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이중 던전 (1)
영민에게 동의도 없이, 입장 던전이 조정되었다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일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입장하는 던전이 바뀌었다. 어차피 일선에서 몬스터를 상대하지 않는 채집꾼이니 별 상관없지 않느냐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위험도가 엄연히 달랐다.
1레벨 던전에서야 몬스터 한 두 마리가 튀어나와도 어떻게든 채집꾼들이 뭉쳐 대응 할 수 있지만 2레벨에서는 간신히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고 3레벨부터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나타나면 그냥 목을 빼고 죽을 수밖에.
그런 만큼 헌터들도 주변 수색을 철저히 해주기는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은 늘 염두해두어야 했다.
“어쩔 수 없어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이니까. 어디보자‥. B등급 헌터 진지한 님의 요청이네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하고 보니 던전 출입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가 자신이 참여하는 던전 공략에 영민을 포함시킨 것. 루키 중에서도 최상급에 해당하는 재능과 능력이니 벌써부터 이런 지시가 가능할 만큼 권력을 손에 쥔 것이다.
“음‥. 알겠습니다. 잘 됐네요.”
그것을 보고 나서야 영민이 수긍했다. 어차피 길드를 떠나기 전 진지한을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그가 이렇게 기회를 주니 오히려 다행이랄까.
“그나저나 지한이 형은 벌써 B등급이 됐나보네.”
진지한이 벌써 B등급이라고? 애초부터 거의 끝자락에 있기는 했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그래도 3레벨 정도라면야‥.”
의아하면서도 다행이라 여겨지는 것은 진지한의 등급과 달리 조정된 던전의 등급이 3레벨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힐러인데다 고등급 헌터인 그라면 최소 5레벨 던전에는 투입이 되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1~2레벨 던전은 D등급, 3~4레벨 던전은 C등급, 4~5레벨은 B등급, 6등급 이상은 A등급 이상이 맡는 게 정석이었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길드일 경우의 이야기이고, 고유 능력이 특출나지 못한 자들이라면 한 레벨 정도 낮춰서 들어가기도 하기야 한다. 그러나 진지한에게는, 아리랑 길드에게는 전혀 해당이 없는 일이다.
결국 뜻하지 않게 진지한과의 만남을 요청해보려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영민은 간단한 주의사항과 준비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이 되자 영민은 간단한 개인 짐과 지갑을 챙겨 아리랑 길드에 일찍 방문했다. 필요 물품을 구입하기 위함이다. 바로 광석을 채굴할 수 있게 해주는 곡괭이와 삽. 그리고 전투용으로 지급 받은 칼로 언제까지 무두질을 할 수 없어 무두질용 칼도 따로 구입했다.
헌터용 아이템이라는 것인지 곡괭이와 무두질용 칼을 구입하는데만 오십 만원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빈털터리. 이번 던전에서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지 못하면 당장 손가락을 빨아야 할 판이니 영민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오, 영민 동생!”
집결지로 이동하자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한 명은 진지한. 또 다른 한 명은‥.
‘오현모. 저 놈이 왜 여기 있지?’
분명 징계에, 매칭이 안되도록 조정을 해준다고 했을 텐데 놈이 이곳에 있는 까닭은 무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피니 놈의 행색이 뭔가 이상하긴 했다.
‘채집꾼?’
오현모의 차림이 기존과 달리 채집꾼의 그것과 같았다. 안에서 사용할 식량과 짐들을 가득 짊어진 모습이 당당하던 이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진작 찾아본다는 게 이거 쉽지가 않네. 이렇게 빡빡할 줄 알았으면 길드고 뭐고 다시 생각해봤을 텐데 말이야. 섭섭한 거 아니지?”
