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난입 (1) >
“조건이 꽤 좋았을 텐데 더 얘기해보지 그랬어?”
“에이, 들어서 뭐해요. 어차피 안 갈 텐데.”
헌터협회에서 빠져나온 영민이 슬쩍 건네는 말에 민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별로 의리 같은 거 지키지 않아도··.”
“의리? 형도 농담은.”
아니 거의 정색을 했다.
“형 돈 많잖아요. 그리고 길드 같은데 들어가면 교육 받는다고 시간 뺏기지, 던전에 들어가도 뒤에서 마법 몇 번 던지는 게 전부일 텐데 형이랑 같이 돌면 던전 하나를 둘이서 독식하니까 경험치도 훨씬 많을 테고 당연히 몫으로 분배되는 아이템도 많을
테니까 백배는 이득이죠.”
아, 얘가 그렇게 순진한 애는 아니었지.
강태성의 기억 속에서도 마법 계산 능력 만큼이나 돈과 실리에 밝았던 모습을 떠올리고 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 그럼 이제 달려볼까?”
“예~!”
던전을 독식할 조건은 갖추어졌다. 민호의 안전과, 일부 특수한 몬스터를 제외한 4레벨 던전 몬스터들에게도 통할 만한 화력도 얼추 갖추었고 이제 남은 것은 경험치와 아이템을 쓸어담는 일 뿐이었다.
“그전에, 우리도 이제 계산은 확실히 해야겠지?”
“에엑?”
그에 앞서, 민호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RPG의 꽃’, ‘최강의 화력’이라 불리는 마법사 클래스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4써클, 즉 40레벨까지는 영민이 기본적인 소모품을 지급하고 성실히 레벨 업을 돕는다.
대신 민호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모든 아이템에 대한 권한을 포기해야한다.
진짜 계약은 40레벨 이후부터.
그때부터 영민이 민호를 정식으로 계약해서 용병처럼 건당 거액의 돈을 지급하는 것과 ‘파트너’로서 던전 공략에 필요한 비용과 소득을 나누는 방식 중 민호는 후자를 택했다.
지출한 비용에 대해서는 반반씩 부담하고 소득에 대해서는 9대 1로 영민이 9를 가져가는 구조였지만 민호는 만족했다. 두 사람이 던전 하나를 독식해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어마어마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채집의 경우 영민이 혼자 다 하고, 향후 레벨이 오르면 비율을 조정해주기로 했으니 빈털터리였던 민호로서는 아쉬울 것 없는 조건이다.
기존에 받아 챙긴 장비 값도 천천히 갚아나가야 한다는 부분에서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어디보자, 다음 던전은··.”
계약을 확정한 두 사람은 곧장 다음 던전을 골랐다. 생각 같아서는 우탕 던전을 빠르게 돌아서 더 이상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없애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이미 미믹 길드가 모든 예약에 발을 걸쳐 놓고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 할까, 귀찮아질 것 같은데 일단 진주를 뜰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영민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바로 게이트 키퍼 길드의 관리팀이다.
던전 쇼크로 인해 전국이 마비되면서 일시적으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던 그들이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계약기간 추가 연장의 혜택을 제시하며 업무 재개를 알려온 것이다.
덕분에 능력도 한껏 끌어올렸고 게이트 키퍼 자체도 한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터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어쩌면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때?”
“뭐든 좋아요, 전.”
영민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진주의 한 던전을 예약했다.
입장 시간은 바로 내일.
추가금을 주고 단 두 팀 만으로 공략에 임할 수 있도록 예약을 걸었다. 아예 내친 김에 클리어 할 시간을 계산해서 두 세 번 뒤의 것까지 예약을 걸었다.
“좋아. 내일부터 다시 힘내보자고.”
두 사람은 하룻동안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다시 노가다에 돌입했다.
던전 하나를 통으로 전세 내는 사실상의 단독 입장이라 선택의 폭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은근히 선택 할 수 있는 4레벨 던전의 수가 많았다.
어떤 팀과 동시 입장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다보니 믿을만한 팀이 등록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만큼 4레벨 던전은 위험했고, 팀만 잘못 만나도 잘나가던 팀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는 일이 왕왕 있었다.
