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동화 同化 (2) >
‘귀머거리 물약이면 가뿐하지.’
귀머거리 물약, 또는 데프니스 포션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사용자를 일시적으로 귀머거리로 만드는 디버프 물약. 보통은 디버프를 스스로 얻으려 하진 않으니 쓸모없이 여겨지거나 몬스터든, 사람이든 누군가를 습격하기 전 음독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만드라고라를 채취하는데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물건이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만큼 공급량이 많지 않아 대형 길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육성하는 연금술사를 통해 제작하거나 간혹 마켓 또는 경매에 나온 물건을 사들이는 식으로 충당했다.
‘효과가 10분이나 된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뽀옹!
그러나 영민은 스스로 만들어 마셨다. 던전 쇼크가 일어난 이후 시간이 촉박한 탓에 무두질을 제외한 다른 채집과 제작은 잠시 접어두었지만 이미 올려둔 약초채집과 연금술 숙련도가 제법 높은 덕이다.
고작해야 연금술 숙련도 30% 정도면 만들 수 있는 귀머거리 물약 쯤이야 실패 할 걱정 없이 가볍게 만들어냈다.
“끼에에에에에에엑-!!”
영민은 목 아래가 묻혀있는 사람 모양의 만드로고라의 머리채(?)를 잡고 힘을 주어 뽑아냈다.
동시에 울려퍼지는 귀곡성.
정신계열의 어떠한 힘이 담긴 그 소리는 정신력이 높지 않은 이가 들었다간 눈을 까뒤집고 쓰러질 만한 것이었다.
지금의 영민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룰루~.”
오히려 콧노래를 부르며 한 뿌리, 한 뿌리 채집해 나갈 뿐이다. 만드라고라 한 뿌리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니 흥이 날 만도 했다.
강태성의 기억 속 인물도 이 만드라고라 밭을 발견하고 이름 날리는 갑부가 되었다고 했다. 한 두 뿌리만 내어다 팔아도 백만장자가 될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엘릭서의 제조를 위한 재료인 만큼, 가공을 거치기 전에는 가격이 꽤나 떨어짐에도 그랬다.
‘이게 다 몇 뿌리야.’
그렇게 채집한 만드라고라는 모두 열 다섯 뿌리. 설혹 엘릭서 제작 성공률이 60%쯤만 되도 대략 아홉에서 열 병 정도가 만들어진다는 소리다.
한 뿌리에 수십억은 너끈히 받는 물건이지만 시장에 내놓으면 못 사서 안달들이 나겠지. 아마 대한민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눈독을 들일 것이다.
‘연금술 숙련도도 부지런히 올려야겠군.’
생각 같아서는 당장 엘릭서 제조에 들어가고 싶지만 숙련도가 모자랐다. 하지만 언젠가 마음먹고 올리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재료와 시간만 충분히 준비가 된다면 자신의 행운과 노력가의 알약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으니까.
그렇기에 영민은 이것을 당장 팔아치우기보다 일단 가지고 있기로 결정했다.
던전 쇼크로 인해 몬스터의 사체와 아이템, 채집물들이 대량으로 풀리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만고만한 수준’일 뿐이고, 만드라고라를 비롯한 정말 상위의 아이템은 오히려 없어서 못 파는 상태였다. 특히나 구명줄이 될 수 있는 엘릭서 같은 놈이라면 언제 내놓아도 줄을 서서 구입하려고 하겠지.
‘루트는 다양하니까.’
하지만 영민은 꼭 엘릭서의 형태로 판매하거나, ‘사람’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것만을 후보로 두지 않았다. 바로 코인 상점의 존재 때문이다.
당장 만드라고라를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코인 상점에 팔아도 몇 만 코인쯤은 수중에 떨어질 수 있었다. 차라리 그 쪽을 택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실제 강태성 역시 나중에 가서는 종류 따윈 상관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이템을 수집해 코인 상점에 팔아치움으로서 능력을 강화했으니까.
한 번 인간의 손을 거쳐 가공되거나 변형된 아이템은 코인 상점에 판매가 불가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템들은 현금으로 구매한 뒤 코인으로 되파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다만, 코인상점에 판매할 경우 현저하게 낮은 값어치의 코인을 받을 수 있을 뿐이라 효율면에서는 엉망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급하다면 충분히 시도해볼만 한 일이었다.
