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행운의 각성 (3) >
힐러에, 시작부터 끝자락에 닿은 C등급이라니.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불운쯤이 묻는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저 가끔 말동무가 되어주기만 해도 충분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진지한이 계속해서 진짜라고, 자신만 믿으라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사이 마지막 측정을 받을 차례가 돌아왔다.
첫 번째 측정이 마나량을 통해 능력의 강함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측정은 마나의 성질 분류를 통해 능력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 강화계며 변화계, 조작계, 구현계, 지원계 등 자신의 능력 타입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영민처럼 각성은 했는데 자신의 능력을 아직 깨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계열이라도 알아야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며 능력을 발견하고, 또 개발해나갈 텐데 그마저 모르면 정말 맨 땅에 헤딩을 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또 계열이라도 잘 나오면 그나마 등급을 올리기 쉽거나 돈이라도 수월히 벌 수 있다던데….
“응? 이건 또 뭐야?”
그러나 이번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검은색?”
색을 통해 구분이 되는 측정기의 계열분류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색이 떠오른 것이다.
검은색. 전혀 보고된 적 없는 계열이거나 여러 가지 능력이 섞여있거나, 능력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경우에만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는 색이 나타났다.
이건 뭐 이변 덩어리군. 협회측 헌터들의 얼굴에 곤란함이 묻어나왔지만 곧 사라졌다. 너무 능력이 뛰어나서 문제인 것이라면 모를까 이런 경우는 크게 신경 쓸 것 없는 탓이다.
다음은 진지한의 차례. 예상대로 지원계를 뜻하는 보라색이 표시 되었다.
“검은색이라니….”
재수가 없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없을 줄이야. 마나량이 적은 것이야 그렇다 치고,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 수조차 없으면 기껏 헌터가 된 의미가 없었다. 실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찾지 못한 채 전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없지 않다고 하던데….
“측정을 마친 인원은 서류 등록 마치고 돌아들 가세요!”
협회는 냉정했다. 고민하고, 좌절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협회건물 바깥으로 그들을 내몰았다. 영민 뿐 아니라 E등급을 받은 일부 헌터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좀비처럼 떠밀려 나갔다.
금방이라도 난동을 부릴 듯 씩씩대는 이도 있긴 했지만, 자신보다 훨씬 고등급인 헌터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미친 짓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영민 동생, 이쪽이야!”
“응?”
헌터 등록을 마치고 그만 나가보려는 영민을 지한이 불러 세웠다. 스카우터로 보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모양. 굳이 그 틈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쭈뼛쭈뼛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형?”
영민은 슬쩍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지한이 자신을 키워주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오늘 처음 보는 사이였고, 이미 힐러로서 B등급에 육박하는 평가를 받은 그가 정말로 자신을 신경 써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잘 쳐줘야 군대 훈련소 동기 같은 사이가 아닌가? 헤어질 때야 연락하고 지내자며 끈끈한 동기애를 보이지만 곧 자대 배치를 받으면 서로 바빠 떠올릴 시간조차 없고, 곧 이름조차 희미해지는 그런 사이.
“무슨 일이긴, 같이 가야지.”
“예?”
그러나 진지한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갑작스런 발언에 당황해하는 것은 영민 뿐이었다. 나머지 인물들에게는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는 소리.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지한이 하던 이야기를 마저 건넸다.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친구까지 키워 줄 수 없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흐음….”
스카우터들의 눈길이 영민을 훑었다. 시선이 피부를 타고 오르는 것만 같은 찌릿한 기분. 뱀 앞의 개구리처럼 잔뜩 굳은 채 몸을 떠는 영민에게서 시선을 거둔 스카우터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수락 의사를 밝혔다.
“좋아. 받아들이지.”
“우리도 받겠다.”
“이래서야 원점이군. 우리도다.”
결과는 모두가 수락. 시작부터 B등급에 육박하는 고위 힐러를 모셔 가는데 짐짝 하나 정도 얹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헐. 백사자단에 골든 크로스, 아리랑 길드라고?’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만 깜박이던 영민은 곧 그들의 옷에 붙은 마크들을 확인했다. 대한민국에서도 내노라하는 길드들의 표식. 지한은 루키들 중에서도 어지간히 실력이 있지 않고서는 가입하기 힘들다는 곳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끼워 파는 조건으로.
“그럼 더 자세한 조건들을 맞춰볼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업용 미소를 띄운 지한은 놀라는 영민에게 윙크를 깜박해주고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종의 연봉 협상과 같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일진데 지한은 굳이 숨기거나 개별 면담 따위를 진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본인이 내키는 대로 말을 내뱉으며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은근히 서로를 부추겨 경쟁을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해봅시다.”
결국 십여 분만에 결론이 났다. 승자는 아리랑 길드. 금액적인 부분에서 내건 조건들은 대게 비슷했지만 복지 부분에서 더 확실한 카드를 제시한 덕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영민도 얼떨떨해하며 계약서를 함께 작성했다. 물론 지한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조건이고, 계약서의 종류 자체가 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아리랑 길드의 산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E등급도 아닌 F등급의 헌터 주제에.
‘지한이 형 덕분인가?’
