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럭키 박스 (4) >
영민과 함태식의 사이에 물음표가 가득 새겨진 박스 하나가 튀어 올랐다. 움찔 몸을 피한 영민과 달리 함태식은 전혀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다. 저것이 무엇이든 힘으로 박살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지척에 다달았을 때, 럭키 박스의 뚜껑이 열리며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럭키 박스에서 ‘데스’가 등장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데스는 누군가의 목숨을 취해야만 사라집니다.]
‘헉.’
그 알림을 본 순간, 럭키 박스에서 나온 연기 같은 것이 어떠한 형상을 갖추는 순간 영민은 숨을 멈추고 빠르게 몸을 숨겼다.
거의 본능적인 회피.
그가 아는, 사신이라고도 불리는 데스는 7레벨 이상에서 등장하는 최상급 몬스터 중 하나였다.
‘미친! 저게 저기에서 왜 나와?!’
서걱!
데스가 가볍게 휘두른 낫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함태식의 목이 가볍게 잘렸다. 무려 강화계의 B등급 헌터건만, 그의 방어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포도송이 따듯 아주 간단히 목을 따버린 것이다.
하늘로 튀어오른 수급을 뼈다귀 뿐인 손으로 잡아채니 순식간에 생기를 빨려 두개골만 남았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모습.
만약 순간적인 직감을 믿지 않고 강력한 무기쯤을 바라며 기다렸다면 자신도 똑같은 꼴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자 등줄기에 식은 땀이 절로 흘렀다.
‘제발 그냥 가라. 제발!’
은신 스킬을 발동시킨 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놈을 지켜보던 영민은 순간 숨이 멎을 뻔 했다. 놈이 정확히 그가 있는 자리를 슥 바라본 것이다.
알았나? 알아차린 건가? 싸워? 개죽음일 게 뻔한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죽어주는 건··.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무의미한 저항이라도 해봐야하나?
그 사이 데스는 영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정확히는 다른 자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제 자리를 맴돌다 사라졌을지 모르는 그를 자극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건 또 뭐야? 미친!”
“튀어!!”
뭔지 모르면 그냥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소란을 떨며 움직이는 강철대오의 B등급 헌터들 때문이다. 심지어는 견제한답시고 알량한 능력을 발휘해 공격을 퍼붓기까지 했다.
데스의 시선이 휙 하고 돌아가더니 유령처럼 날아서 놈들을 따라잡았다.
그 동안 영민은 죽어라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럭키 박스의 설명대로라면 10분 후에 놈이 사라지니 그때까지만 숨어있으면 될 터였다.
그렇게 10분을 기다린 뒤, 유령마를 타고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다각 다각
도착한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데스도 사라졌고 럭키 박스도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목이 잘린 함태식의 시체 뿐. 혹시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드레인이 발동했다.
[함태식의 스킬 ‘육체 강화’를 흡수합니다.]
[드레인 능력이 진화합니다.]
[상대의 체력과 마력을 흡수 할 수 있습니다.]
“어?”
더불어 능력의 진화까지. 그런데 영민은 그 알림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체력과 마력의 흡수?”
처음에는 기존처럼 시체로부터 흡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설명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지 않은가? 혹시나 싶어 뒤져보니 새로운 스킬 두 개가 생겨나 있었다.
[라이프 드레인][지속 능력][0.1%]
대상의 체력을 원거리에서 흡수 할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 흡수 할 수 있는 거리와 흡수량이 증가한다.
- 최대 흡수 가능 거리 : 1m
- 체력 흡수량 : 초당 1
- 사용 마나 : 초당 5
[마나 드레인][지속 능력][0.1%]
대상의 마나를 원거리에서 흡수 할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 흡수 할 수 있는 거리와 흡수량이 증가한다.
- 최대 흡수 가능 거리 : 1m
- 마나 흡수량 : 초당 1
- 사용 마나 : 초당 10
초당 1에 불과한 미미한 흡수량에 1m 이내라는 짧디 짧은 거리. 거기에 스킬 사용 자체에 초당 마나 소모라는 옵션이 붙으니 이 정도면 배보다 배꼽이 커도 훨씬 큰 상황이었다.
