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럭키 박스 (3) >
영민이 제안한 것은 파트너십이었다. 서로의 목적을 이루되, 한 쪽에 종속되지 않는 관계를 의미했다.
“나쁘지 않군요.”
게이트 키퍼 역시 그것을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다. 길드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면 이것은 차선쯤 된다고 말 할 수 있었으니까.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바로 영민이 ‘얼굴 마담’만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광고 모델 같은 거랄까. 대신 영민은 계약 기간 동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하고 게이트 키퍼는 모든 인력과 정보력을 활용해 그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게이트 키퍼가 원한 것 역시 그의 이미지였고 그 동안 사고가 생긴다면 자신들도 타격을 입을 테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울타리 삼지만, 당장 영민 스스로가 A등급에 오르기만 해도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그때가 되면 S등급이 아닌 이상 누구와 적이 되든 상관이 없어진다. 맞상대가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몸을 피하는 일쯤은 가능해지니 설사 10대 길드 중 하나와 척을 지더라도 게릴라 전을 펼쳐 오히려 괴롭혀 줄 수도 있을 지경이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영민은 민호를 이끌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아직 그를 주시하는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지지만 이 계약만 체결되고 나면 게이트 키퍼가 나서서 주변 정리를 해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사 같은 10대 길드라 할 지라도 그들에게 쉽게 접근하거나 수작을 부리기 어려워지겠지.
“민호야, 너 ‘그거’ 써야 할 것 같다.”
한참을 이동하던 중, 영민이 뜬금 없는 한 마디를 던졌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약속해놓은 행동이었다.
순간 민호의 표정이 굳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느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은신 능력이 없는 민호를 위해 영민이 대여해준 ‘도깨비 감투’를 착용한 것이다. 착용과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겠지.
은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감지 계열 능력자와 조금만 가까워져도 발각 되고 말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민호에게 신경쓰지 못하게끔 영민이 행동을 취했으니까.
“유령마 소환.”
유령마를 타고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와 눈앞의 상대 중 어느 쪽에 집중할지는 뻔한 결과다. 이동과 동시에 여러 기척들이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 놈이 아니군.’
민호가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때까지 그들이 아주 자신을 놓쳐서는 안 됐기에 혼령질주의 사용을 자제하니 따라 붙는 인원이 꽤나 많았다.
급하지만 안정된 느낌. 영민은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그 감각을 통해 추적자의 수와 집단의 수를 가늠했다.
‘이건··집단이다.’
감각에 걸려든 이들 간의 거리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서로 무관한 이들이 아니었다. 서로의 동선이 얽혀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집단이라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비껴갈 텐데 애초에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 다는 듯, 뭉쳐서 이동하고 있었다.
‘어려워.’
싸울까? 이제 제법 실력에 자신이 붙은 영민이었기에 은신을 하고 놈들의 뒤통수를 칠까도 생각했다. 그를 뒤쫓고 있는 이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B등급이었으니까. 스스로를 동급 최강이라 여기는 만큼 한바탕 붙어볼 만도 했다.
하지만 선뜻 몸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서 월등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A등급은 아직 무리야.’
A등급의 헌터였다. 이미 그들만으로 어지간한 중형 길드 이상의 전력. 그들의 의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더구나 은근한 살기까지 품고 있다. 영민의 신경을 자극하는 따끔한 살기. 위험을 감지한 영민은 숨기 좋은 곳으로 가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오히려 사람이 많은 대로를 달렸다.
“으앗!?”
“저거 뭐야?!”
자동차 도로 위를 달린 덕분에 보행자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느닷없는 질주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쏟았다. 이렇게되면 섣불리 손을 쓰지는 못하겠지.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
번잡해야 할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폐허라도 되는 듯이 모두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젠장!”
변화를 느낀 순간, 영민이 유령마를 박찼다.
퍼엉!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유령마를 덮쳤다. 연이어 몇 개나 되는 힘들이 녀석을 난타했다. 순식간에 체력이 깎여나가며 강제 역소환이 되었다.
“골렘 소환!”
영민은 주저없이 골렘의 핵을 주변에 뿌렸다. 숙련도가 많이 오른 덕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우드 골렘과 미니 골렘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몸을 일으켰다.
“부숴버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나의 증폭이 감지됐다. 하나, 둘, 셋, 넷. 무려 네 명의 B등급 헌터가 명에 따라 능력을 발현했다.
“돌진 제압!”
