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소문 (1) >
“······.”
리자드 커맨더가 죽고 나자 통제력을 잃은 리자드맨들은 지리멸렬했다. 도망치던 팀 5P의 멤버들이 놀라 걸음을 멈출 정도로 영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리자드맨들을 쫓아가서 죽이는 대신 활을 꺼내 저격했고, 그 귀신 같은 솜씨에 살아나가는 녀석들은 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정도야 위협이 될만한 수준도 아니니 두어도 괜찮을 터였다.
“당신은 대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팀 5P의 멤버 중 하나가 허탈한 모습으로 영민을 바라봤다. 자신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리자드맨들과 리자드 커맨더를 이렇게나 쉽게 처리하다니. 대체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나름 C등급 헌터 중에서도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창피해질만큼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당신들의 동료에게서 요청을 받았습니다. 동의하시죠?”
그런 그들에게 영민은 잔인하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획득한 것들은 인정하되, 이후 발생하는 몬스터의 부산물 및 아이템 수입은 모두 팀 럭키맨이 가진다는.
유일한 단서 조항이었던 팀 5P의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계약서는 본격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
“그, 그건··.”
계약서를 확인한 생존자들이 잠시 멈칫거렸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영민의 압도적인 무력을 본 이상, 우기고 버텨서 없던 일로 하는 것 따위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영민의 맨 얼굴을 보았다면 모를까,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울트라맨 가면이라 더욱 겁에 질렸다.
“혹시 집결지까지 데려다드려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갈 수 있습니다.”
영민은 순수한 호의로 물어본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다르게 들렸나보다. 무표정 할 수밖에 없는 가면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더니 힘을 짜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몬스터들은 대충 정리가 됐으니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지만 집결지까지는 어떻게든 되돌아 갈 수 있겠지.
그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확인한 영민은 곧장 나아가 세 번째 결계 기둥을 파괴했다.
이제 남은 곳은 단 두 곳.
팀 5P에게 권한을 양도 받은 영민이 하나를 더 파괴하고, 팀 진주 방패가 나머지 하나를 파괴하면 미션 클리어다.
영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번째 결계 기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초글린이라는 난쟁이 몬스터였다. 코볼트의 절반 정도 되는, 아주 작은 몸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런 놈들이 수백이나 몰려다닌 것이다.
리자드맨들이 전술과 전략을 아는 군대라면, 초글린들은 그냥 개떼. 인해전술 밖에 모르는 중공군 같은 놈들이었다.
일단 적의를 드러내면, 그 수백의 초글린들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열흘 쯤 굶은 좀비처럼 달려드는 그 모습은 아무리 강력한 헌터라도 기가 질리게 만들 만큼 살벌했다. 하물며 C등급 정도의 수준에서는 겁을 먹어 제 실력을 발휘 할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정도는 웃으면서 반길 수 있는 강태성의 기억을 가진 영민에게는 아주 쉬운 상대이지만 말이다.
‘이런 놈들이면 땡큐지!’
당장 드레인의 능력만을 보아도 쌍수 들어 환영해 마땅하다. 드레인의 특성상, 약하고 쪽수가 많은 놈들을 상대할수록 효율이 무지막지하게 올라가는 것이다. 강한 놈이든 약한 놈이든 같은 레벨의 던전에서 나오기만 한다면 어차피 상승하는 능력치의 폭
은 동일 하니까.
이런 상황에서 마주친 초글린 떼는 영민에게 보너스 스테이지와 같은 것이었다.
무쌍 無雙
잔뜩 흥이난 영민은 단신으로 이백은 족히 될 초글린 떼를 베어 넘겼다.
“와, 쩐다.”
초글린이 닿지 못하는 일꾼 골렘의 머리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민호의 얼굴에 어떤 존경심 같은 것이 어렸다.
실로 어마어마한 무력이 아닐 수 없었다.
기존보다 마리당 들어오는 경험치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은 것으로 볼 때, 놈들의 단일 전투력이 약하다는 것쯤은 유추 할 수 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는 저 물량을 혼자 감당해낸다는 것 자체가 그를 다시 한 번 반하게 만들었다.
쿠구구궁
드디어 네 번째 결계 기둥이 파괴되었다.
“오, 32렙! 이제 3레벨 남았어요!”
그에 호응하듯 민호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든 보너스 스텟을 마력에 올인하고 계속해서 레벨 업 당 10의 마나가 상승할 때, C등급 헌터의 기준인 마나량 2,000을 돌파하는 것은 35레벨. 레벨 업 속도가 서서히 더뎌지고 있기는 하지만 두어번만 더
4레벨 던전을 돌아도 달성 가능한 레벨로 보였다.
