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던전 쇼크 (1) >
마켓을 털다시피 한 영민은 그대로 용산역으로 향했다. 부피만 해도 대단해야 했지만 마켓에서 ‘아공간 주머니’로 불리는 공간 확장, 경량화 배낭을 함께 구입한 덕에 의심받지 않고 가볍게 KTX에 오를 수 있었다.
실제로는 아공간 주머니를 추가해 인벤토리 공간을 확장하고 인벤토리에 동일한 아이템을 겹쳐서 보관한 것이었지만.
목적지는 전라북도 전주.
이제 내일이면 닥쳐올 던전 쇼크를 대비하기 위해 한 발 먼저 앞서나가려는 것이다.
2시간쯤 달리니 전주역에 도착했다.
아직은 평화로운 모습. 내일이면 아비규환으로 변할 테지만, 영민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헌터 협회에 알린다 한들 영민이 예언 계열의 고유 능력을 지닌 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미친놈 취급만 받을 것이 뻔하니까.
그렇기에 그저 숙소를 잡고 인터넷으로 보다 세부적인 정보를 모으며 컨디션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 헌터 어워드의 전야제 격인 축제는 성황리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대한민국 헌터의 80%이상이 모인다는 소리가 있을 만큼 큰 행사이기에 준비하는 쪽도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해온 덕분이다. 오죽하면 축제가 끝나는 즉시 내년 축제에 대한 기획을 시작한다는 소리까지 있을까.
강태성이 좋아하고, 영민이 좋아하는 걸그룹들이 총 출동한 것을 못 봐서 조금 아쉽지는 했지만 내일부터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어 질 테니 잊고 한숨 푹 자두었다.
그렇게,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5분 남았네.”
강태성의 기억 속 던전 쇼크가 일어나는 시간은 12시 정각. 영민은 전주 내의 던전 위치를 모두 파악하고 휘말리지 않기 위해 살짝 비껴나 있었다.
주말을 맞아 전국에서 손꼽히는 관광지인 한옥마을은 북적거렸고, 파릇파릇한 청춘들이 여행을 즐기기 위해 한복으로 갈아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잠시 후 벌어질 참상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드르르르르르-
‘시작됐군.’
시작은 작은 진동이었다. 몸이 잘게 떨리는 정도의 진동. 위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곳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아니, 전세계적으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리라.
‘던전에서 시작되는 울림이니··.’
던전에 가까울수록, 던전의 레벨이 높을수록 진동의 강도가 강할 것이다. 그나마 전주에는 1레벨과 2레벨. 높아봐야 3레벨 던전 뿐이라 이정도이지, 5레벨 이상의 상위 던전이 있는 곳에서는 심할 경우 건물이 무너지는 곳도 있다고 했으니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도 피해이지만 더 큰 위협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에에엥-!
잠시 후 울려 퍼진 사이렌 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인근의 던전들이 모조리 사라지며 그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뛰쳐나온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던전 안에 있을 때는 몇 십 마리이지만, 던전이 폭파되며 바깥으로 나올때는 몇 회 분의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알립니다. 민간인분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고 헌터와 예비군들은 즉시 가까운 군부대나 임시 초소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실제상황. 실제상황입니다.”
인근 군부대인 35사단이 움직였지만 전투병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즉시 주변 헌터들과 전투 가능한 예비군 병력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졌다.
전주 뿐만 아니라 전국, 전 세계가 마찬가지였다.
‘던전 쇼크’라고 불리우게 될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그럼에도 쉽지가 않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여느 국가들보다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놈의 시상식이 뭔지, 이 상황을 타개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강력한 카드인 헌터들 대부분이 일산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양시와 서울, 수도권이 빠른 속도로 수복 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이하 지방 도시들은 처절하게 싸우며 버텨야했다.
‘시작이야.’
그들의 안내에 따라 영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할까. 군부대? 어디 있는지 모를 임시 초소? 그것보다는 위치가 확실한 헌터협회 전주지부를 찾았다.
한옥마을 인근에 위치해 도착은 금방이다.
“헌터십니까?”
영민의 도착을 다급하게 맞이하는 헌터협회 직원. 지부장은 이미 몬스터에 대응하기 위해 뛰쳐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슥 돌아보니 모여든 헌터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수가 적다해도 이 중 B등급 이상의 고위 헌터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런 헌터가 여기 붙어 있을 리 없지.’
그쯤 되는 실력자들은 모조리 축제를 즐기러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때문에 강태성의 기억 속 전주는 고위 던전이 없었음에도 좀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예.”
긴 말은 필요없었다. 영민은 그저 헌터증을 보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했다.
헌데 직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등급을 확인한 까닭이겠지. 그처럼 등급이 높지 않은 헌터들만 남아있으니 표정이 어두운 것도 이해가 되었다.
“팀 럭키맨. 확인했습니다. 군인들과 합류하시겠습니까, 팀 단위로 움직이시겠습니까?”
“팀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좋습니다. 이건 사태가 수습되는 대로 반납해주시면 됩니다. 모쪼록 조심하시길.”
헌터증을 통해 팀 소속 헌터라는 것을 확인한 직원은 곧장 배지 하나를 내어줬다. 공인된 헌터라는 것은 증명하는 증명패 같은 역할이다.
