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이제 돌려줘
영화 ‘마지막 겨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입소문이 퍼져 계속 관객이 영화를 찾았고, 성큼성큼 천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개봉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상영관에는 ‘마지막 겨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반 무섭게 치고 오르던 기세는 꺾였지만, 아직도 관객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사흘 전에 900만 명을 돌파했다.
[연예뉴스] 올해 첫 천만 영화 탄생! ‘마지막 겨울’ 한국 영화 자존심 지켰다
시간이 갈수록 국내 영화는 해외 블록버스터에 밀리고 있다. 히어로물이라고 불리는 외국 영화는 돈을 쏟아부은 것답게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영화 티켓값은 날이 갈수록 비싸지고 있었고 예전처럼 단돈 만 원으로 영화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본다면 확실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한다.
그게 해외 블록버스터였다. 화려한 볼거리와 단순한 스토리라인, 복잡하지 않기에 머리가 아플 일도 없고 확실한 즐거움을 준다. 그 사이에서 영화 ‘마지막 겨울’은 선전했다. 흥행에 성공했고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국내 영화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이걸 가져가야겠다.”
이틀 전, 유수한은 영화사에서 연락 하나를 받았다. 지금 추세를 보아 천만 관객이 확정되었으니 작은 파티를 열겠다는 연락이었다. 참석 여부에 유수한은 순간 망설였다. 주연도 아니었고 조연도 아니었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기에 참석해도 괜찮은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 또 이렇게 천만을 달성한 영화가 있을까 싶어서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와인도 하나.”
유수한은 말끔한 옷차림으로 기념으로 가져갈 술을 고르고 있었다. 기존 유수한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따로 술 창고가 있을 만큼 값비싼 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천만 관객 기념 파티인 만큼 참석자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술도 넉넉하게 챙기는 유수한이었다.
“어차피 혼자 술 마실 일도 없으니까.”
유수한은 필요한 때가 아니면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존 유수한이 쌓아 놓은 술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두는 것이 아까워서 필요할 때 한 병씩 챙겨 나가고는 했었다. 어떨 때는 선물로도 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술을 치우고 있는 유수한이었다.
“여름이네.”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다.
일부러 차를 끌고 가지 않았다. 파티인 만큼 한 잔 정도는 마셔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 연예인이 되고 나니 대리운전 부르는 게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
“어, 왔어?”
매니저가 차를 끌고 나타났다. 그 안에는 스타일리스트 보라도 함께 있었다. 이번 파티에는 김민수와 보라도 함께했다. 가끔 유수한은 함께하면 좋을 자리에 두 사람을 대동하고 다녔다.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파티였으니 맛있는 음식도 있을 것이다. 유수한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 주는 사람들인 만큼 이런 자리는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았다.
유수한은 늘 함께하는 사람들을 챙긴다. 김대한에서 유수한이 되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잘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가끔 연예인은 함께 하는 스태프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유수한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배우로서 빛날 수 있는 건, 그 배우를 서포트하는 사람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자만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둘 다 오늘 차려입었네?”
“당연하죠. 파틴데!”
보라가 웃으며 말했다. 보라는 늘 입던 편한 캐주얼 차림이 아닌, 데이트할 때나 입을 법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방은 유수한이 선물로 준 G사 명품 가방이었다. 보라뿐만 아니라, 김민수도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김민수의 정장 차림이 은근 어색한 유수한이었다.
“너도 무슨 일이냐?”
유수한의 말에 김민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형이 TPO 지켜서 다니라면서요.”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가끔 매니저들은 옷을 대충 입을 때가 있었다. 정신없이 현장을 뛸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그 상황에 맞는 옷을 입는 게 중요했다. 유수한이 없을 때는 매니저가 곧 유수한이었다. 유수한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여러 상황을 조율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상황에 맞춰 옷을 입으라며 정장 몇 벌을 사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장 중에 하나를 입고 온 김민수였다.
“잘했다.”
조금씩 김민수는 자신의 위치에 익숙해질 것이다. 지금은 팀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장도 될 것이며 조금씩 위치가 올라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편한 차림보다 격식을 차린 옷이 더 편해질 순간이 올 것이다.
“형, 천만 축하해요.”
“특출인데, 뭘.”
“에이, 형 분량이면 특출 이상이죠.”
그 말에 유수한이 피식 웃었다. 분량이나 존재감을 보면 특출 이상은 맞았다. 유수한이 백이현 역을 선택했기에 분량이 조금 더 늘긴 했다. 하지만 백이현을 존재감 있게 만든 사람은 유수한이었다. 유수한이 연기를 잘했기에 백이현이 빛났다.
“청담동 호텔이라니. 돈 냄새 오지고요.”
차에서 내린 보라는 신난 눈치였다. 벌써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다. 사실 이 청담동 호텔은 유수한의 것이었다. 천만 기념 파티는 즉흥적이었기에 급히 장소를 찾는 것 같아, 호텔 일부를 대관해 주었다. 물론 값을 받았지만 저렴한 수준이었고, 모두 기부했다.
