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기원 >
영민이 완주, 진안, 무주 순으로 몬스터들을 정리해 나간지 6일. 비로소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하급 실전 검술 스킬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중급 실전 검술 스킬로 변경됩니다.]
[하급 방패전투술 스킬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중 방패전투술로 변경됩니다.]
[단단한 근육 스킬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근육 갑옷 스킬로 변경됩니다.]
··
[끓어오르는 힘 스킬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폭발하는 힘 스킬을 익히실 수 있습니다.]
[지키는 자의 방패 스킬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이지스의 방패 스킬을 익히실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벌어들이는 코인을 모아 꼬박꼬박 노력가의 알약을 사먹고 잠까지 줄여가며 날뛴 덕분이다.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근접 전투 스킬 숙련도가 100%를 가리키며 진화하거나, 강화되고 동종의 상위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켰다.
스킬에 따라 다르지만 숙련도 0%일때보다 최소 30% 이상은 더 강화가 된 셈이니 고작 일주일이 되지 않는 시간에 이룬 것치고 비약적인, 눈부신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영민은 그것보다 앞으로 더 발전해나갈 수 있는 부분이 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이미 C등급 헌터 중에서도 적수가 없겠지만 SS등급까지 올랐던 강태성의 과거 혹은 미래과 견주어보아도 아직 한참이나 모자란 능력임은 틀림 없으니까.
그래도 중반을 넘어갈수록 오히려 전투력의 증가 속도가 더욱 커지는 게이머의 특성을 생각하면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모아둔 코인이 없고 시간이 부족해 1일짜리 노력가의 알약을 샀지만 나중에 더 강력한 스킬들로 무장을 하고 1주일짜리, 1개월짜리 노력가의 알약을 사용한다면?
A등급 정도까지는 금세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클리어.”
영민의 한 마디에 마나가 움직이며 온 몸을 가득 덮은 핏물이며 먼지들이 털려나갔다.
잡다하지만 은근히 써먹을 곳이 많은 1써클 마법 중 하나다.
난전을 벌이고, 무두질로 몬스터들의 시체를 해제하느라 엉말이 되었던 차림이 말끔해지자 영민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똑똑
“안에, 괜찮으십니까?”
분명히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10일 가량 몬스터들에 둘러싸여 햇빛도 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공포에 질리고 아무도 못 믿을만 하다.
힘으로 문을 열어낼 수도 있지만 영민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사, 사람입니까?”
“예. 헌터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아아, 드디어!”
2층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확인한 민간인들이 영민의 존재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조금은 밋밋하고 감정 없어 보이는 울트라맨 가면이었다. 영민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코인 상점에서 구입한 가면 아이템.
그 특이한 모습에 사람들이 잠시 움찔 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식량을 아껴가며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였는데 구조대가 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다른 분들은 어디··?”
“저 혼자입니다. 안에 몇 분이나 계시죠?”
“아아, 네 식구입니다.”
지나치게 말끔한 모습으로 혼자 나타난 것이 이상할 법도 했지만 고유 능력이 특별하거나 상급 헌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개의치 않았다.
영민은 그런 그들을 유령마에 태우고 피난처인 군청 인근 등나무운동장 일대로 향했다. 다른 이를 태울 경우 혼령질주 같은 스킬은 사용 할 수 없지만 그저 태우고 이동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생존자들과 무주에 머무르던 일부 헌터들이 지키고 있는 장소. 근처에 전통 시장도 있었고, 하천이 있었고, 사람들이 어설프게나마 자리를 깔 수 있는 등나무운동장과 예체문화관 등이 있어 인원을 수용하기 썩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이미 영민이 어느 정도의
식료품을 보급해주기도 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끼기깅
영민이 가까이 가자 골렘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인식했다. 헌터들만으로 부족한 감이 있어 영민이 일꾼 골렘과 미니 기계 골렘 몇 마리를 만들어 둔 것이다.
우드 골렘에도 한참 못미치는 전투력이지만 상대가 1, 2레벨 던전 출신의 몬스터라면 그럭저럭 상대가 되었다.
더구나 숙련도 작업도 할 겸 일꾼 골렘 다섯기에 미니 기계 골렘을 열 기나 만들어둬서 다른 헌터들과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막아내거나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전에 영민이 주변을 다 정리해두기는 했지만 어디서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튀어나올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민간인을 구조했습니다.]
[가족 구조 보너스가 적용 됩니다.]
그렇게 네 가족을 안전지대로 이끄는 순간, 생각지 못한 알림이 나타났다.
[최초 업적 달성! 최초로 1만명 구조에 성공했습니다.]
[타이틀 ‘만인의 영웅’을 얻으셨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대량의 경험치와 보너스 포인트 20을 얻으셨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조건부 특수 능력을 습득합니다.]
[개인의 고유 능력을 확인합니다. 보상이 조정됩니다.]
[조건부 특수 능력 ‘기원’을 얻으셨습니다.]
중간에 몇 개의 대피소로 나누어져 있던 인원들을 한 곳으로 모은 것이 크게 인정된 덕분이었다.
1천명 때는 ‘민간 구조사’ 타이틀을 주고 5천명 때는 ‘구조 전문가’ 타이틀을 주더니 1만명에서는 타이틀 뿐 아니라 대량의 경험치와 보너스 포인트, 특수 능력까지 후하게 지급됐다.
영민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동시에 조건부 특수 능력에 집중했다.
“기원?”