“형, 이거 신나는데요?”
“정신 없으니까 말 시키지마!”
그 중 영민과 민호가 선택한 던전은 ‘디펜스’ 미션이 걸린 형태였다. 신성한 기운을 내뿜는 성물이 있는 구조물을 끝까지 파괴 당하지 않고 수호해야하는 미션. 하필이면 던전 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몬스터들이 암흑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뭔가에 홀린
듯이 성물을 파괴하기 위해 덤벼드는 까다로운 형태였다.
때문에 보통은 다수의 인원으로 사방을 틀어막고, 차륜전을 하듯 위치를 바꿔가며 수비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인원이라고는 달랑 둘 뿐인 그들은 그야말로 박터지게 싸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영민이 광역 도발을 끊임없이 걸고 병목처럼 좁아지는 지형에서 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민호가 구조물의 위로 올라가 마법을 퍼붓는 식이다.
거기에 골렘들이 장벽처럼 구조물을 둘러싸고 여차하면 자폭할 준비를 마친 미니 골렘들까지 더해지니 돌아버릴 정도로 정신 없는 난전이 계속되지만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적들을 해치우는 구조가 유지되었다.
“홀리 웨폰!”
물론 수월히 상대가 되는 것에는 영민이 구입한 성기사 계열의 스킬들이 주효했다. 성물을 파괴하러 덤벼드는 놈들의 대부분이 언데드이다보니 빛 속성 스킬들이 1.5배 효과를 발휘하며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그 막강한 공격력이 1.5배라니? 칼날에 걸리는 족족 몬스터들이 썰려나갔지만 ‘웨이브’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까맣게 밀려들다보니 영민도 방심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졌다.
[스켈레톤 나이트의 힘을 흡수합니다.]
[본 나이트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몸은 힘들어도 그만큼 보람은 있었다. 놈들을 깨부술 때마다 울려대는 알림 덕분이다. 드레인이 쉴 새 없이 능력을 발휘하며 영민을 성장시켜갔다.
[해당 더 이상 몬스터의 능력을 흡수 할 수 없습니다.]
[더 높은 수준의 몬스터를 사냥해주세요.]
더 이상 흡수 할 수 없을 때까지.
굳이 몬스터 수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던전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 레벨 업!”
민호의 성장도 순조로웠다. 언데드 계열의 경우 아이템 드랍률이 낮은 편인데다 좋은 아이템을 주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경험치 하나만큼은 일반 몬스터에 비해 후하게 주는 편이니까.
그렇게 단 둘이서 4레벨 던전을 두 바퀴 돌았을 때, 영민은 더 이상 드레인으로 4레벨 몬스터의 능력을 흡수 할 수 없었고 민호는 40레벨을 돌파했다.
그리고 세 바퀴 째에 문제가 발생했다.
[미션 ‘성물 수호’가 부여됩니다. 어둠의 존재들로부터 성물을 수호하십시오.]
[미션을 달성하면 보상을 획득 할 수 있습니다.]
민호를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 영민 스스로가 레벨 업을 하기에도 경험치가 짭짤했기에 다시금 입장한 던전에 불청객이 난입한 것이다.
열명이나 되는 헌터들. 영민은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와, 진짜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바로 미믹 길드원들이었다. 이철훈 이사의 사망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흉수를 찾아내겠다고 공표하는 것까지는 보았지만 정말로 던전에 난입할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던 것이다.
내부의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열명 뿐인 B등급 헌터를 포함한 14명의 헌터가 죽어나갔으니 조사를 하고, 보복을 하려 할 것은 분명하긴 했다.
증거가 없으니 그들에게 보복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딱 봐도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길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둘에게 해코지를 하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던전에 난입할 줄이야?
아니, 그보다 어떻게 들어왔지? 이놈들이 미쳤나? 망하려고 작정을 한 건가?
“팀 럭키맨? 맞군.”
영민과 민호를 발견한 그들도 어설픈 연극 따위는 하지 않았다. 던전에 난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거기에 영민은 무기를 들어 응수하는 대신 질문을 한가지 던졌다.
