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동화 同化 (1) >
오면서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가 된 것인지 몬스터와 대치 중인 경계선은 대전을 넘어 금산군까지 걸쳐 있었다.
유령마의 기동력에 혼령질주와 도깨비 감투의 은신 능력까지 더하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경계선을 훌쩍 넘어서긴 했지만 제법 전국의 소요가 가라앉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제 곧 강태성의 기억처럼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지.
‘헌터 협회가··. 이쪽인가?’
모든 난리가 정리되고 난 대전 시내의 모습은 제법 활기가 돌았다. 아무리 많은 헌터들이 도시를 빠져나간 상태였다고 하지만 광역시인 만큼 적지 않은 숫자의 헌터들이 도시에 남아 있던 모양. 아니면 인구가 많으니 새롭게 각성한 헌터의 수가 제법 많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군.’
그 증거로, 헌터협회 대전 지부에는 사람들이, 헌터들이 넘쳐났다. 다만 특이한 것은 그들 중 상당수가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이제 막 각성해서 고유 능력은 가졌으되, 사냥을 해서 아이템을 습득하지는 못한 것이다. 시작부터 높은 마나를 가질 수는 있지만, 마나로 없는 아이템을 만들어 가질 수는 없으니까.
물론 돈이 있다면 구입해서 사용 할 수 있겠지만 소위 말하는 금수저가 아닌 이상 헌터가 아니었던 이들이 가진 돈이라고 해봐야 크지 않았고, 천재가 아닌 이상 능력의 사용도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아이템이야 금세 풀리겠지만.’
성질 급한 이들은 벌써 능력만 믿고 몬스터 사냥에 나서기도 했겠지만 아이템의 보급이나 경험의 부재는 곧 해결 될 것이다.
이번 던전 쇼크로 인해 풀려나온 아이템의 수가 어마어마 할 테고, 어지간한 아이템들은 기존보다 값어치가 절반 이하까지 떨어지니까. 수요도 늘어났지만 공급이 훨씬 더 늘어났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동시에 영민이 아이템이 아닌 포션을 사재기 한 이유이기도 했다. 대량의 몬스터를 상대하려면, 고레벨 던전에서 탈출한 강력한 몬스터들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상급 포션의 소모가 필수적이니까.
또한 길드들이 앞다투어 신규 각성 헌터들 중 쓸만한 이들을 추려 데리고 갈 테니 능력의 사용과 개발 면에서도 부족한 부분은 금세 채워지겠지.
강태성의 기억에 따라 판단을 내린 영민은 일단 헌터협회 지부 내로 들어가 귀를 활짝 열었다. 허공을 떠도는 정보들을 하나라도 더 귀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몇 곳을 제외하면 곧 정리가 되겠군.’
몇몇의 정보는 직접 물은 결과, 강태성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던전 쇼크가 일어나는 즉시 축제는 중단됐고, 구경을 위해 모여들었던 헌터들은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몇몇의 헌터 기업은 자신들의 신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앞장서서 싸우기도 했고, 소모품을 판매하러 나왔던 이들은 대박을 터트렸다.
모여있던 헌터의 수와 질 모두 대단했기에 소모품을 써볼 새도 없이 고양시의 몬스터들을 대부분 쓸어버리기는 했지만 고양시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세계가 동시에 같은 현상을 맞이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소모품의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얻기 힘든 상위의 포션일수록 상승폭은 더 컸다.
‘판매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어.’
한데 힘을 모은 헌터들은 다음으로 꽤 많은 헌터들이 남아있어 간신히 버티던 서울을 빠르게 수복하고, 경기도 권까지 몬스터드를 밀어내며 어느 정도 회복했다. 안정된 것은 아니지만, 몬스터의 사체에 대한 후속 처리가 덜 끝나기는 했지만 그것을 저장하거나 처리할 능력이 있는 대길드나 대기업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손해를 보는 것은 당장 넘쳐나는 몬스터의 사체들을 처분할 방법이 없는 개인 또는 팀 단위의 헌터들 뿐. 대기업이나 대길드는 그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처분하는 몬스터의 사체를 구입해 축적하고 가공해 그 와중에 배를 불렸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편한 것은 아니다. 3레벨 이하의 던전까지는 낮은 등급의 헌터들끼리도 힘을 합쳐 어찌어찌 처리가 가능했지만 4~5레벨 이상의 던전의 경우 B등급의 헌터는 나서야 했고 6레벨 던전이라도 있다면 A등급이 나서야 했다. B등급으로 파티를 이룰 정도의 전력을 갖춘 것은 중형 이상으로 분류가 되는 길드들 밖에 없으니 자연히 그들이 바빠질 수밖에.