조건부 특수 능력이라는 것은 알지만 강태성의 기억을 훑어도 ‘기원’이라는 스킬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아무래도 드레인이 영향을 미친 까닭에 보상이 뒤바뀐 모양. 1만명을 구조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강태성의 기억 속에 있을 법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1만명 구조라는 게 쉽지는 않은 업적이니 제법 그럴싸한 것을 줄 만도 한데··. 은근한 기대를 가지며 스킬을 확인했다.
[기원][조건부 특수 능력]
다수의 염원이 어우러져 하나의 강대한 힘을 만든다.
사용자를 향해 다수의 사람이 동일한 염원을 할 시 인원수과 간절함에 비례한 힘을 얻을 수 있다.
- 염원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 더 강력한 힘을 얻는다
- 염원의 종류에 따라 적용되는 효과는 변동 될 수 있다
- 호감도 보통 이상인 대상의 염원만 적용 된다
“?”
좋은 것 같기는 한데, 설명이 뭔가 모호했다. 다수의 염원? 염원의 종류? 이게 다 무슨 말이란 말인가.
“원기옥 같은 건가?”
구글 일곱 개를 모아 소원을 비는 만화에서 “지구인들아, 내게 힘을 빌려줘!”하고 외치던 그런 능력인 건가?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약간 다른 것도 같았다. 원기옥이라 불리는 기술은 그저 에너지를 십시일반해서 단 한 번의 강력한 공격을 가하는 것인데, 이것은 염원의 종류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고 나와 있기도 하고 호감도까지 따졌으니까.
어지간히 까다로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가면인데 적용이 되나?”
한 가지 더. 영민이 완주, 진안, 무주를 돌며 이 모든 구조행위를 하는 동안 가면을 썼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 가면을 벗는 순간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가면을 쓰지 않아 자신을 향해 염원하지 않는다던지.
하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드러내고 여러분을 구한 게 바로 접니다! 하며 떠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 능력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크게 약화되는 것은 아니니 과도하게 나설 필요는 없지만 뭔가 어정쩡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알게 되겠지.”
어차피 신분을 드러낼 게 아니라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득보다 실이 더 크겠지.
또한 일만명의 염원은 크면서도 작은, 다소 애매한 숫자였다.
얼핏 듣자면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들이 내게 귀속된 소환수나 가디언도 아닐진데 모두 같은 염원을 하게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어쩌다가 한 번 하게 만든다 한들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면 그저 던전 몇 개 빨리 클리어하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써먹기에는 조건이 생각보다 까다롭다. 더욱이 당장은 그들이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겠지만 이 사태가 해제되고 시간이 지나면 가끔 떠올릴 수는 있어도 염원까지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부터 지원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세요.”
“또 다녀오시게요?”
영민의 당부에 피난민들을 지키던 헌터가 걱정스런 물음을 던졌다. 몬스터들을 피해 스스로 이곳을 찾아온 이들도 많지만 영민이 쉴새 없이 움직여 구해 돌아온 인원이 대단했기에 그가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이다.
이미 여러번이나 반복해서 다녀왔기에 미안하고 고마우면서도 익숙해져 있는데, 이번에는 영민의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들을 잘 부탁합니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뵙죠.”
“예?? 그럼 떠나시는 겁니까?”
‘다녀오겠습니다.’정도였던 평소의 말과 다르자 주변 헌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끝까지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었나? 이제 안정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제 곧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국가적으로나 헌터협회로나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충분히 영
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데 떠난다니 그들의 기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명성은 영민으로서도 탐나는 것이었다. 언제 자신이 남들에게 추앙받고 고마움의 표시를 받아보았겠나.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 같이 있는 것만으로 불행이 옮는다며 배척 당하는 것은 물론, 역으로 불행이 옮지 않기 위해 오히려 괴롭히던 이들 뿐이었
는데.
비록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마음이, 감사함이 영민에게는 감사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던전 쇼크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결코 충분치 않았다. 길드의 압력이나 횡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기 위해서는 최소 A등급 헌터 수준의 능력은 갖추어야 했다.
“다른 분들께는 말 좀 잘 전해주세요. 힘 내시라고. 몬스터들만 정리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거리와 건물을 점령하고 곳곳에 숨어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들을 사냥하려는 헌터들에 의해 파괴된 부분이 더 많았다.
덕분에 강태성의 기억 속에서 인류는 1차 던전 쇼크가 끝난 뒤에도 공장이나 저장창고 같은 상시 가동이 필요한 산업들만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뿐,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복구해나갈 수 있었다.
“유령마 소환.”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 영민은 빠르게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어디로 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던전? 아니면 상황이 정리되었을 대도시?
둘 다 여도 괜찮지.
영민은 아무도 모르게, 북쪽으로 올라 대전으로 향했다.
“어?”
그러다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른 채 빛무리에 휩싸였다.
[일만 명의 사람들이 당신의 안녕을 염원합니다.]
[기원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와 재생력, 스킬 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 사람들에게 내가 떠난다는 것을 이야기 했나 보구나. 감정처럼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에 영민이 미소를 지었다.
전투 중은 아니었지만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마음을 받았으니 됐다.
“히이이잉!!”
대신 풍경들이 지나는 속도가 달라졌다. 혼령질주를 사용하며 일체화 되어 있던 탓에 유령마까지 기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령마가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풍경이 쑥쑥 밀려나고 몬스터들과 대치 중인 경계선, 베이스 캠프를 넘어 순식간에 대전까지 진입했다.
< 42화 - 기원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