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74화 (174/175)

174. 쉼표

언제나 김대한은 자신의 자아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달라진 삶에 익숙해지면서도 늘 자신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김대한’이라는 자아는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몸은 유수한이라 할지라도 ‘김대한’의 영혼은 살아 있었기에.

[넌 죽었어.]

다시 몸집이 커진 김대한이 유수한을 보며 말했다.

[술 먹고 물에 빠진 너는, 그날 죽을 운명이었어.]

지금 이 순간, 김대한은 [체인지 라이프]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수한의 숨이 끊어지던 순간, 김대한 역시도 생을 마감했다.

[허, 너는? 너도 죽었잖아! 넌 육신조차 없어!]

그렇다.

두 사람은 같은 날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난 너와 달라.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김대한은 간절했다. 죽는 그 순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졌다. 추운 겨울, 길 바닥에서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었다. 김대한이 [체인지 라이프]를 통해 기회를 얻은 건, 강렬한 열망 덕분이었다.

유수한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오만하게 살며 죄를 지었고 그에게 주어질 기회 따위는 없었다. 유수한이 죽음을 맞이한 건 운명이었다. 김대한이 다시 삶을 부여받은 것처럼.

[인정해.]

김대한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추레하고 더러운 노숙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은 김대한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주었다. 스스로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삶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순간을 안겨 주었다.

유수한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던가?

늘 풍족한 삶을 살았던 그는 타인에게 상처만을 안겨 주던 사람이었다. 유수한은 겉으로는 고귀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바닥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유수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넌 분에 넘치는 인생을 살다가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한 거야.]

김대한이 손을 뻗었다. 어느새 먼지만큼 작아진 유수한은 그 손길을 피할 길이 없었다.

[가.]

콱.

손을 움켜쥔다. 짧게 유수한의 비명 소리가 울리는 듯했지만, 그 소리는 순식간에 멈췄다. 움켜쥔 손 틈 사이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갈기갈기 찢어진 유수한의 혼이 비로소 완벽하게 소멸하고 있었다.

[돌려줄 생각 없어.]

* * *

꼬박 사흘을 잠들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김대한은 유수한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김대한은 이제야 몸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었다. 질기게도 살아남았던 유수한의 혼이 완벽하게 소멸되었고, 몸의 소유권이 김대한에게 온전히 주어졌다.

‘체인지 라이프는 일처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그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정당하게 포인트를 개처럼 쌓아 ‘본품 구매’를 했다. 그렇기에 유수한에 대한 소유권은 김대한에게 있었다. 하지만 [체인지 라이프]도 예상하지 못한 오류가 생겼다. 그 오류를 직접 해결한 유수한이었다.

눈부신 빛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유수한이 눈살을 찡그렸다. 두통이 느껴졌다. 며칠 동안 잠에 빠져 있던 몸은 생각보다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저씨!”

유수한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도움을 주면서도 만나기를 거부했던 아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채연.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고 지금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기에 아이가 성장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유수한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괜찮아요?”

“덕분에.”

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유수한이 어린 남매를 만나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과거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과거, 김대한이었던 시절이 늘 유수한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초라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기를 쓰고 노력해 왔다.

어린 남매는 언제나 그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쉽게 말하자면 김대한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채민이가 좋아할 거예요.”

“그래?”

유수한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쓰러졌다고 울고불고 난리였거든요.”

오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도움을 주면서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었다. 그랬음에도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을 위해 울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유수한은 말없이 이채연을 보았다.

“채민이가 아저씨 되게 좋아해요.”

“그래? 고마워.”

“저도 아저씨가 싫지 않아요.”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동생이었던 이채민은 스스럼없이 마음을 여는 성격이었고 누나인 이채연은 경계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그래도 무서웠어요.”

이채연이 유수한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죽기 전에 돈 갚아야 하는데, 죽을까 봐 무서웠어요.”

그 말에 유수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틈만 나면, 돈 갚을 거라고 모두 계산하고 있다고 매니저에게 말해 놓던 성격다웠다. 하지만 이 아이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유수한의 과거를 기억해 준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 이제 갈게요.”

“벌써 가려고?”

“아저씨 제 얼굴 보는 거 싫어하잖아요.”

“싫지 않아. 그냥 조금 무서웠을 뿐이야.”

“왜요?”

말간 얼굴로 되묻는 채연을 유수한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유수한이 호출 벨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너희 남매는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알고 있거든.”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괜찮아. 네가 이렇게 찾아와 준 덕분에 극복하게 됐어.”

그 말에 이채연은 영문 모를 표정이었다. 유수한은 더 말을 하지 않았고 호출 벨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유수한은 의사보다 먼저 뛰어 들어오는 매니저를 보았다. 김민수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매달고 있었고 뒤에 따라 들어오던 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잠시 병원을 비웠던 부모님까지 상기된 표정으로 달려왔다.