비록 아리랑 길드에 직접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관리하는 지원부서와 계약을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런 행운이 자신에게 오다니, 영민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변의 원인이 지한인 것만 같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으으, 영민 동생. 이거 어쩌지? 난 이 양반들이랑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계약을 마친 뒤 스카우터와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던 지한이 곤란한 표정으로 영민에게 사과했다. 같이 한잔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다.
고등급의 루키로 길드에 가입했으니 인사를 다녀야 하는게 당연했다.
“아, 전 괜찮아요.”
“그래. 내가 곧 연락할 테니까 한잔 하자고!”
“예. 고마워요. 형.”
영민은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인사한 뒤 지한을 먼저 보냈다. 사실 영민도 그냥 집에 갈수는 없었다. 일단 아리랑 길드 소속으로 들어온 이상,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네가 권영민인가?”
“예. 맞습니다.”
“따라오게.”
스카우터가 부른 것인지 지원부서에서 나온 인물이 곧 영민을 찾았다.
그는 영민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여기는….”
아리랑 길드의 사옥이었다. 정확히는 아리랑 길드의 사옥 옆에 붙어있는 부속 건물이지만.
“이쪽으로 오게.”
부속건물이라고는 해도 크기가 제법이었다. 국내 탑 10 안에 드는 유명 길드의 전담 지원팀이니 그 세가 약할 리 없었다. 지원부서라는 업무 자체의 위상이 낮을 뿐, 그들이 가난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인사가 늦었군. 난 김도훈이라고 하네. 앞으로 김팀장님이라고 부르게.”
“예. 김팀장님.”
서재 같은 어떤 방으로 영민을 데려온 김도훈은 뒤늦은 인사를 나누고 책장에서 책 몇권을 꺼내 영민에게 휙휙 던졌다.
“이건….”
“자네. 지원부서가 하는 일을 아나?”
“예. 대충은….”
“그럼 이야기가 쉽군. 익히게.”
“예?”
“그 스킬북들. 익히게. 여러번 이야기하게 하지 마.”
꽤나 냉정한 사내였다. 머뭇거리던 영민은 그가 던져준 책, [스킬북]들을 펼쳐 읽었다.
[일반 스킬 : 채광을 익히시겠습니까?]
[일반 스킬 : 약초채집을 익히시겠습니까?]
[일반 스킬 : 무두질을 익히시겠습니까?]
글자 반, 그림 반인 스킬북을 끝까지 읽으니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어떻게 해야하지? 슬쩍 눈치를 보다가 YES라고 적힌 버튼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자신에게만 보이는 하얀 빛무리와 함께 스킬북들이 사라졌다.
“다 익혔으면 나가서 접수계에 이름 올리고, 원하는 일정으로 던전 진입 신청하고 돌아 가. 새로운 루키의 부탁이 있어서 등급업에 대한 지원을 최대한 해주기야 하겠지만 기본은 알아야 할 테니 채집꾼으로 시작해야 할 거야.”
영민이 낙하산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김팀장은 까칠하기만 했다. 귀찮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어 그를 물러나게 하고 쇼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럼 안녕히….”
그 상황에서 영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머리를 숙이고 방을 나서는 것밖에 없었다.
“채광, 약초채집, 무두질이라….”
방문을 조심히 받고 밖으로 나온 영민은 조금 전 자신이 익힌 스킬들을 되뇌었다.
던전에서 아주 드물게 드랍되는 아이템, 스킬북. 이 스킬북은 헌터 개인의 고유 능력과 관계없이 특정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이 담긴 스킬북은 값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비쌌고,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는 [스킬북 = 금덩어리]라는 공식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영민이 받은 스킬북은 달랐다. 그저 생활기술의 요령을 조금 터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명 ‘생산직 스킬북’이다.
어쩌면 있으나마나 한 능력들.
예를 들어 ‘채광’ 스킬의 경우, 이걸 익힌다 한들 숙련된 광부보다 채광을 잘하거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헌터만이 던전에 입장 할 수 있고, 그 안에 있는 자원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익힐 뿐이다. 추가로 좋은 점이라면 연계 상위 생산 스킬을 익힐 수 있게 해주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는 정도랄까. 이를 테면 약초 채집을 익혀야 연금술을 익힐 수 있고, 채광을 익혀야 대장술을 배울 수 있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까진 무리겠지.”
기본 채집 스킬북은 개당 백만원 수준으로 비교적 저렴하지만 연금술 등의 상위 스킬은 아니다. 스킬북 하나당 수천만원에 거래가 되었고, 무엇보다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가 극악했다. 재료가 되는 채집물들을 개인이 채집하거나 구매해서는 답이 없으니 보통은 길드에서 전문적으로 연금술, 대장술, 가죽세공 등을 익히는 인원을 두고 지원을 해줬는데 아무리 지한의 부탁이 있다고는 하나 영민이 그러한 존재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숙련도가 필요한 스킬인 만큼 한 길드당 ‘제작자’는 많아야 한 가지 스킬 당 두셋 정도인 것이 고작이니까. 그러니 그들이 죽지 않는 이상 새롭게 제작자를 양성할 일은 없었다.
더구나 제작자들은 채집해온 채집물로 물건을 만들기만 할 뿐, 안전을 위해 직접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접수계라고 했지?”
스스로에 대한 주제파악을 누구보다 잘 하는 영민은 공연한 욕심을 떨쳐버리고, 김팀장이 이야기했던 접수계를 찾았다.
< 4화 - 행운의 각성 (3)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