그 순간 영민 역시 움직였다. 어차피 이 정도의 능력자들에게 골렘이 가지는 의미는 시간 끌기 이상 일 수 없었다.
부스터를 켠 듯 폭발적인 직선 돌진을 선보이더니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을 잡아 땅에 쳐박았다.
쾅 쾅 쾅
순식간에 놈의 뒷통수가 뭉개지고 피와 뇌수가 섞여 들어갔다. 안면에 럭키펀치까지 내리꽂아 확인 사살을 완료했다.
“윽!”
그 사이 놈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한 순간 영민을 놓치기는 했지만 동료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패럴라이즈.”
뒷목부터 뻣뻣한 기운이 올라왔다. 마비 능력이 발현된 것.
차라리 정신 계열이었다면 저항해냈겠지만 하필 마비를 일으키는 확정 능력이었다.
이대로 당해야하나? 영민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광폭화.”
혈관을 타고 뜨거운 피가 빠르게 솟았다.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며 거추장스러운 모든 방해 효과를 날려버렸다. 그를 마비시키려던 세밀한 마나의 움직임을 몽땅 쓸고 지나갔다.
“스로잉!”
세상이 붉게 물들며 저릿하던 느낌이 사라지자 영민은 곧장 품에서 단도를 집어던졌다. 자신을 마비시킨 헌터를 향해서다.
“컥!”
심장에서 솟아나듯 단도가 꽂히고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영민이 달려나갔다.
숄더 차지.
덤프 트럭에 받히는 것 같은 충격이 놈의 전신을 강타했다.
“흐랏차!!”
이어 방패를 크게 휘둘렀다. 남은 두 놈 중 강화계로 보이는 녀석이 힘을 주어 막아보지만 돌멩이에 맞은 개구리 마냥 배를 까뒤집고 널브러졌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인 것이다.
황당한 눈으로 영민은 바라보는 마지막 한 녀석. 놈을 마저 정리하기 위해 영민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대쉬!”
“어딜.”
그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영민이 경계하던 A등급의 헌터. 그의 등장과 동시에 영민은 추가 공격을 모조리 생략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강화계.’
검을 맞댄 순간 알 수 있었다. 놈은 강화계다.
힘의 차이가 분명할 경우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 그 때문에 놈들도 강화계를 보낸 것이겠지.
“멀티 샷, 속사, 연사!”
의외라는 듯 검을 맞댄 그 자리에 멈춰선 놈을 향해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치명적이진 못하겠지만 발을 묶을 수는 있을 것이다.
‘앞으로 4분 13초.’
놈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영민은 유령마의 재소환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혼령질주라면 벗어날 수 있어.’
화살은 놈을 향해서만 쏘아진 게 아니다. 쓰러진 강화계 B등급 헌터와, 그가 지키려 했던 또 다른 B등급 헌터도 함께 노렸다.
혼자라면 튕겨 내며 덤벼들겠지만 다른 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발이 묶이겠지. 반면 영민은 얼마든지 연속해서 화살을 쏘아낼 수 있으니 시간을 벌 수단은 많았다.
영민과 달리 그들에게는 HP라는 개념이 없으니 까딱 잘 못 했다간 단 번에 목숨이 달나아버린다.
‘부족해.’
빠르게 자리를 이동하며 무빙샷을 날려대는 동안에도 영민은 스스로의 무력감에 분노했다.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A등급의 헌터를 상대로는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이다.
당장 아이템의 위력을 빌리더라도 활만으로는 놈의 동료를 노리지 않는 이상 시간을 버는 것도 버겁다. 강화계인 만큼 방패 따위로 막으면서 들어오면 대책 없이 뚫릴 테니까.
“크허헝!!”
그때 벼락같은 사자후가 밀려왔다.
몸에 힘이 빠지고 상당한 압박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함태식의 함성 스킬 효과로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강화계라면 필수적으로 익히고 있는 워 크라이가 터진 것이다. 영민이었기에 그나마 효과가 적은 것이지, 다른 자였다면 한순간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잔재주는 끝이다!”
그 짧은 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함태식이 대쉬를 시도했다. 어쩌지? 다시 화살을 날릴까?
찰나의 순간 이어진 고뇌 끝에 영민이 검을 꺼내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자신을 믿을 수밖에.
“마나 웹! 프리즈 애로우! 라이트닝 애로우!”
“같잖은 짓을!”