숙련도가 오르면 나아진다고는 하지만 본전 치기를 할 정도까지만 성장시키려 해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 뻔했지만 숙련도 올리기라면 남들의 수 배, 수 십 배는 자신 있는 영민이 아니든가?
특히 한 번 발동 시키면 저절로 유지되는 지속형 스킬이라는 것에 눈도장을 찍어두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다른 B등급 헌터 넷의 시체를 드레인 하기 위한 것. 10분 이상 지나서 혹시나 했지만 다행히도 모두 드레인이 가능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에게서 흡수한 것들이 대부분 ‘힘’이나 ‘민첩’과 같은 스텟이 아닌 ‘저항력’, ‘스킬’ 따위의 것이란 사실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확률이 다른 건가?’
강태성 때처럼 고유 능력 자체를 흡수한 경우는 없었지만 그들이 체화한 스킬을 흡수하고 자기것처럼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강철대오 이 새끼들··. 조금만 기다려라.”
마지막 한 놈의 시체에서까지 아이템을 벗겨낸 영민은 시체를 한데 모아 불 태웠다. 놈들에게 혼선을 주고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마법적인 불꽃이라 화력 면에서나 지속력 면에서나 월등한 탓에 아마도 재가 된 시체에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는 힘들 듯 했다.
놈들의 시체가 제대로 타오르는 것을 확인한 영민은 다른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서둘러 몸을 피했다. 며칠 만 피해있으면 게이트 키퍼가 경호를 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강철대오라 해도 쉽게 손을 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 동안 죽어라 사냥을 한 영민이 A등급에 도달하는 순간, 놈들을 향한 복수가 시작 되리라.
A등급 헌터 다수는 물론 S등급 헌터까지 보유하고 있는 만큼 전면전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손톱 밑의 가시만큼 아프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한바탕 푸닥거리가 있고 난 뒤, 영민은 게이트 키퍼 측에 연락을 해서 상황을 알렸다. 물론 그들이 정보를 흘렸거나 일을 꾸민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알기로 게이트 키퍼와 강철대오는 앙숙과도 같은 관계였다.
그 때문에 게이트 키퍼에 넘어갈 것을 막을 겸 강철대오에서 직접 손을 쓴 것이기도 했고.
게이트 키퍼에서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확인하기로 했고 정보팀과 언론팀을 움직여 여론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정말로 강철대오가 그와 같은 짓을 했다면 적대 성향을 가진 그들로서는 큰 패를 쥔 셈이니까.
계약도 빠르게 진행하기로 했다. 강철대오의 습격 소식이 터지고, 곧장 게이트 키퍼가 파트너십을 맺는 모양새를 취하면 그들로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권영민 : 민호야, 2차 집결지에서 보자.]
[김민호 : 형, 괜찮아요? 알겠어요. 그리로 갈게요!]
당장 내일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하고 일단 민호와 합류했다. 귓속말 기능이 있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을 전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행히 민호는 꾀를 잘 써서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추적을 따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기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대로에서 그들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더해진 신빙성 높은 기사들. 게이트 키퍼에서 작정하고 뿌린 기사였다.
강철대오가 럭키맨을 강제로 편입시키려다가 실패하고 습격을 시도했다는 것. 그리고 럭키맨이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그들을 사람이 없는 안전한 장소로 유인했고 간신히 몸을 피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게이트 키퍼는 이번 사태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많은 인명을 구한 럭키맨과 파트너십을 맺기로 했다는 것까지.
앞으로 럭키맨을 노리는 자나 집단이 있다면 게이트 키퍼를 먼저 상대해야 할 것이라는 다소 광오함이 섞인 엄포에는 덤이었다.
사실인 부분도 있고,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그 또한 노림수가 있거나 상대가 잡아떼는 것을 고려한 고도의 언변이라는 것을 알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대로네요.”
