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면
한국은 격렬한 독립운동을 진행한 유일한 나라였다. 독립에 대한 염원이 강렬했고 민족성 역시도 강했다.
윤화진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터트리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극렬한 시위를 통해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를 거부한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조선의 주권을 다시 돌려 달라.
「…….」
백이현은 침묵을 지킨 채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윤화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게 되면 이미 포기한 이 삶에 미련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다.
「찾았습니다.」
집 안 수색이 끝났다.
이미 윤화진은 물건을 정리한 상태였다. 오늘 죽음을 각오했으니, 당연히 윤화진에게서 나오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백이현은 달랐다. 작정한 사람처럼 밀서를 꾸며 숨겨 두었고, 총이나 날카로운 나이프 같은 무기들도 더러 나왔다.
「허.」
거짓된 밀서에는 윤화진이 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윤화진이 했던 모든 일을 마치 백이현이 한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백이현은 모든 것을 뒤집어쓸 생각이었다. 윤화진은 기나긴 겨울이 끝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었기에, 여기서 죽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백이현은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남자를 잘못 골랐군.」
혀를 차는 소리.
윤화진이 일본 경찰 손에 들려 있던 밀서를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한 윤화진이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경찰은 그 모습을 딱하게 바라본다. 힘이 있는 집안의 고명딸이 남자를 잘못 만나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 무척 가엾다는 듯 보였다.
「끌고 가.」
무릎을 꿇은 백이현이 일본 순사에 의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윤화진이 지켜보고 있었다. 백이현은 윤화진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끌려간다.
윤화진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백이현을 바라보았다. 백이현 때문에 울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백이현 때문에 슬픔에 괴로워하며 가슴을 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백이현,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과거, 백이현에게 했던 날카로운 말들이 모두 되돌아온다.
[그때, 버릴 거야.]
비수가 되어 윤화진의 가슴이 꽂힌다. 그대로 주저앉은 윤화진은 눈물을 쏟아 냈다. 여전히 일본 순사가 집을 들쑤시고 있었고, 사람들을 끌고 가는 그 소란 속에서 윤화진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남자를 잘못 만난 게 분해서 우는 거라 생각했다. 마치 그런 모습처럼 보였기에, 윤화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기에, 윤화진은 서럽게 울음을 토해 낼 수 있었다.
* * *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경민도 마찬가지였다. 백이현의 최후를 지켜보다 결국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슬플 거라는 생각에 휴지를 챙기긴 했지만, 백이현의 끝이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아, 진짜 저런 역할도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거야.’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여도 백이현이 미울 때도 있었다. 초반, 구걸하는 조선인이 더럽다며 피하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손이 닿았다고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도 싫었다. 하지만 그런 백이현이 윤화진을 통해 변하는 모습이 좋았다.
조선인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가는 그 과정을 유수한이 연기로 잘 표현했다. 빌드업하듯 백이현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고 끝내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봄이네.」
윤화진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전 고고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윤화진의 눈빛은 여전히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이따금씩, 윤화진은 백이현을 추억한다. 그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화진은 한동안 지독한 열병에 시달려야 했다.
「당신은 추운 겨울에 떠났는데.」
나이를 먹은 윤화진은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백이현은 윤화진을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했고 윤화진에게 온 마음을 다 주었다. 하지만 윤화진은 아니었다. 윤화진은 백이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치관이 다른 그를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다.
「왜 봄만 오면 당신이 생각날까.」
윤화진은 질기게 살아남았다.
백이현을 잃은 충격에 시름시름 앓았던 윤화진은 결국 열병을 이겨 냈다. 이대로 조선에 머물 수가 없었던 윤화진은 모든 것을 놓고 만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독립활동을 이어 나가며 이따금씩 백이현을 생각했다.
변절.
애초에 윤화진은 조선인에게는 변절자였다. 그러나, 일본도 윤화진더러 변절자라고 말했다. 듣기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고 한다. 예비 사위가 총독부를 습격하여 일본 형사를 4명이나 사살했고 집안 가산을 팔아넘겼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윤화진이 행한 일이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 상황에서 딸이 독립군이 되어 떠났다.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진행했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숨은 질기게 붙어 있었다.
「봄이 왔어.」
꽃잎이 윤화진의 손바닥에 떨어진다.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면.」
나무에 기댄 윤화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백이현.」
부족한 것 없이 살았던 지난날, 지금은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고 있는 윤화진이었다. 이미 집안은 도륙된 지 오래였지만, 이 자리에 계속 살아 있는 윤화진이었다.
윤화진은 나이를 먹는다. 젊은 날은 이제 조금씩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선명했던 기억 속 백이현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날 다시 사랑해 줄까…….」
백이현을 사랑했다.
그저 그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을 뿐.
* * *
[빛유/자유] 이건 그냥 특출 수준이 아니잖아! ㅅㅍㅈㅇ +48
눈가가 붉어진 이경민은 영화관에서 나오며 팬사이트에 글을 썼다. 특별출연이었기에 분량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비중은 분량 그 이상이었다.
백이현의 서사는 덕후를 울리게 한다. 그건 유수한의 팬이었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주인공이었던 윤화진과의 관계성도 덕후를 울린다.
그 증거로.
[HOT] 원래 망한 사랑이 맛있는 거 알지? 백이현X윤화진 서사 맛 좀 봐 +578
백이현과 윤화진의 서사를 영업하는 글이 대형 커뮤니티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개봉 첫날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하나둘 본 사람이 있었고, 예고편을 토대로 백이현과 윤화진의 서사를 영업하고 있었다.