보통은 던전 내에서만 능력 사용이 허락되지만 이 배지가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든 공익을 위해 능력을 사용해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던전을 뛰쳐나온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피치못할 파괴행위를 한다 해도 일정 부분 면죄부가 주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영민 같은 저등급 헌터들이 구경도 하지 못한 특혜가 담긴 증표였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에 헌터협회도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가만 돌아보니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다른 헌터들도 같은 배지를 달고 있었다. 모두가 단 것은 아니다. 귀한 배지인 만큼 팀 당 하나 정도만 배분한 것으로 보였다.
B등급이 달고 있어도 아까울 배지를 D등급 나부랭이들이 달고 있으니 직원의 심기가 불편할만 하다.
‘개판이군.’
받을 것도 받았으니 지금 당장 달려가 몬스터들을 도륙해도 모자랄 판에 아직도 헌터협회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이들을 보니 전주의 수복이 늦었던 이유를 알만 했다.
능력에 자신이 없으니 이런 귀한 배지를 받고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군 부대가 대거 정리를 한 뒤에나 깨작거리며 움직인 것이겠지.
어차피 던전 내부가 아니니 마나량이 오르지도, 채집물을 얻지도 못 할 테고 몬스터가 득실대는 곳으로 뛰어들어봤자 위험에 대한 보상을 받기 어렵다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영민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건 기회, 아니 노다지다.’
던전 내부의 마나를 흡수하지 않아도 경험치 습득을 통해 얼마든지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이런 기회가 또 없었다.
즉시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북적이던 한옥마을 인근인데다 던전 쇼크가 일어나면서 교통은 마비 상태였다. 도로가 통제되었고, 어떻게든 자동차를 탈취한다 해도 금방 몬스터 떼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준비했지.’
어젯밤, 컨디션을 조절하는 한편 코인 상점을 열어 축제에서 경품으로 얻었던 아이템을 판매하고, 무려 2만 코인이나 들여 ‘탈 것’을 구입해둔 것이다.
“유령마 소환!”
어둠의 힘이 뭉치더니 곧 검고 흐릿한 말의 형상을 이루었다.
탈 것은 크게 두 종류였다.
빛 속성과 어둠 속성.
빛 속성 탈 것은 기본 능력이 약한 대신 성장이 가능했고, 전투에 도움이 되는 신성한 오로라를 주변에 퍼트렸다. 반면 어둠 속성의 탈 것은 처음부터 능력이 높게 설정 된 대신 성장이 불가능했고, 오로라 대신 공격, 이동, 탈출 따위에 특화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중 유령마는 어둠 속성의 2단계 탈 것이었다.
“히이이잉!”
온전한 형체를 갖춘 유령마가 영민을 태우고 힘껏 울부짖었다. 그 자체로 흉흉한 기운이 퍼지고 약한 자들은 몸을 움츠렸다.
그 기운이 물리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어지간한 D등급 헌터보다 이 유령마의 전투력이 더 높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니, ‘유령’마라는 특성상 속성 인챈트나 마법 능력, 마나가 가미된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조금의 피해도 입힐 수 없을 테니 한 팀과 맞붙어도 승기를 잡을지 몰랐다.
“가자!”
그런 녀석이 영민의 말에 바짝 고개를 숙이며 충실하게 따라 움직였다. 코인 상점에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보람이 있게 그를 주인으로 완전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갈까하는 고민 따윈 없었다. 그 딴 건 이미 어젯밤 정해두었으니까. 전주 헌터협회 지부장 등 비교적 고위 인사들이 달려갔을 주요 지역은 버린다. 대신 시 외곽에 있는 지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반월동. 전주를 감싸고 있는 완주로 넘어가는 경계이기 때문에 완주의 몬스터가 섞여 바글바글 할 곳이었다.
타 도시로 이어지는 통로이기도 하니 의외로 수복이 빠를 수 있을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이 현상, 던전 쇼크는 이곳 전주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발생한 재난이었다. 다른 곳들도 더 패닉에 빠졌으면 빠졌지 다른 도시까지 신경을 쓸 여력은 있을 리가 없다.
“개떼 같네.”
유령마의 등에 올라 한참을 달리던 영민은 곧 장애물들을 마주 할 수 있었다. 그가 있던 한옥마을은 전주의 중심에 있고, 그가 가려는 반월동은 가장 외곽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이 깔려 있는 것이 당연하다.
강력하지는 않지만 수가 질리도록 많은 몬스터들.
영민은 방패를 등쪽으로 돌리고 강행돌파를 시도했다.
“파이어 볼!”
한 손으로는 검을 떨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법을 쏘아내며 놈들 사이를 헤집었다. 그럴 때마다 최소 한 마리에서 한 무더기의 몬스터가 치명상을 입거나 죽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미 영민의 능력과 장비는 오버 스펙이라 할 정도로 높았으니까.
“이대로는 끝이 없겠는데··.”
하지만 몬스터들은 그 압도적인 무위에도 겁을 먹을지언정 포기하거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동료의 시체에 분개하며 꾸역꾸역 길을 막고, 밀려들어왔다.
이대로는 영민 쪽에서 먼저 체력이든 마나든 고갈이 될 터였다. 그것을 가볍게 넘길 만큼 대단한 포션들이 인벤토리 가득 있기는 했지만 의미는 없다. 애초에 포션과 주문서를 사재기 한 것은 이번 사태로 똥값이 될 현금 가치를 고려해서이지 직접 사용할 의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유령마, 혼령질주.”
영민의 명령에 따라 유령마가 스킬을 발동했다.
불투명하던 몸체가 더욱 흐릿해지더니 탑승중인 영민의 몸까지 영체화 시켰다.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무시하고 몸을 통과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37화 - 던전 쇼크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