지한이 일개 채집꾼에 불과한 영민에게 친한 척을 하며 너스레를 떨자 주변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이번 던전 공략에서 진지한이 책임자로 왔으니 그와 막역해보이는 영민은 자연스레 2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를 죽일 듯 노려보던 오현모의 표정이 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징계를 받아 기약도 없는 시간 동안 채집꾼 생활을 해야하는 수모를 겪게 한 장본인이 제 발로 나타나다니? 징계 기간 중 문제를 일으킬 시 정말로 난리가 나기는 해도 티 안 나게 괴롭히려 마음 먹었건만 인솔자이자 감시자인, 진지한과 절친한 사이라 하니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 건드렸다가 진지한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한다면 고작 채집꾼 생활을 하는 징계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앞으로의 헌터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꽤 괜찮은 루키라는 평가를 받던 자신과 달리 진지한이라면 슈퍼 루키, 아니 천재 힐러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했고.
영민은 잘 몰랐지만 이미 진지한의 존재는 아리랑 길드 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상태였다.
“예. 형 덕분에 잘 지냈어요. 좋은 분들게 배운 것도 많고, 마나량도 꽤 올랐고요.”
“어? 진짜? 난 또 꼬박꼬박 10일씩 채워서야 던전을 돌고 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역시 괜한 걱정이었구만. 하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다니까.”
역시 이번 만남은 영민을 염려한 진지한의 관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민은 그 마음 씀씀이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아!’
그때,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이상하게만 여겼던 진지한에 대한 기억. 강태성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라 던전에서 불의의 사고를 겪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지한이형이 미스터 진이라니.’
떠오른 것은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발돋움하는 한국약품의 오너에 대한 기억이다. 스스로가 상급 헌터이지만 그저 재미없고 빡빡하다는 이유로 수백억 연봉을 걷어차고 나와 제약회사를 차리고, 의약혁신을 일으켰다는 대한민국 최상위 힐러이자 세계적 제약회사의 오너.
그것은 어떠한 특수한 제품 생산 기법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제작법도 공개하고, 무료로 여러 제품들을 풀기도 했다. 때문에 세부적인 것까지는 몰라도 핵심적인 요체는 강태성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늙어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이 늦긴 했지만 강태성의 기억이 확신 했다.
‘원래도 부자였다고 했고.’
여러 가지 정황이 들어맞았다. 능력이며, 호탕한 성격이며, 애초에 부자여서 그런지 돈 버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제약 받는 것을 꺼리는 것까지.
일부에게는 성자로까지 추앙받던 인물인 만큼 기억을 훑은 영민은 어쩐지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괜찮겠지?’
하지만 한 편으로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큰 인물이 될 사람인데 자신과 얽혀서 불행해지면 어떻게 하지? 이미 행운 Max의 효과를 몇 번이나 보았지만 이십 여년의 트라우마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자, 그럼 다 모인 것 같은데 들어가 볼까요?”
“예!”
한창 잡담을 나누던 지한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말하자 대기하던 인원들이 불만은커녕 힘차게 대답했다.
진지한이 이번 던전 공략의 책임자이자 평가자이기 때문이다. 힐러이기는 하나 카리스마 있던 안철현보다도 윗 등급의 헌터. 그의 말 한 마디, 글 한 줄에 자신들의 평가와 진급이 달려 있으니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 할 지는 몰라도 잘 보이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우렁차게 대답하는 헌터들을 이끌고, 진지한과 영민이 3레벨 던전으로 진입했다.
“어떤 것부터 할까요?”
“으, 응? 아니야. 자네는 그냥 쉬어. 이따 채집 할 때 부를 테니.”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영민은 지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채집꾼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숙련도는 아마도 이 중 최고일 테지만 자신은 아직 던전에 몇 번 진입해보지 않은 신참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숙련도를 공개하고, 정식으로 등록한다면 단번에 부조장, 어쩌면 조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자신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채집꾼들의 반응은 그의 생각 같지 않았다. 채집이라면 돈과 직결되어있으니 모를까, ‘실세’인 그에게 불을 피우고, 텐트를 치라는 말 따위를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전에도 영민이 낙하산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를 꽂아준 인물이 관리자로 동석한 자리에서까지 편하게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자네가 그러면 우리가 불편해. 우리 사정도 좀 봐주게.”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영민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채집꾼들. 그 사이의 미묘한 기류에 영민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부담 드려서 죄송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흥.”