즉시 시전 가능한 몇 가지 마법이 놈을 향해 쇄도했다. 가볍게 떨친 함태식의 손 끝에 찢기고 분쇄되었지만 애초에 성과를 바라고 날린 공격은 아니다.
“스로잉!”
정신이 분산된 사이 놈의 시야를 가리며 몸집만한 방패가 날아들었다. 방패 자체의 강도도 대단했고 상당한 경력이 실려있는 터라 이번만큼은 제 아무리 놈이라고 경시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빛의 일격!”
그리고 방패를 비껴내는 순간, 전력을 다한 영민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스스로에게 버프를 걸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대신 당장에 낼 수 있는 최고 공격 스킬이다.
“흐앗!!!”
함태식도 물러서지 않았다. 방패를 쳐내느라 분산되었던 힘을 다시금 끌어모으며 영민을 향해 주먹을 마주 내질렀다.
주먹과 검의 대결. 그러나 안심 할 수는 없다. A등급 헌터쯤 되면 무기보다 자신의 육체를 믿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으니까.
쩌엉!
주먹과 검의 충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강한 공명과 함께 둘이 동시에 튕겨져 나갔다.
“젠장.”
비슷했지만 영민이 미세하게 더 약했다. 상대는 전력을 끌어내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그랬다.
누구보다 그것을 가장 먼저 파악한 영민은 즉시 포션을 사용하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상대가 더 강할지는 모르나 시간은 그의 편이었으니까.
“치사한 새끼.”
영민이 포션을 사용하는 모습을 확인한 함태식이 침을 퉤 뱉으며 투덜거렸지만 이미 그의 몸은 영민을 쫓고 있었다. 과연 A등급다운 반응이다.
상대에게 쓸 수 있는 패가 많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거리를 좁히고 나선 것이다.
영민도 전력을 다해 놈을 밀어내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째서 강철대오 길드가 날 노리는 거지?”
그러자 상대는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 대우 해준다고 할 때 순순히 들어왔으면 좋았잖아?”
그의 어깨에 찍혀있는 문양의 주인, 강철대오는 10대 길드 중 하나이자 영민과 민호에게 길드 가입을 권유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려야지. 그래야 후환이 없는 법이니까.”
‘그래. 그런 놈들이었지.’
당당한 대꾸에 영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철대오는 원래 이런 놈들이었지. 자신들만 알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놈들. 길드원 영입에 있어서도 이런 짓을 하는지까지는 몰랐지만 놈들이라고 하니 이해가 됐다.
“오래 끌었다. 그만 끝내자!”
몇 차례나 이어진 공방에 함태식이 페이스를 더욱 끌어올렸다. 주력이던 방패를 내던진 덕분에 보조용 방패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영민을 더욱 압박하고 힘 싸움으로 유도했다.
‘기회는 한 번.’
기억을 통해 축적된 경험으로 근근이 버티고는 있지만 영민 역시 오래 끌기는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을 반전 시킬 카드는 있다.
놈이 예상치 못한 일격으로 상황을 뒤집는 것.
의도적으로 견제를 늦추며 놈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갔다.
“꿰뚫어주마!”
함태식이 주먹을 당기며 마나를 가득 끌어 모았다. 그러나 그보다 반 템포 빠르게, 영민이 공격을 내질렀다. 이번엔 검이 아닌 주먹이다.
예상치 못한 엇박자 공격에 당황한 함태식이 급히 주먹을 내질러보지만 힘을 제대로 받은 쪽은 영민이었다.
“럭키 펀치!”
콰앙!!
주먹과 검이 부딪혔을 때보다 더 큰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으으윽!”
두 사람 다 튕겨나가 벽에 쳐박힌 가운데 한바탕 피를 토해낸 함태식이 몸을 일으켰다.
영민 또한 무사하지는 못한 상황.
손에 느껴지는 통증으로 보아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숨겨놓은 한 수가 있었군. 동료가 됐다면 좋았을 텐데.”
함태식 또한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듯 했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영민 쪽이 불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충돌로 체력이 꽤나 낮아지면서 ‘오토 포션’이 발동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체력이 다시 회복되고 충격으로 망가졌던 손도 점차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온전해진 상태로 싸울 수 있을 터. 게임 시스템에 기댄 사기적인 능력이긴 했지만 함태식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끝장을 내자!”
재차 달려드는 함태식을 향해 영민은 마지막 한 수를 떠올렸다.
“럭키 박스!”
< 59화 - 럭키 박스 (3)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