‘··하나만 팔아볼까?’
때문에 영민의 마음 속에 작은 욕심이 슬쩍 떠오르기도 했다.
어차피 팔거라면 미리 한 두 개 팔아서 강화를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어느 정도의 강화는 가능하겠지만 극적인 강화는 어렵기 때문이다. 레벨 제한 때문에 주력으로 삼을 만한 스킬을 더 얻기는 어렵고, 고작해야 보조로 쓸만한 스킬 다수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니까.
게다가 이 이상 자잘한 스킬이 생겨나봐야 컨트롤만 어렵고, 마나량만 부족해진다.
“다른 건 뭐가 있나 한 번 볼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영민은 약초 탐지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이제는 폐허가 된 놀이공원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과연 만드라고라가 나올 정도로 고레벨의 던전이 동화된 지역답게 쉽게 보기 힘든 약초들이 많았다. 만드라고라 만큼 희귀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들이다.
놀이공원 뿐 아니라 주변 골목과 농지 등을 돌며 채집에 열중한 영민은 배낭 몇 개 분의 약초들을 모은 뒤 만족스레 숙소로 돌아왔다.
이걸 지금 몽땅 갈아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노가다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조만간 더 많은 약초들을 모아 연금술 숙련도 작업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다음 날을 기다렸다.
* * * * *
보기 드문 큰 거래인데다, 포션이라면 대형 길드에서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말을 꺼내놓은 물품이었기에 헌터협회 대전지부는 곧잘 일을 해냈다.
어쩌면 상급 포션의 거래가 추가로 있을 수 있다는 영민의 액션 덕분인지 몰랐다. 그 내용까지 포함해서 미끼를 던지니 10대 길드들이 줄줄이 낚시줄에 꿰어 올라왔고, 던전 쇼크로 인해 높아진 시세보다도 10%이상 높은 가격에 팔아치울 수 있었다.
영민은 훌륭히 일을 해낸 그들을 칭찬하는 대신 다음 물품을 맡겼다. 각종 버프 주문서들과 상급 포션. 다만 한 번에 맡기지 않고 주문서 거래가 끝난 뒤 상급 포션의 거래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는 반나절의 제한시간이다.
주문서의 경우 필수는 아니고 선택사항이기에 포션 만큼 각광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알아서 잘 보이라는 신호이자, 상급 포션을 구입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시간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영민은 나라가 안정되는 3일 동안 막대한 돈(마나석)을 벌어들였다.
“드디어 이걸 써보는 군.”
몬스터들로 인한 소요는 가라앉았지만 세상은 난리였다. 먼저 갑작스레 풀려나온 몬스터의 사체와 마나석, 아이템들 때문에 난리였고, 새롭게 각성한 헌터들의 등장으로 인해 개편되는 힘의 균형과 이번 기회를 통해 세력을 크게 키운 일부 길드들로 인해 난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에 풀려나온 던전 채집물로 인해 난리였다. 운만 좋으면 골목에, 집안에 생겨난 풀뿌리 하나로 수십에서 수백만원까지도 벌 수 있으니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며칠 간 휴가를 내고 심마니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챙길만큼 챙긴 영민에게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냥 쌓았다면 집 안 가득 들어찼을 마나석들을 모두 인벤토리에 넣은 채, 경건한 마음으로 아이템을 사용했다.
바로 방랑 상인의 만물 보따리.
그것을 사용하자 보따리가 펼쳐지며 좌판 같은 것이 열렸다.
그리고 작고 뚱뚱한, 아라비아 상인 같은 녀석 하나가 어디선가 툭 튀어 나왔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인생 역전의 기회! 당신의 운을 믿어보세요!”
“뭐가 있지?”
“어서옵쇼! 글쎄요. 뭐가 있을까요?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죠!”
NPC 같은 녀석의 응대에 펼쳐진 보따리 안을 살피자 여러 형태의 아이템들이 늘어져 있었다.
“죄다 물음표로군.”
그러나 놀랍게도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이템의 형태만 실루엣으로 볼 수 있을 뿐, 어떤 검은 장막 같은 것에 가려져 아이템의 외형이나 정보를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의 정보를 감춘 상태에서 값을 치르고 물건을 구입하면 비로소 정보가 드러나는 형태. 운이 좋으면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까지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매직 등급이나 일반 등급의 아이템이 나올 확률도 만만치가 않은 애물단지였다.
