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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운 MAX-27화 (27/177)

27화 - 새출발 (2)

영민과 지한은 아리랑 길드의 길드장과 간부들이 몰려오기 전까지 기분 좋게 한 잔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의 이야기며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영민은 채집꾼 생활을 끝내고 헌터로서 새 출발을 할 것이라 밝혔고, 지한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해줬다. 예상대로, 지한은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자식이었다.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할 수 있었고, 굳이 헌터를 하지 않아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헌터로 활동을 하고, 아리랑 길드에 가입을 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 헌터라면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빡빡하고 재미없을 줄은 몰랐다며 벌써부터 회의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여기인가?”

“예. 맞습니다.”

도란도란 한창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소식은 정찬혁이 전했지만 윈드 엘리멘탈은 진지한이 보관하고 있는 까닭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래도 길드장이라는 것인지, 진지한이 제법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힐러이다 보니 그도 진지한을 기억하는지 제법 반가이 맞았다.

그러나, 고작 채집꾼. 높게 쳐줘도 D등급 헌터에 불과한 영민에게까지는 관심이 미치지 못했다. 권위 의식이 없기로 유명한 강중만이지만 평소라면 모를까,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자네가 ‘그걸’ 가지고 있다고?”

“예.”

강중만이 들어오는 순간 호프집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밖으로 나갔다. 보안 유지를 위해 길드원들이 힘을 쓴 것도 있었고, 애초에 아리랑 길드의 본사 인근이다보니 이곳을 찾는 이들도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관련이 있는 이들인 탓도 있었다. 때문에 모든 이들을 물리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5분 남짓이었다.

그처럼 소문이 새어나갈까 조심스러운 이들과는 달리 진지한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덜렁 물건을 내놓았다.

“으음!”

보랏빛의 영롱한 자태에 모두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에픽 등급의 아이템은, 아리랑 길드의 길드장이자 A등급 헌터인 강중만조차 한 개를 겨우 보유했을 뿐이었다.

“능력은? 확인해봤나?”

“바람 속성 데미지 흡수랍니다. 정확히 어느 수준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C등급 헌터의 공격은 완전 무효화 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휘익

진지한이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던지자 강중만을 비롯한 모두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몸을 움직였다. 에픽 등급 씩이나 되는 아이템이 고작 바닥에 떨어진다고 박살이 날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 꼴이 재미있었는지 히죽 웃어보인 진지한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다시 영민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됐지요?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로 올릴 테니 쪼지 마세요.”

“건방진‥!”

볼 일 다 봤으면 이제 그만 가보라는 듯한 지한의 손짓에 간부들이 발끈했지만 강중만이 그들을 가로 막았다. 이제 막 각성한 루키인 주제에 10대 길드 중 한 곳의 주인인 자신에게 배짱을 튕기던 지한이다. 그리고 말이야 맞는 말이지 않은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규정대로 하겠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대하지.”

결국 강중만은 수하들을 우르르 이끌고 다시 사라졌다. 그를 따라 가게를 나가는 몇몇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이를 갈았지만 그런다고 지한에게 노골적인 수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회복에 버프에 전투능력까지 모조리 갖춘 그는 꼭 아리랑 길드가 아니더라도 10대 길드 어디에서나, 아니 세계 랭킹에 들어가는 길드에도 환영 받으면서 들어 갈 수 있는 능력자였으니까.

“형, 그래도 괜찮아요?”

“뭐 어때,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정 마음에 안 들면 짜르라지.”

미래에 그런 것처럼, 벌써 진지한은 길드 생활에 염증을 느껴가는 모양이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어찌되도 상관 없다는 태도. 그나마도 버티고 있는 것은 2년의 계약기간 때문이었다.

보통 루키들의 경우 1년 계약 후 재계약을 기본으로 하는데, 계약조건부터가 다른 것만 봐도 아리랑 길드가 얼마나 그를 잡고 싶어 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아까 이를 갈고 나간 놈들도 지한에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던전 내에서의 불이익? 당장 지한의 포지션은 힐러 겸 버퍼다. 버프 한 번 돌리고, 한참을 쉬다가 때때로 회복 스킬만 넣어주면 땡인 비교적 안전한 포지션. 일부러 파티원이 다 죽을 게 아니라면 그가 위험해 질 일은 없었고, 오히려 그가 회복을 시켜주지 않으면 다른 모두가 위험해지는 위치였다.

아니, 수틀리면 꼬투리를 잡아서 귀책 사유를 아리랑 길드에 돌리고 계약을 파기해버려도 좋을 일이다.

그렇기에 지한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내키는 대로 행동 할 수 있었다.

“헌팅을 다닐 거란 말이지?”

그들이 사라진 이후, 텅빈 가게에서 영민과 지한은 한참이나 술잔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민은 지한에게 무한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자신의 계획을 터놓았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채집꾼 생활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D등급의 헌터로서 헌팅을 다닐 것이라는 계획을.

지한의 배려로 원한다면 아리랑 길드에서 헌터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정중히 거절 할 것이라는 의사도 밝혔다. 이미 강태성의 기억을 가진 영민에게 초급 헌터 교육이라는 건 튜토리얼 같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니까.