“밖에 누구 없든?”
“밖?”
정말로 모르는 눈치. 영민은 피식 웃으면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이구야. 니네 이제 큰일 났다.”
“··뭣?”
영민이 ‘게이트 키퍼’의 고객이라는 것을 정말로 모르는 건가? 약간은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쟤들도 일 났군.’
게이트 키퍼는 이유를 불문하고 고객들의 안전에 위협을 가한 이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자신들의 신용과 긍지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같은 10대 길드와의 전쟁마저 불사할 것이라는 뜻을 진작부터 밝혀왔기 때문에 미믹 따위의 중소 길드는 길드 단위의 개
입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지워질 터였다.
이들은 과연 그것을 알고도 뛰어든 것일까? 게이트 키퍼는 의뢰인이 죽을 경우 더욱 철저하게 복수해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영민은 알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는 영민의 치명적인 행운이 작용한 상태였다. 게이트 키퍼에서 파견한 인원 역시 사람이다보니 생리현상이 급해질 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들이 영민들을 잡으려고 작정을 하고 덤빈 것이 하필 그때였던 것이다.
그 잠깐의 틈이 난입을 허용 했고, 이제 이 순간부터 미믹은 게이트 키퍼의 적이 되었다.
“그런 게 있어. 곧 죽을 텐데 얘기 들어봐야 피곤만 하지.”
“건방진.”
영민의 도발에 그들이 일제히 발끈하며 나섰다.
“어차피 죽이려고 들어온 거 아니야? 덤벼!”
먼저 튀어나간 것은 오히려 영민 쪽이었다. 서로의 목적이 적의 죽음인 이상 말싸움만 계속 해댈 이유가 없었다.
방패를 앞세우고 자세를 낮춘 다음, 어깨로 방패를 지탱하고 폭발적인 도약을 선보였다.
실드 크러시!
넋을 놓고 있다가 방패와 부딪힌 한 놈이 전신 뼈가 으스러지며 허공을 날았다.
“으악!!”
덕분에 동료의 시체에 얻어맞고 넘어지는 한심한 놈들도 있었다. 기껏해야 C등급의 헌터. B등급 수준의 육체 능력에 압도적 스펙의 장비, S등급 수준의 전투법과 경험을 보유한 영민에게는 날파리 만큼이나 가벼운 상대였다.
“죽여!!”
“어딜.”
영민이 검을 들어 가장 가까운 녀석을 격살하는 동시에 방패를 든 손으로 무언가를 뿌렸다. 바로 유니크 등급의 무기인 ‘비통의 단도’. 그저 힘껏 던지기만 했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들어올린 상대의 팔목 방어구를 뚫고 근육과 힘줄을 상하게 만들었다.
“프리즈 애로우!”
영민이 진형 깊숙한 곳엣 휘젓는 동안 민호도 재빨리 캐스팅을 마쳤다. 덤비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는 놈들의 다리를 노려 빙결 속성의 마법을 맞췄고 그대로 놈들의 다리를 묶어버렸다.
“얼음 회오리! 파이어 버스트!”
어디 그 뿐인가?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민호를 잡으려 접근한 이들은 그 자리에 얼려버리고 새롭게 익힌 4써클 마법을 퍼부어주기도 했다.
“끄아아악!!!”
얼음 기둥에서 풀려나자마자 화염이 작렬했다. 어디 그 뿐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려하니 내딛는 걸음마다 지뢰 터지듯 불꽃이 올라왔다.
민호가 이미 불꽃 지뢰 마법인 파이어 마인을 사용한 것이다.
강화계거나 방어계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발 한 번 잘못 딛는 순간 발목이 날아가 버리는 위력에 행동이 위축되자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를 일으켰다.
민호가 정지된 과녁을 때리듯 마법을 난사해댄 것.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마법이다 보니 그를 쫓던 이들은 사색이 되어갔다.
분명 등급 차이도 나지 않는 2대10의 싸움인데, 상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수가 적은 쪽인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 55화 - 난입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