“수한아!”

덥석, 몸을 끌어안는 모친을 보며 유수한이 작게 웃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넘친다. 유수한은 우는 사람들을 달래며 웃었다. 며칠 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던 사람답지 않은 의연한 모습이었다.

* * *

[OKEN][단독] 사흘 만에 의식 회복한 유수한 …… “몸 상태 괜찮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

기자들이 병원에 진을 치고 있다더니, 눈을 뜨기 무섭게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유수한은 기사들을 확인하며 이제야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내가 언제 죄송하다고 했어?”

“하긴 하셨죠. 팬사이트에.”

“아.”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유수한이 그런 말을 한 것처럼 기사 타이틀을 만들었다. 유수한은 정신을 차리고 진료를 받은 후, 바로 팬사이트에 접속했다. 그 누구보다 유수한을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형, 진짜 다행이에요. 저는 형이 죽을까 봐, 진짜 무서웠어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냐.”

사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평생 살 것 같다가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게 사람이었다. 길 가다가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었고 운 더러우면 벼락에 맞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진짜 유수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술 먹으며 놀다가 죽었다. 만약 그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사람은 쉽게 죽는다. 지금 이렇게 숨 쉬고 살아 있더라도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른다.

“정말 오늘 퇴원하실 거예요?”

“어.”

“사흘이나 혼수상태였는데요?”

“몸에 이상 없잖아.”

유수한은 지금 당장이라도 병원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듣기로 유수한 모친은 수영장에 귀신이 씐 게 분명하다며 당장 정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 말에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수영장에는 악귀가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을 안다면 유수한의 부모는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모르는 게 약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유수한 부모는 충격으로 쓰러질 테니까.

“당분간 본가에 있을 생각이야.”

이번 일로 유수한은 많은 것에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효도해야 할 것 같아.”

유수한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흘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은 녹이 슨 것처럼 삐걱거렸다. 허리를 굽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몸에 뻐근함이 느껴지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 통증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에 갈란다.”

유수한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병원은 답답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얼굴에 느껴지는 따스함에 미소가 지어진다.

당분간은 작품 활동 없이 쉬기로 했다. 유수한은 한동안 본가에 머물며 몸 회복에 집중했고 일에 관한 일은 잠시 잊었다.

“두 분께 할 말이 있어서요.”

본가에 머무른 지 어느새 보름. 유수한의 부모는 일도 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사랑하는 자식이 생사를 오가는 모습을 보는 건 지독한 고통이었다. 유수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은 주님께 감사함을 표현했다. 딱히 종교도 없었으면서 급할 때 찾는 건 역시 종교만 한 게 없었다.

“여행 가요.”

유수한은 이 삶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불편하다고 외면하던 것을 똑바로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도 자아는 ‘김대한’이었지만, ‘유수한’이라는 삶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수한으로서 해야 할 일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이대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나중에 굉장히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을 때, 가족이라 느껴지는 이 사람들을 챙겨야 했다.

“엄마도 알겠지만, 내가 유명한 배우잖아.”

이미 모친의 얼굴은 활짝 폈다. 하지만 아들의 건강이 걱정되는지, 눈빛이 음울했다. 유수한은 그런 엄마를 달래며 말했다.

“그래서 하와이로 갈까 하는데.”

“너 몸은…….”

“괜찮아. 그냥 잠깐 지독한 악몽을 꾼 거뿐이야.”

“무슨 악몽을, 엄마가 굿이라도 좀 할까?”

“제발.”

유수한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거 할 생각 하지 마.”

큰일 날 소리였다.

무속신앙을 믿지 않지만, 혹시나 용한 무당이 걸려 몸속에 있는 영혼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눈치라도 채면 큰일이다.

“하와이, 휴양지잖아. 거기서 길게 쉬고 싶어서 그래.”

유수한의 말에 모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여행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릴 때는 싫다는 아들을 끌고 여기저기 여행을 떠났었는데, 지금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었다. 늘 밖으로 돌기 바쁜 아들이 함께 여행을 가자 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며 쉬고 와요.”

항상 유수한은 일에 치여 살았고 번 돈은 기부하기 바빴다. 자신을 위해 돈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늘 자신은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조금씩 유수한은 성장하고 있었다. 배우로서도 성장했지만, 어딘가 결핍이 존재하던 내면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유수한은 잠시 ‘쉼표’를 찍었다. 인생은 길었고 ‘쉼표’ 없이 달리다가는 언제 고꾸라질지 몰랐다. 그렇기에 추진력을 얻기 위해, 잠시 쉬어 가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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