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백이현의 얼굴이 다가왔다.
윤화진은 백이현의 행동에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백이현은 윤화진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다. 억지로 끌어안거나 입술을 맞추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갑자기 들이친 일본 순사를 속이기 위해서일 것이었다.
입술을 맞추는 백이현의 손이 떨린다. 윤화진의 얼굴을 붙잡은 그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윤화진은 슬몃 미소를 지으며 백이현의 셔츠를 풀어 헤쳤다. 정욕에 지배당한 여자가 된 것처럼, 백이현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입맞춤에 화답했다. 그리고 그 행동이 백이현은 더더욱 바닥으로 내몰았다.
「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입술을 뗀 백이현이 몸을 틀어 일본 순사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 그렇기에 그 순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백이현은 말없이 그 순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조차 힘겹다. 아직도 떨림이 남아 있었기에.
「지금 뭐 하는 거지?」
윤화진이 불쾌하다는 듯 짜증을 부렸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당신 얼굴 기억하겠어.」
백이현이나 윤화진이나 조선인이다. 하지만 나를 팔아먹은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 그렇기에 한낱 일본 순사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윽고, 곳간의 문이 닫힌다.
일본 순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백이현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윤화진은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윤화진이 피로 물든 자신의 옷을 보며 말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백이현이 가려 준 덕분에 이 피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나 더 숨길 수 있을까. 사실 비밀이 탄로 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두 손에 피를 묻혔다. 조선인을 벌레 취급하며 괴롭히던 일본인을 죽였다. 그 순간에 희열감을 느꼈다. 이제야 숨을 쉬는 듯했다.
「이건 당신의 선택이었으니까.」
슥.
윤화진은 바닥에 떨어진 백이현의 겉옷을 치웠다. 그 속에 숨어 있던 총을 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윤화진은 하나하나 일을 진행하고 있다. 백이현은 눈을 뜨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윤화진을 사랑하기에 그를 막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아…….」
숨을 몰아쉬던 백이현은 윤화진이 곳간에서 나가자 눈물을 떨어뜨렸다. 자신도 모르게 원하지 않는 길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 윤화진은 백이현의 숨통을 쥐고 있었다. 어쩌면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니, 함께 지옥에 떨어진다면 다행이겠지.
「왜, 왜 이렇게……!」
처절한 눈물이 툭툭 바닥에 떨어진다.
윤화진은 백이현을 지옥에 밀어 넣은 채, 유유히 홀로 낙원으로 떠날 잔인한 사람이었기에.
* * *
「오늘.」
윤화진은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무언가 결연에 찬 얼굴이었다. 모든 작업을 마쳤고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갈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백이현이 지켜보고 있었다. 백이현은 이미 윤화진의 행적을 모두 파악한 상황이었다. 유약한 성격이었지만,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관련 일을 알고 있는 전부를 살해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윤화진을 막지 못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백이현이 나타나자 윤화진이 표정 관리를 하며 물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새삼스럽게.」
「오늘 꼭 가야만 합니까.」
윤화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자신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백이현은 모든 걸 아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백이현이 자신을 말리는 이유는 단 하나기에. 파멸로 가는 길을 걷지 말라 말리는 것이기에.
「가야만 해.」
「왜 그래야 합니까?」
백이현은 간절했다. 지금이라도 멈춰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집안 재산을 모두 독립군에게 넘긴 걸로 멈추었으면 했다. 재산은 다시 채우면 된다. 소란스럽겠지만, 모두 수습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지금 윤화진이 하려는 행동은 수습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설득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어려운 길만 걸으려고 하는 겁니까.」
「…….」
「보지 않으면 되는데, 눈을 감으면 끝날 일인데,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또렷하게 바라보려 하는 겁니까.」
윤화진은 미소를 짓고 있고 백이현을 바라본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윤화진에게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애처롭게 매달리는 일밖에는 하지 않는다.
만약 윤화진이 부모의 뜻대로 살았다면 백이현은 좋은 남자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는 그 마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진심을 보여 주는 남자. 안타깝게도 윤화진은 백이현과는 결이 다른 여자였다.
「당신이 내게 묻는 그 모든 질문들.」
윤화진은 고고했다. 백이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태연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여자 같았다. 백이현이 모든 것을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백이현은 그럴 수 없는 남자였다. 윤화진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야.」
백이현의 입술이 떨린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어뜨린다. 무거운 침묵, 백이현이 그 적막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 차다.」
짙은 어둠을 바라보며 백이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추운 겨울, 윤화진의 마음 역시도 겨울이었다. 하지만 윤화진이 웃을 때면 마치 봄이 된 것처럼 따스했다. 백이현 앞에서는 보여 주지 않는 따뜻한 봄날 같은 미소를, 천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백이현은 자신에게 보여 주지 않는 그 모습에 동화되었다.