“나쁘지 않군.”
때문에 영민도 제법 만족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1레벨이었다고는 하지만 던전 한 바퀴에 31레벨을 올렸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광렙이었다.
비록 아직 멀고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지만 계획을 앞당길 수 있을 것만 같아 가벼운 흥분이 들었다.
“가만.”
하지만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다.
바로 팀 진주 방패의 상황.
그들이 맡은 마지막 결계 기둥만 파괴하면 미션이 클리어 되는 상황이지만 전혀 소식이 없는 것이 불안한 것이다.
설마하는 생각과 함께 보내 놓은 미니 골렘과 시야를 공유하자 우려했던 그림이 나타났다.
‘끄응. 찾으라고 했다고 정말 찾기만 했나보군.’
미니 골렘에게 그들을 찾으라고 명령했더니 정말 발견한 뒤 멀뚱멀뚱 보고만 있던 모양. 다음 번에는 더 디테일한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영민이 시선을 돌렸다.
‘이러니 늦었지··.’
팀 진주 방패가 혈투를 벌이는 상대는 바로 나무였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나무.
하필이면 이 지역의 파수꾼이 ‘엔트’였던 모양이다.
가지가 손이요, 발인 살아 움직이는 나무. 나무의 정령이라는 소리도 있고, 요정의 축복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 녀석인 만큼 던전에서 출현하는 몬스터 중 드물게 선공을 하지 않는 녀석인데 하필이면 마지막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결계 기둥을 공격하는 순간, 엔트와는 적대가 된다는 뜻.
때문에 팀 진주 방패는 애초부터 엔트를 노리고 공격에 들어간 듯 했다.
‘상성이 최악이군.’
잠시 전투를 지켜본 영민은 금세 상황을 파악해냈다. 방어가 특기인 팀 진주 방패의 약점인 부족한 화력이 문제였다.
그들이 자신 있는 것 이상으로, 방어와 회복에 자신이 있는 엔트가 상대인 만큼 그들의 자잘한 공격으로는 의미 있는 데미지를 주기 어려운 것이다.
팀의 구성에 마법 계열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엔트에게 타격과 함께 회복 능력 감소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화염 계열 능력자가 아무도 없는 탓에 의미 없는 소모전만 계속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팀 진주 방패가 먼저 지쳐 쓰러지거나 도망을 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치고 빠질 것이지··.’
상대를 가늠할 줄 몰랐던 것이 패착이다. 엔트를 발견했고, 상대가 어려울 것 같으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결계 기둥만 부수고 도망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점점 상황이 나빠져가는 것을 확인한 영민은 유령마를 불러내 어떤 종이 한 장을 물려주었다. 팀 5P도 서약한 바 있는 아이템, [약속의 증명]이었다.
유령마는 그것을 물고 팀 진주 방패에게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엔트와 그들의 사이에 뛰어들어서 펄럭이는 종이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뭐, 뭐야?!"
유령마가 건네는 서약서를 전투 중에 받아든 그들이 당황스러워했지만 내용을 읽어보고 곧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엔트를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해가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이들은 손해가 적은 편이다. 담당한 두 개의 결계 기둥 중 하나의 구역은 온전히 자신들이 처리 했기 때문에 남겨먹을 수 있는 부분이 비교적 많은 것이다.
“유령마 소환.”
그들이 사인을 마치는 순간, 영민은 유령마를 역소환 했다가 다시 소환했다. 팀 진주 방패의 앞에 있던 유령마가 영민의 곁에서 나타났다. 약속의 증명까지 함께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파괴 불가의 아이템이고, 나중에 수거하면 될
일이니까.
‘자폭해라.’
그리고는 즉시 미니 골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미니 골렘의 자폭이라면 어느 정도의 화염 데미지를 주는 것이 가능했다.
치명적이지는 않겠지만, 엔트가 회복에 집중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팀 진주 방패도 바보가 아니라면 그 사이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것쯤은 눈치 채겠지.
그 사이 영민은 유령마에 민호를 태우고 빠르게 이동했다.
“파이어 볼! 파이어 애로우!”
결계 기둥을 지키기 위함인지 엔트의 이동속도와 행동반경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덕분에 미니 골렘의 자폭이 시간을 끄는 동안 팀 진주 방패는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영민은 회복 중인 엔트에게 곧장 들이닥쳤다.
화염 마법을 연달아 뿌려대는 한 편 도약 스킬을 연달아 펼쳐 휘젓는 가지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화르르륵!