특히 5레벨 이상의 던전이 몰려 있는 도시라면 대길드 몇 개가 나서야 했고, 6레벨 던전이라도 있다면 10대 길드 중 하나 이상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서는 답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대길드의 포션 수급도 그리 넉넉할 리가 없다. 아마 영민이 가진 포션과 주문서들을 풀어놓으면 그곳이 어디든 돈을 보따리로 싸짊어지고 달려올 것.
수도권 경계까지 몬스터들을 밀어낸 후, 대길드들이 각 광역시로 쪼개져 움직였다고는 하나 헌터넷에 판매 소식을 올려 놓기만 해도 반나절 안에 공급책들이 모여들 것이다.
‘하지만 급할 건 없지.’
그렇지만 영민은 포션들을 급하게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봐야 값을 깎거나 날로 먹으려는 놈들만 꼬일 뿐이다.
어차피 당분간 중급 이상의 포션은, 특히 상급 이상은 가격이 고공행진을 할 테니 느긋하게 돈을 긁어모으면 그만이다.
‘아니지. 그럴게 아니라··.’
얼마에 올려볼까. 3배? 4배? 즐거운 고민을 하던 영민은 퍼뜩 떠오르는 무언가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일단은 중급부터.’
꺼내놓은 것은 중급의 포션들이다.
“이걸 파시게요? 전부 다?”
던전 쇼크가 발생한 후, 중급 포션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데 영민이 내놓은 것은 꽤나 대량이었다. 헌터협회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랄만도 했다.
“예. 위탁판매를 맡기겠습니다. 조건은··이렇게 하죠.”
그러거나 말거나 영민은 울트라맨 가면 속에 표정을 숨기고 종이에 요구 조건을 슥슥 적어나갔다.
기본 전제는 익명. 물론 헌터협회는 ‘럭키맨’이라는 그의 팀명을 확인 할 수 있겠지만 판매 과정에서 구매자에게는 알리지 않는 조건이다.
방식은 위탁 판매. 경매와는 또 다른 방식이다. 헌터 협회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제품들에 대해서만 진행하는 판매방식으로, 판매자가 원하는 최소 금액을 정하면 헌터협회가 능력껏 그보다 높은 가치로 팔아주고, 최소 금액의 일정 퍼센티지와 추가 상승 금액의 일정 퍼센티지만큼을 수익으로 가져가는 방식이다.
때문에 거래가 불발이 될 수도 있지만 잘만하면 기대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도 있는 방식. 그러나 판매 상품이 지금 없어서 못 구하는 중급 포션이니 불발이 될 일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평이했다. 협회 직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특이한 것은 결제 수단이었다. 결제 수단으로 현금 대신 마나석을 결제 수단으로 요구한 것.
던전 쇼크 직후 급락한 후 아직도 오락가락하는 현금 가치보다는 마나석으로 대금을 지급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서 시장에 푼 것도 아닌데, 포션 뿐 아니라 여러 제품들의 가격이 크게 오른 상황이었다. 생필품은 말할 것도 없고 기호식품조차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평소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이미 주요 도시에서는 몬스터들이 대부분 정리되고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쩌면 오히려 나은 치안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게, 공포라는 게 그리 쉽게 안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지금 아무리 높게 값을 불러 현금을 챙겨도 제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럴 바에야 던전 쇼크로 나타난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넘쳐나는 마나석을 결제 수단으로 정하는 게 낫지.’