거듭 머리를 숙여 사과하는 영민을 보며 대부분의 채집꾼들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지만 오직 한 사람. 오현모만큼은 부들거리며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영민의 모든 것이 고깝게 보였으니까.
“거기 신참, 놀지 말고 불이나 피워.”
그런 그에게 베테랑 채집꾼 중 하나가 실실 거리며 다가와 일을 주었다. 영민도 해본 적 있는 불 피우기. 그것이 굴욕적이었는지 오현모가 노려보는 타겟을 바꾸었다.
“눈 깔아. 안 깔아? 어디 신입 새끼가.”
“낄낄낄.”
그러나 그는 오현모가 원래 D등급 막바지에 이른 헌터라는 것을 알면서도 갈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징계를 받는 동안 다른 채집꾼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입된 감시역의 채집꾼이었기 때문이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그는 아리랑 길드의 윗선에까지 연이 닿아있어 어지간한 헌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오현모는 이를 악물고 쳐다보다가 몸을 휙 돌려 지정된 위치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타의 모든 신입 채집꾼들이 그런 것처럼 나무와 나무를 비벼서.
“이딴 것 쯤이야 금방이지.”
어디서 본 것은 있는지 제법 그럴싸한 자세를 잡았지만 선배 채집꾼들은 슬쩍 비웃음을 지었다. 그가 달랑 나무 두 개만을 챙긴 것이다. 불을 잘 피우기 위해서는 불씨가 살았을 때 그것을 크게 키울 마른 나뭇가지나 짚을 두는 것이 좋은데 그는 단지 힘으로만 부벼댈 뿐이었다. 당연히 누가 도와 줄리도 없었다.
“이까짓 거!”
간단하게 생각했던 불 피우기 하나로 몇 분을 낑낑대던 녀석은 열이 올랐는지 마나를 움직였다. 자신의 고유 능력인 바람의 힘을 아주 미세하게 발현해서 불이 금방 붙도록 유도했다.
“됐‥‥끄악!!”
그리고 마침내 불이 붙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바람의 힘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불씨를 조금 키운다는 것이, 불기둥처럼 치솟아 버린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실수이지만 감정이 격했던 까닭인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화르르륵!!
덕분에 몸을 숙이고 집중하던 오현모의 앞머리가 홀라당 타버렸다. 아니, 머리가 통째로 익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놀란 채집꾼들까지 달라붙어 물을 부어봤지만 마법적으로 강화된 불꽃인 터라 쉽게 꺼지지도 않았다.
“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영민이 황당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럴수도 있나 싶을 정도의 상황에 자신의 불운이 작용하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영민의 탓도 분명히 있었다. 그가 가진 Max치의 행운이, 그에게 적대적인 오현모에게 반대의 작용을 일으킨 것이었으니까.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영민은 같이 달라붙어 불을 꺼트렸지만 그의 머리털 대부분이 타버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쯧. 어딜가나 고문관은 하나씩 있다니까. 힐!”
그것을 뒤늦게 발견한 진지한이 혀를 차며 힘을 발휘하자 벗겨진 머리를 대신한 화상자국이 빠르게 아물었다.
“이미 타버린 머리와 모근 손상은 나도 어쩔 수 없다. 니 팔자지 뭐.”
그러나 다시 머리가 자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의 상처를 치료했을 뿐, 그의 상태를 불타기 전으로 되돌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화기가 깊게 스몄던 탓에, 어떤 제품을 바르더라도 예전과 같은 머리숱을 바라기는 어려울 터였다.
“내가 대머리라니!!”
“풉! 내가 주문이라도 대신 외워줄까? 자라나라 머리머리!! 푸하하하!!”
진지한이 사라진 자리에는 망연자실한 오현모와 그를 놀리는 채집꾼들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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