이 부분을 지한이 어떻게 생각할까 조심스러웠지만 그는 의외로 쿨하게 반응했다. 영민이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깟 헌터 교육이 뭐가 중요하겠느냐는 것이다. 인생은 실전이라나?

지한은 이미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긴 영민이 한두달 교육 받고 만물박사인척 하는 놈들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 장담했다.

“동생이 먼저 가서 기반 잘 닦아놓고 있어. 2년 뒤에 할 거 없으면 나도 신세 좀 지자. 하하하.”

그리고는 또 자신의 ‘촉’이 말하고 있다며 영민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 자신했다.

‘세계를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인물이 계속 나만 따라다니는 것도 곤란한데.’

정말 2년 뒤에 길드를 만들자고 덤빌 기세인 지한을 보며 영민은 복잡 미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이 상황이, 이 순간이 마냥 행복했다.

그동안 내색할 순 없었지만, 사람이 참 많이 그리웠다.

"그런데…. 형은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에요?"

영민이 망설였던, 조금은 두려워 꺼내지 못했던 한 마디를 어렵사리 꺼내놓았다.

"그야 동생이니까."

일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러나 영민이 꼭 불운을 달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도 믿기 어려운 호의였기에 의문스런 눈빛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한참을 바라보는 영민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지한이 볼을 긁적이며 다시 입을 떼었다.

"사실 처음에는 안 믿었거든."

"?"

"내가 말이야. 능력을 각성하고 나서 '목소리'를 들었어. 뭐랄까, 이를 테면 '신탁' 같은 거랄까? 아무튼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내용 만큼은 머릿속에 콕 박히는 신비한 음성이었단 말이지. 그 음성이 말하더군. 동쪽으로 가서 능력을 증명 받아라. 그곳에서 너와 세상을 구원할 되돌아 온 인연을 만날 것이다.라고."

뜨끔

지한의 이야기에 영민은 속이 뜨끔 했다. 그 신비의 목소리가 말한 '세상을 구원할 되돌아 온 인연'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색해보니까 동쪽에 헌터협회가 있더라고? 어차피 각성도 했겠다, 능력 테스트나 받을 겸 속는셈 치고 가봤지. 그 곳에서 동생을 만났고."

"왜 저라고 생각하셨어요?"

"응? 하하. 아냐. 그런거."

"네?"

"그 목소리 때문에 호기심으로 가기는 했지만 '나와 세상을 구할 인연'이라니, 웃기지 않아?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 뿐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동생과 친해진 건 순전히 개인적인 호감 때문이라고. 좋은 사람 만나서 친해지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도울 수 있는만큼 돕는게 꼭 계산기 두드려가며 할 일은 아니잖아?"

호탕한 지한의 대답에 영민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물론 '지한과 세상을 구할 되돌아 온 인연'을 자신이 죽게 만든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찜찜하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만약 정히 마음이 쓰인다면 하는데까지 해보면 되는 거다.

결국 두 사람의 술자리는 날이 샐 때까지 이어졌다. 둘 다 얼큰하게 취했지만, 다행히 숙취 따윈 없었다. 지한이 헤어지기 전 능력을 발휘해 숙취를 날려버린 덕이다.

집으로 돌아온 영민은 대자로 뻗어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     *

일이 있은 뒤, 영민은 이중던전에서의 일을 진술하고 보고서 작성을 돕기 위해 이틀을 더 아리랑 길드에 출근했다. 대신 능력 테스트를 다시 받고, D등급 헌터로 등록한 뒤 채집꾼 생활을 마칠 의사를 전달했다.

지한과의 관계, 에픽 아이템을 얻어온 공 등을 이유로 아리랑 길드에서도 가입을 권유했지만 영민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한들, 영민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한들 솔직한 말로 아리랑 길드에게 자신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이걸 기회랍시고 줄을 잡았다간 그 줄에 묶여 진지한을 다루기 위한 볼모 신세가 되기 쉬웠다.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미명 하에 감시 아닌 감시를 당하느라 원하는 것을 뜻대로 이루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고.

그래서인지 은근 슬쩍 협박 아닌 협박을 섞기도 했다. 지원했던 장비들을 내놓고 가라는 것이다. 영민의 활약이 모두 자신들이 내어준 장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믿는 이들은, 돈으로 환산해도 이천만원은 족히 될 D등급 헌터 기본 장비들을 모두 회수하겠다 엄포를 놓아 발목을 잡으려 했다. 이미 영민의 재정상태에 대한 뒷조사도 끝난 상태였겠지.

그 웃기지도 않는 수작에 영민은 쿨하게 장비들을 반납하고 돌아왔다. 코볼트들을 사냥하며 모은 장비들만 해도 그것들보다는 좋았으니까.

채집꾼 선배들과 껍데기에 소주 한 잔 하기로 했던 약속이 못내 걸렸지만 김상식을 만나 인사를 하고, 회식비를 하라며 돈 봉투를 쥐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번 일의 보상으로 천만원이 조금 넘는 포상금을 받은 터라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짧았던 아리랑 길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자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다시 오롯이 혼자다.

그러나 예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남들까지 불행하게 만들던 지독한 불운도 사라졌고 대기업 신입사원과 공무원, 심지어 ‘사’자 돌림을 뛰어넘는 최고의 직업이라는 헌터가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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