이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강철대오는 딱 잡아뗐고 그들의 길드 마크가 찍힌 장비들을 증거로 내놓자 ‘개인의 일탈’로 몰고 갔다. 시체들이 불 탔으니 그쪽을 파고들어 무죄를 주장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감식을 하고나면 결국에는 밝혀질 일이었기에 무리하지는 않았다. 사실 습격자들의 정체와 수준이 밝혀져봤자 영민에게 좋은 일만 하는 것일 뿐이었다.
B등급의 헌터가 A등급 헌터 하나와 B등급 넷의 습격을 이겨냈다! 이 얼마나 좋은 이야기거리란 말인가? 아마 과장이 붙어서 ‘압도적으로 해치웠다’는 식의 기사까지 쏟아지겠지. 그렇게되면 영민의 주가는 올라가고 강철대오의 이름에는 똥칠을 하게 될 터였다.
다만 이쪽 역시 영민의 요청으로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 당장 영민의 수준이 밝혀져봤자, 과장되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게이트 키퍼에도 ‘누군가의 구원’이 있었다는 식으로만 얘기해둔 상태였다.
“대중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니까요.”
이세종 이사가 계약서에 사인을 해서 넘기며 말을 받았다. 그 역시도 모니터 세 개로 여론 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 하는 중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영민와 게이트 키퍼의 편이다.
무려 일만이 넘는 인원을 구원한 살신성인의 영웅을 살해하려 했으니 엄청난 비난이 몰아치는 것은 당연했고 게이트 키퍼는 ‘럭키맨과 함께 합니다.’ 수준의 워딩 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공식 발표 직후 주가가 수직 상승한 것만 봐도 그 효과는 알 수 있다. 이미 상한가를 찍은 것도 모자라 매수 대기에만 수백억의 자금이 몰릴 정도였다.
사람들이 거의 애국하는 심정으로 게이트 키퍼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덕분에 ‘기원’에서 비롯한 강력한 버프들이 수시로 영민에게 적용되었다.
‘그때 적용됐으면 좋았을 걸.’
이 정도 힘이라면 함태식과 일전을 벌여도 해볼만 하다고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당장 전투에 임할 일은 없었다.
‘매스컴이 무섭긴 무섭네.’
상대도 10대 길드 중 하나인데다 온갖 더러운 짓도 서슴치 않는 놈들이다 보니 살짝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이렇게 좋은 꼭지를 놓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보도자료를 뿌린 쪽 역시 10대 길드인데다 요즘 가장 핫한 헌터 중 하나인 럭키맨이 엮여있는 건이니 말이다.
덕분에 강철대오의 사옥 앞에서는 시위가 일어나고, 온라인이 뒤집어졌으며 의회에서도 헌터들의 ‘강압에 의한 길드 가입 행위’와 ‘길드 가입 거절에 대한 보복 행위’에 대해 강한 규제를 가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정치인들이라면 누구보다 이슈 사안에 민감한 이들이니까.
강철대오와 유사한 짓을 하는 몇몇 길드에서 손을 쓰면 결국 유야무야 될 공산이 크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는 즉시 대처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동안 영민과 민호는 게이트 키퍼에서 제공한 모처에 숨어 의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멀쩡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보다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닌지 추측성 기사가 나돌 수 있도록 모습을 감추고 있는 편이 유리했다.
사실 헌터들이야 어지간한 부상을 입었어도 포션을 써서 멀쩡히 회복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말이다.
“헐. 형, 이거 봐요.”
꼬박 하루를 그러고 있는데 재밌다며 계속해서 기사와 댓글을 살피던 민호가 다급하게 영민을 불렀다.
또 무슨 기사가 떴나? 살짝 귀찮은 표정으로 기사를 확인한 영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만큼 충격적인 기사였다.
[아리랑, 강철대오와 한 판 붙나?]
던전 공략에 투입되느라 럭키맨의, 영민의 소식을 뒤늦게 접한 진지한이 분노하며 단신으로 강철대오의 본사에 쳐들어갔다는 기사였다.
< 60화 - 럭키 박스 (4)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