- 둘이 진짜 존맛이야 망한 사랑 존맛탱
- 나 영화 보고 왔는데 진짜 눈물 질질 짬 ㅠㅠㅠㅠㅠㅠㅠ
- 둘 서사 진짜 개맛있더라 조만간 2차 찍을 예정
- 둘이 지금 태어났으면 알콩달콩 잘 살았을 텐데
└ 222 ㅇㅈ
└└ 3333 지금 태어났으면 연애 결혼 쌉가넝
└└└ 44 하필 그때 태어나서 망사 됐잖아 ㅠㅠㅠ
이경민은 1차를 회사 근처에서 보았고 2차는 집 근처 C사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두 번째 봐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백이현이 피로 물든 셔츠를 입고 무릎을 꿇고 있을 때는 슬퍼서 울었다가, 또 그 모습이 섹시해서 울었다. 덕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마음을 울리는 포인트를 찾고 있었으니.
- 윤화진 완전 후회여주 아니냐?
└ 완전 후회여주
└└ 좋아하는 거 뒤늦게 깨달은 거 봐
└└└ 덕분에 데굴데굴 굴렀잖아
└└└└ 백이현에게 했던 말들 생각하면서 우는데, 진짜 후회공 뺨 치더라 ㅋㅋㅋㅋㅋ
- 그것도 그건데, 둘이 연기 너무 잘해.... 엄청 울었다
└ 22 둘이 진짜... 연기로 싸우던데?
└└ 3333 백이현 꼴보기 싫다가도 윤화진 앞에서 빌빌 기는 건 또 불쌍하더라
└└└ 44 백 진짜 나카무라 ㅇㅈㄹ 떨 때는 가증스러웠어
└└└└ 5555 초반 백이현 친일파 연기 정떨어져 얼굴이 잘생겨도 쉴드 불가 ㅋ
└└└└└ 66 윤화진이 백이현 꼽 주는 거 졸라 좋아 ㅋㅋㅋㅋ
이경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수한은 연기를 정말 잘한다. 천의 얼굴 같았다. ‘나카무라 현’이라면서 친일 짓을 할 때는 굉장히 얄밉고 가증스럽다가도 윤화진 앞에서는 다른 얼굴을 했다. 사랑을 갈구하는 애달픈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가 서서히 생각이 바뀌는 연기는 또 자연스러웠다.
- 천만 각 ㅋ ㅇㅈ?
└ 말해뭐해 ㅋㅋㅋㅋ
└└ 쌉가넝
└└└ ㅇㅈㅇㅈ
└└└└ 완전 가넝
이경민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 댓글에 공감했다. 소재도 좋았고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연출도 좋았으며 여러모로 천만 관객을 동원할 만한 영화였다. 특히 이경민은 이번 영화에 푹 빠졌다. 그동안 못 본 유수한의 모습이었고 또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해서 10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듯했다.
[연예뉴스] 영화 ‘마지막 겨울’ 개봉 닷새 만에 200만 명 돌파 …… 인기 요인은?
조금씩 영화 ‘마지막 겨울’은 상영관이 늘어 가고 있었다. 초반 해외 블록버스터 영화에 밀려 생각보다 적은 상영관은 받았던 ‘마지막 겨울’이 입소문을 타며 인기가 오르자, 여기저기서 상영관을 늘리고 있었다.
유수한 역시도 한 번 더 영화를 관람했다. 심야였고 특별관이라 사운드가 좋았다. 연기한 모든 배역을 사랑하지만, 백이현은 특별했다. 언제 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OKEN] 주연 못지않은 특별출연, ‘마지막 겨울’에서 보여 주는 유수한의 존재감
유수한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특히 백이현과 윤화진의 서사가 반응이 좋았다. 백이현의 분량은 적었지만, 유수한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원톱 주연이었던 윤화진 역할의 주해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전체를 끌고 가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주해원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기어코 해냈다.
[연예이슈] 주해원, 영화 초반 백이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해원은 유수한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뭐든 초반 분위기가 중요했다. 초반, 유수한의 존재감이 없었다면 이렇게 흡입력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지 미지수였다. 유수한과 붙는 모든 장면이 좋았다. 윤화진의 날카로운 모습을 백이현이 잘 받아 주었고 그렇기에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었다.
[윤화진은 사실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걸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조선인으로서 자존심도 강하죠. 알다시피, 백이현은 친일파였잖아요? 그가 잘생겼든, 다정한 사람이든, 그건 윤화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끌렸다고 해도 백이현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그를 사랑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 마음이 무너지는 거죠. 그런 감정선을 만드는 게, 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유수한은 천천히 주해원의 인터뷰를 읽어 보았다.
[백이현이 사랑할 만한 남자였다는 사실에 설득력이 없으면 윤화진의 감정도 설명이 안 돼요. 그래서 놀랐어요. 유수한 씨는 백이현의 치졸한 모습을 가감 없이 연기하면서 윤화진에 대한 순정은 또 다르게 연기했거든요. 그냥 백이현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윤화진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음, 나도 인터뷰 하나 해야 하나.”
좋은 소리를 듣고 나니, 조금 머쓱했다. 과한 칭찬을 받는 듯한 느낌. 하지만 주해원과의 호흡은 좋았다. 주해원이 만들어 낸 윤화진이 가끔 생각날 정도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영화에 대한 반응을 찾아보던 유수한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기지개를 켰다. 날은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다.
이러다 어느 순간, 여름이 찾아올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