빨리 베기, 강 베기, 회전 베기, 삼단 베기··. 쓸 수 있는 모든 스킬을 동원해 난무를 펼치자 엔트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발동한 것이다.
“끄그그그그-!”
앓는 소리 같은 비명과 함께 엔트가 무너져내렸다. 그 막강하던 방어력도, 재생력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특수효과로 발동되는 불꽃은 놈의 모든 강점을 집어삼켰다.
팀 진주 방패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엔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 결계를 파괴하셨습니다.]
[기여도 보너스가 지급됩니다.]
[미션 달성!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당신의 기여도 : 93%]
연달아 결계 기둥까지 파괴하자 기분 좋은 알림이 나타났다. 이제 보상의 시간이다.
[보상 방식을 선택하십시오. 1. 선택 / 2. 랜덤]
[랜덤 선택시 보상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남들이라면 고민을 할 문제겠지만 영민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2번, 랜덤을 선택했다.
[미션 달성 보상으로 ‘피닉스의 꼬리’를 획득합니다.]
‘헉.’
인벤토리로 곧장 들어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았지만 보상을 확인한 영민은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피닉스의 꼬리][레전드][소모]
불사조 피닉스의 권능이 담긴 꼬리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소지 시 1회 부활 가능
- 사용 시 대상 1명 부활 가능
피닉스의 꼬리는 레전드 등급이기는 해도 에픽 등급 부럽지 않은 최고의 소모형 아이템이었다.
소지자 또는 대상을 1회에 한해 완전 부활시키는 능력.
숨이 끊어진 자를 최상의 상태로 부활시키니 그야말로 신의 기적과 같은 힘이 아닐 수 없다.
기억 속 강태성조차도 단 두 개를 보았을 뿐이니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더구나 부활시에는 최상의 상태, 즉 모든 질병까지도 완전히 나은 상태로 되살아나니 세상의 모든 부호와 헌터들이 바라는 꿈의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아싸, 스테프!”
영민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숨기고 있을 때, 영민의 행운에 영향을 받은 민호가 환호를 질렀다.
마법사 클래스에 딱 어울리는 무기인 스테프를 손에 넣은 것이다.
기여도는 턱 없이 낮았지만, 순전히 운 빨로 건진 득템이었다.
“자, 그럼 정리해볼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영민은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을 공개하지 않았다.
사실 억지를 부리자면 다른 이들의 보상 아이템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들이 기브업을 하는 순간,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압박해서 적을 만들 생각까진 없었다. 그들이 전멸하지 않도록 도운 이유도 바로 ‘소문’을
내기 위함이니까.
인벤토리에 귀환석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영민은 집결지 쪽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한 구역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주로 출몰한 몬스터는 밑동만 남은 나무의 모습을 한 ‘나무 귀신’. 아무래도 엔트는 보스 몬스터였던 모양이다.
‘별 일이 다 있군.’
이 또한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두 팀의 방향에 까다로운 보스 몬스터가 나타난 것, 한 던전에 보스가 둘이나 나타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니 어떤 식으로 자신의 행운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집결지에 도착한 영민은 귀환 시기를 각 팀과 조율했다. 팀 5P는 기둥 앞까지, 팀 진주 방패는 기둥 하나까지의 영역에서 엔트 영역에 도달하기 직전까지의 권리를 인정 받아 차이가 조금 있었지만 시간은 오히려 팀 5P쪽이 더 많이 필요했다. 상대가 엔
트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채집꾼을 집결지로 일단 돌려보낸 팀 진주 방패와 달리 팀 5P는 리자드맨들에게 몰이를 당하다가 채집꾼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죽은 채집꾼들의 가족들에게 위로금까지 지급하고 나면 팀 5P는 이번 헌팅에서 큰 적자를 볼 터였다.
덕분에 영민에게는 기둥 두 개 영역만큼의 채집 공간이 더 생겼지만 이미 채집 스킬이 경지에 달해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조합은 일단 접어두고 채집에 집중하자 오히려 팀 진주 방패보다도 빠르게 채집물 수거가 끝이 났다.
어찌나 획득량이 많은지 민호의 인벤토리에까지 쑤셔넣어야 할 지경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다른 팀들은 다행히(?) 자신들이 놓친 영역에서 채집물이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이라 여기며 안심하고 귀환을 했다.
던전을 벗어난 그들은 치부와 같은 이번 헌팅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을 것을 속으로 다짐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상황과 숨 막힐 듯 압도적이던 영민의 무위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마스크맨 가면을 쓴 팀, 아니 럭키맨 영민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49화 - 소문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