어차피 마나석은 방랑 상인의 만물 보따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구입해야 할 품목이었다. 그러니 마나석이 일시적으로 풍년이다 못해 넘쳐날 지경인 지금, 대량의 마나석을 저렴한 가치로 구입해두면 현금을 묶어두는 것보다 크게 이득일 것이라는 계산이다.
‘마나석이야··. 쓸데가 많으니까.’
꼭 현금으로서의 가치와 이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마나석은 ‘게이머’의 핵심 능력과도 연관이 있었다.
바로 게임의, RPG의 꽃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강화’의 핵심 재료였다.
지금은 레벨 제한에 걸려 시도조차 할 수 없지만 언젠가 일정한 레벨을 달성하게 되면 열리게 될 강화 시스템에서 코인과 함께 사용되는 유일한 재료.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마나석이 풀릴 테니 당장 엄청나게 긁어 모을 필요는 없지만, 저렴할 때 확보해두는 것은 썩 괜찮은 선택으로 보였다.
“기한은 내일까지로 하고,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다음 거래를 진행하죠.”
그러면서 영민은 슬쩍 상급 포션의 모습을 비쳤다. 하는 거 봐서 다음 거래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큰 건이다. 고작해야 D등급 헌터로 기록된 그가 어떻게 이런 물건들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헌터협회에 당당히 위탁판매까지 맡길 정도라면 적어도 장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니, 이 시점에 출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게 고작 중급 포션 수백 개 정도로 끝날 거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큰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승진까지 보장시켜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그 말에 헌터협회 직원도 정신이 바짝 들었다.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헌터협회를 나선 영민은 은신과 도깨비 감투를 이용해 북적이는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조금 전 자신이 한 일을 지켜본 누군가가 뒤쫓는 일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함이다.
“일단은 맡겨두기로 하고, 이 시기에 그게 나타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인근 건물의 옥상.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꼬리를 밟히지도 않을 공간에 선 영민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던전 쇼크가 낳은 현상들.
던전의 폭발, 새로운 던전의 생성, 새롭게 각성한 헌터들의 등장.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동화(同化)라··.’
바로 동화현상이었다. 이 세계와 던전 속의 세계가 미묘하게 겹쳐진 것이다.
영민이 노리는 것은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오월드 내부였었지.’
위치를 다시 한 번 떠올린 영민은 즉시 유령마를 소환해 올라탔다. 혼령질주를 사용해 빠르게, 목적지로 날 듯이 사라졌다.
“폐허가 따로 없군.”
던전이 사라지며 잠시동안 몬스터 소굴이 되었던 놀이동산 오월드는 그야말로 폐허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세상이 멸망하니 어쩌니하는 종말론까지 나돌 정도로 불안과 공포가 심각한 상황에서 누가 놀이공원을 찾을까? 더구나 운영을 해줄 사람도 피난을 하느라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바이킹 아래라고 했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정도가 심하기는 했다. 그것이 바로 동화 현상 때문. 지금은 눈치 챈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조금 뒤면 알려질 사실이다.
“아, 있다!”
던전 내부에 있다가 바깥으로 풀려나온 것이 몬스터가 전부는 아니었다.
던전에서만 볼 수 있던 채집물들 또한 바깥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던전에서만 채취 가능하던 광물과 식물들이 바깥 세상으로 풀려나온 것이다.
지금은 몬스터에 정신이 팔려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사람들도 알게 되겠지. ‘돈’이 되는 채집물들의 경우 헌터가 아니라도 작지 않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영민이 찾은 것은 그 중에서도 ‘큰 돈’이 될 수 있는 채집물이었다.
“만드라고라.”
일시에 모든 상태이상을 제거하고 체력과 마나를 가득 채워주는 최고의 포션인 엘릭서의 재료가 되는 약초였다.
다만 한가지 문제라면 놈을 땅에서 뽑아내는 순간 내지르는 악마의 절규에 정신이 약한 사람은 쓰러지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쯤은 가볍게 해소할 수 있는 기억이 영민의 머릿속에 있었다.
< 43화 - 동화 同化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