“헤헤헤.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결과물이 무엇이든 가격은 동일합니다.”
영민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꼬마 상인은 그를 현혹시키기 위해 멘트를 던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쯤은 이미 영민도 다 알고 있었다. 오히려 10억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이 아이템을 구입한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본전도 찾기 어려운 도박이겠지만, 적어도 영민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그럴 수가 없었다.
“시작해볼까?”
묘한 비웃음 같은 것을 입에 걸고, 영민이 보따리 앞에 섰다.
그가 관심을 보이는 품목은 단 하나였다. 바로 반지. 방랑 상인의 만물 보따리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등장하는 ‘조르단의 반지’가 유일한 목표였다.
“아이템의 구매는 마나석으로만 가능합니다. 가격은 원하시는 아이템에 손을 얹으면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심호흡을 한 영민은 두 말 없이 구입을 외쳤다.
동시에 반지를 감싸던 검은 장막이 걷히고 아이템이 원래의 빛을 내뿜었다.
“아··.”
첫 번째 시도는 실패. 레어 등급의 반지는 힘과 체력을 올려주는 썩 괜찮은 놈이었지만 영민의 눈에는 들지 못했다.
“구입, 구입 구입.”
영민은 남아있는 아이템 중 반지 형태만 골라 연달아 구입을 외쳤다. 그리고 차례로 확인을 했다.
레어 2개에 유니크 1개.
남들이 들었으면 기겁을 했을 만큼 엄청난 성과였지만 영민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반지들을 인벤토리에 대충 던져 넣고 방랑 상인의 만물 보따리를 해제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인생 역전의··.”
그리고 재사용을 하자 조금 전 보았던 그 녀석이 또 튀어나오며 정해진 멘트를 읊었다.
이번에는 영민도 기다리지 않았다. 반지 형태의 실루엣을 찾아 구입을 외쳐댔다. 이번엔 반지 형태가 달랑 두 개. 아예 확인도 해보지 않고 리셋을 시킨 뒤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열 번을 반복한 뒤에야 영민은 구입한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오오, 심봤다!!”
[조르단의 반지][레전드]
스킬의 왕 조르단의 권능이 담겨있는 반지. 그가 가진 재능과 노력, 권능을 이어받을 수 있다.
- 모든 스킬 레벨 1 상승
- 모든 능력치 + 10%
- 모든 저항력 + 20%
영민이 간절히 바라 마지 않던 그 아이템이었다.
짧지만 강렬한 설명과 효과. 능력치 상승도, 저항력 상승도 꿀이지만 진짜 대박은 바로 스킬 레벨 상승 효과였다.
어떤 스킬이든 스킬 레벨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 효과. 만약 레벨 단위로 오르는 스킬이 아니라면 스킬을 진화시키거나, 숙련도를 20% 만큼 보정해주기 때문에 그 가치는 레전드 이상으로 볼 수 있었다.
‘더 꿀인 건 이게 2개까지 착용 가능하다는 거지.’
기쁨의 환호도 잠시, 영민은 더욱 열과 성을 다해 뽑기를 계속해나갔다. 두 번째 조르단의 반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20여번의 시도 끝에 두 번째 조르단의 반지도 획득 할 수 있었다.
“흐흐흐흐!”
덤으로 얻은 레전드 등급 반지만 2개고, 유니크는 무려 17개에 달했다. 나머지도 레어거나 매직 등급. 오히려 레전드 등급을 제외하면 매직 등급의 숫자가 가장 적을 정도로 대박을 쳤다.
이것들만 되팔아도 사용한 마나석 값 따위는 충분히 메울 것이다. 영민은 내친 김에 반지가 아닌 다른 아이템 실루엣에까지 손을 댔다.
“일괄 구매!”
아예 약간의 할인을 받고 보따리에 있는 모든 아이템을 구매해버리기까지 했다. 자신이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높은 등급의 아이템만 뽑으면 구입해갈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나석이 부족해 더 이상 구입할 수 없을 때까지 영민의 아이템 겜블은 계속됐다.
< 44화 - 동화 同化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