봄날, 윤화진이 원하는 것은 따스한 봄이겠지.
「당신이 날 돌아봐 주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회한에 찬 목소리.
「모두 부질없는 바람인 것을.」
백이현은 집을 나섰다. 윤화진보다 먼저 어디론가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백이현이 닿은 곳은 조선 총독부였다.
이리될 거라 생각했을까.
늦은 시간, 독립군에 대하여 할 말이 있다는 말로 약속을 잡았다. 건물 내부로 들어간 백이현은 형사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카무라.」
처음 윤화진을 만났을 때, 백이현은 ‘나카무라’라는 성이 자랑스러웠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었으며 일본이 있어야만, 어리석은 조선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백이현은 스스로를 특권층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깨우친 사람이었기에 일본인과 동등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리 시간을 내 줘서 고맙소.」
모르겠다.
백이현은 자신의 선택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자신도 없으면서 왜 이 자리까지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사이,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화되고 있었다.
윤화진은 백이현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지만, 백이현은 모든 마음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돌아봐 주기를 원하면서도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윤화진의 모든 순간이 그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동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군요.」
백이현은 형사과에 있는 인원을 살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당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이룰 수 있을 테니.
「내 약혼자가 오기 전에-」
타앙!
백이현은 눈앞에 서 있던 자를 거침없이 쏘았다.
「끝낼 수 있겠어.」
타앙!
* * *
소란스럽다.
폭탄을 숨긴 채 총독부를 향해 걸어가던 윤화진이 미간을 좁혔다. 몸을 숨기고 기다리던 그 때, 함께 일을 도모하던 동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킨다.
「지금 일이 터진 모양이다.」
「그게 무슨?」
「당신의 약혼자가 들어간 후에 소란스러워졌어.」
「내 약혼자?」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윤화진은 입술을 말아 물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윤화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경계가 삼엄해. 일단 오늘은 물러나지.」
「하지만.」
「폭탄은 이리 줘. 당신 약혼자가 들어가고 이 사달이 났으니, 꼬리를 잡힐 수 있어.」
오늘 윤화진은 세상과 마지막을 고할 생각이었다. 백이현이 가진 모든 재산을 넘겼으며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있는 재산까지 모두 탐하고 싶지만, 그건 역부족이었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윤화진은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백이현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 늦은 새벽, 그는 무슨 이유로 총독부를 찾은 것일까.
「설마…….」
아니, 그럴 일은 없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백이현이 윤화진을 밀고하기 위해 총독부로 향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백이현은 그럴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백이현은 윤화진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알고도 감내할 남자였다.
「아가씨!」
윤화진은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옷을 갈아입은 윤화진이었다. 침실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얼굴로 하인을 바라본다.
「어르신께서…… 글쎄, 주인 어르신께서!」
미간을 좁힌다.
「차분히 말해 보게.」
심장이 뛴다.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심장이 매섭게 뛰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이현 때문에 이토록 초조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죽였답니다!」
누군가 머리를 세게 때린 듯했다.
「그것도 4명이나요! 이를 어쩐답니까, 아가씨!」
귀에 이명이 들리며 머리가 멍해졌다. 백이현이 사람을 죽였다. 도무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머리가 아프다.
백이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유약한 남자라고 생각했으며 언젠가는 지옥에 떨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백이현이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총독부에서. 그 이유를 찾으면 오직 윤화진밖에는 없었다. 오늘 윤화진은 총독부에 폭탄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끝을 맺으리라 생각했다.
귀하게 살아왔기에 몸으로 뭔가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폭탄을 던지고 그 소란에 휩싸여서 이 생을 마감하려 했다.
「이제 순사들이 들이닥칠 텐데, 아가씨……!」
숨이 막힌다.
백이현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의 선택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 어떤 말도 귀에 닿지 않는다. 속이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쳐 보지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고! 아가씨, 지금- 지금 왔습니다! 쇤네는, 쇤네는…….」
윤화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넓은 마당, 백이현이 엉망이 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는다.
신발을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윤화진이 맨발로 백이현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얻어맞은 것인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정갈한 하얀 셔츠는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왜?」
윤화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