘프의 궁술 : 중급을 익히셨습니다.]
[하이엘프의 궁술은 속성친화도와 정령의 등급에 따라 위력이 증가합니다.]
[하이엘프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당신의 몸에 정령의 축복이 깃듭니다.]
[정령의 기운에 힘입어 더 빠른 속도와 더 강한 힘과, 더 강인한 체력을 가집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세계수를 지켜준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보답하겠어요.”
정말? 리얼리?
단순히 하이엘프의 궁술을 중급까지만 끌어올리려고 마음먹었던 영민의 가슴에 후끈한 불이 지펴졌다.
어쩌면 단번에 하이엘프의 궁술을 상급까지 마스터해버리는 거 아니야? 생각해보면 하이엘프의 정령술이나 검술도 대단한데··. 그래, 아이템도 좋았지. 등급이 높지는 않지만 엘프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만드는 검, 스팅과 베를 짜듯 가늘게 뽑아낸 미스릴을 엮어 만드는 미스릴 체인 아머 또한 대단한 아이템이다.
‘아니면··.’
광대를 씰룩이며 즐거운 상상을 하던 영민의 얼굴이 슬쩍 붉어지며 음흉한 상상이 이어졌다.
‘흠흠, 그럴 리는 없겠지.’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외모며 피부가 연예계 탑 클래스 배우보다도 월등히 아름다운 엘프들인지라 음심이 동하기는 했지만 하이엘프는 오직 하이엘프들끼리만 결혼하여 순혈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기에 잡생각을 떨쳐냈다.
‘그래도 일반 엘프라면··.’
곧 또 다른 생각이 슬그머니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만.
잠시 후, 준비를 마쳤다는 누군가의 보고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영민은 한 대의 활을 든든하게 등에 메고 출정을 알렸다. 엘프들이 사용하는 활, 앨븐 보우를 선물로 받아 기분도 썩 좋아보였다.
인간들처럼 거창한 출정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족들에게 배웅을 받는 것으로 그만인 자리였다. 어차피 그들은 죽으러 가는게 아니라 상대를 괴롭혀주러 가는 것 뿐이니까.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게 하겠다. 그것이 출정식에서 영민이 밝힌 포부였다.
“갑시다.”
B등급 헌터 중에서도 중상위에 해당하는 전력을 지닌 오십의 엘프들이 그를 따라 몸을 날렸다.
적외선 카메라처럼 어둠 속에서도 훤하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엘프들인지라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영민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1써클 마법인 ‘나이트 사이트’를 스스로에게 걸어 야간 시야를 확보한 것이다.
엘프들만큼은 아니지만 앞장서서 움직일 수준까지는 되었다.
바로 옆에 붙어 길 안내를 하는 엘프의 덕분에 숲을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숲의 파수꾼이며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간혹 보였지만 감히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숲을 빠져나가 인간들의 거점을 멀게나마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영민에게 기분 좋은 알림이 나타났다.
[일천 명이 넘는 병사를 중독 시켰습니다.]
[당신이 사용한 독 조합이 대성공을 일으켰습니다.]
[예상치 못한 강력한 독 조합에 적들이 큰 혼란에 빠집니다.]
[타이틀 ‘독 전문가’를 얻으셨습니다.]
[적의 사기가 40% 이상 하락하였습니다.]
[적의 전투력이 30% 이상 하락하였습니다.]
[타이틀 ‘전략가’를 얻으셨습니다.]
두 개의 타이틀 습득. 독에 대한 숙련도와 공격력을 크게 올려주고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아군의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뛰어난 타이틀 효과도 기뻤지만 더 눈길을 끈 것은 적들의 상태를 말해주는 설명들이었다.
‘상황이 좋군.’
그저 혼란을 주고, 출정 시간을 늦추기 위한 행동들이었는데 행운의 영향인지 상황이 꽤나 좋게 흘러갔다.
이래서는 출정을 해보지도 못하고 철수해야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해야 할 상황. 물론 시간이 지나면 해독해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이쪽도 영민이 있으니 가만히 손가락을 빨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잠시 대기하십시오.”
먼저 영민이 은신을 쓰고 적들의 진형 한복판을 누볐다. 만일을 대비해 장군들의 처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상황과 배치만을 빠르게 훑은 뒤 빠져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남아있는 식수들에 다시 독을 풀어놓고 싶었지만 이미 만일을 대비하여 종군 사제들에게 해독 주문을 사용하게 한 뒤 음용했기에 별 효과는 없을 듯 했다.
“지금부터 작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대세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엘프들에게 생각해둔 작전을 설명하는 영민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작전이 개시 된 것은 취침 시간에서 딱 30분이 지났을 때.
식사를 막 시작하자마자 일천명이 넘는 병사가 중독 증상을 호소하며 난리를 피운 통에 제대로 배도 채우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이들이, 간신히 숨을 돌리고 자리에 누운 그 순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콰앙! 쾅! 쾅!!
숲의 반대 방향에서 달려온 난쟁이 같은 것들이 제지를 할 틈도 없이 몸을 들이받고 자폭해버린 것이다.
덕분에 몇 개나 되는 건물과 임시 막사가 터져나가고 불타 올랐다.
그 뿐이 아니다. 그것이 신호탄이 된 듯 막사들에서 일제히 불꽃이 솟아올랐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불에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된 천막들이지만 불의 정령이 내뿜는 불꽃까지 견딜만큼은 아니었다.
“으아악!!”
“기습이다!”
“어서 불을 꺼!”
“장군님은, 장군님은 무사하신가!!”
덕분에 난리가 났다. 자폭 테러가 일어난 위치가 하필이면 간부들의 숙소 인근이었기에 그들의 안위부터 챙겨야했고, 간부들은 대부분 멀쩡히 나타났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2차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곳의 소란에는 관심을 두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끅!”
“도, 독이다!”
그 사이, 반대편에서는 새벽 안개와 같은 독연이 덮치고 있었다. 영민이 또 다시 마구잡이로 쥐고 부숴 만들어 낸 독가루들을 바람의 정령들이 구석구석까지 배달해준 것이다.
요양하며 회복 중이던 환자들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물을 통해 중독되지 않았던 이들까지 구토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혼란에 물들었다.
“자,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그 틈에 영민과 엘프들이 나섰다. 충분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간부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장소와는 정 반대의 위치에서 화살을 당기기 시작했다.
< 65화 - 던전 강화 (3)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