“수한 씨, 어서 와요!”
입구에서 유수한을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영화사 대표와 주 감독이 유수한에게 걸어왔다. 유수한이 미소를 짓는다.
“덕분에 파티 장소 잘 구했어요.”
“아니에요. 이 정도 가지고요.”
“수한 씨 덕분에 멋진 곳에서 파티하는 거라니까? 저 대표 양반이 얼마나 돈에 인색한지 알아? 무슨 사무실에서 파티를 하자 그랬다니까.”
“아, 정말요?”
“진짜. 수한 씨가 싸게 빌려줘서 가능한 거야.”
오늘 파티는 호텔 옥상에서 이루어진다. 넓은 수영장이 있고 크기도 제법 커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파티 준비가 끝난 옥상에는 먹을 것이 가득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크다. 유수한은 기념으로 가져온 술을 주 감독에게 주었다.
“오늘 함께 나눠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아니. 장소 제공으로도 충분한데, 뭘 이런 걸 가져왔어요?”
말과 다르게 주 감독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지금 그는 유수한을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다는 감정을 눈빛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전체적인 영화를 끌고 갈 원톱 주연 캐스팅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지만, 유독 ‘백이현’ 역할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주연도 아니고 특별출연. 사실 이 배역은 조연이었다. 하지만 연거푸 캐스팅 거절을 당하자, 아예 특별출연으로 변경하며 전략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캐스팅이 난항이었다. 사실 유수한은 기대도 안 했다. 그저 주해원에게 밀리지 않을, 적당히 어울릴 만한 남배우를 찾았고 그게 쉽지 않자 조금씩 눈이 낮아지고 있던 순간에 유수한이 굴러왔다.
말 그대로 복덩이였다.
“이런 순간에 연설은 짧게 해야 좋겠죠?”
파티 주최자, 영화사 대표가 마이크를 들고 연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가볍게 샴페인 한잔을 하며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스태프와 배우 여러분이 고생한 덕분에 우리 영화 ‘마지막 겨울’이 천만 관객을 달성했습니다.”
영화사 대표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늘은 좋은 날이었고 연설은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꿋꿋이 마이크를 들고 연설을 이어 가던 대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네, 역시 제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군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인 영화사 대표는 재벌 3세였다. 그러나 재벌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가 없었다. 영화가 좋아서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재능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아예 영화사를 차렸다고 한다. 그는 생각보다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었고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인 듯 보였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즐겁게 놀고 마시고 먹으며 영화 ‘마지막 겨울’을 기념합시다!”
그 말을 끝으로 영화사 대표가 내려왔다. 생각해 보니, 재벌 정도나 되면 대관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경영을 하다 보면 쓸데없는 돈을 아끼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모양이다.
“위스키 한잔하세요. 수한 씨가 가져온 겁니다.”
주 감독이 아예 웨이터처럼 위스키를 나눠 주고 있었다. 유수한은 샴페인 한 잔을 이미 하고 있었고 더 마실 이유가 없어 자리를 피했다.
넓은 수영장이 햇빛에 반짝였다. 날이 더워지고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있었지만, 한 시간 정도면 곧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시간이었다.
“…….”
샴페인을 천천히 마시며 수영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흥겨운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으며 배경음악은 ‘마지막 겨울’ 수록곡이었다.
유수한은 이 자리에 있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화려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김대한이었기에, 가끔 이런 파티가 있으면 정신적으로 피로함을 느꼈다.
[--?]
고요한 물을 쳐다보고 있던 유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내 –을 ---- 좋아?]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듯하는데,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로 주변을 둘러본다. 귀는 먹먹했지만, 주변은 여전히 분위기가 같았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고 웃으며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좋아?]
유수한이 고개를 돌린다.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이 눈에 보였다.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숨이 막힌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내 몸을 빼앗으니 좋아?]
선명해진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섬뜩하면서도 익숙했다. 유수한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유수한?”
그 말에 웃음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려 퍼졌다.
[맞아.]
유수한이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떨어뜨렸다. 쨍,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유수한은 수영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물에 보이는 유수한에 섬뜩함을 느낀다.
[유수한, 그게 나야.]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뭔가 마뜩잖은 얼굴로 유수한, 아니, 김대한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뒷걸음질을 치던 유수한은 술에 취한 어떤 사람에게 밀려 비틀거렸다. 평소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오늘은 알 수 없는 힘에 몸이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내놔.]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유수한은 물길이 자신의 몸을 휘어 감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마치 유수한이 물에 빠지기를 바라는 듯했다.
[내 몸.]
아득해지는 의식, 유수한은 짧게 떠올렸다.
[이제 돌려줘.]
여기 이 호텔 수영장은 기존 유수한이 술에 취해 빠져 죽었던 그 장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