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좋은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영화 ‘마지막 겨울’ 홍보 일정에 유수한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던 처음 유수한이 존재감을 드러낸 건, VIP 시사회였다. 그날은 배우 입장이었다. 함께 무대에 올랐고 시사회 전에 기자간담회도 진행했다.
“유수한 씨는 이번 영화에는 특별 출연인데, 작은 분량에도 출연을 확정 지은 계기가 있을까요?”
유수한은 특별출연이었지만, 주연 만큼이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럴 만도 했다. 주연 배우들은 다양한 매체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유수한은 노출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궁금한 것을 이 자리에서 모두 확인할 생각인 듯했다. 이제 유수한은 인터뷰에는 익숙해졌다. 연기를 하는 배우 일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백이현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캐릭터성에 끌렸습니다. 분명 멋있는 인물은 아니에요. 비겁한 인물이죠. 지금까지 연기해 보지 못한 인물이었고, 윤화진에게 동화되어 조금씩 변하는 백이현을 연기하고 싶었기에 이 작품을 선택했습니다.”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백이현 캐릭터는 캐스팅 난항을 겪었다. 여배우에게 존재감이 밀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수많은 남배우에게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유수한은 인물에 매력만 있다면 분량과 상관없이 선택하는 배우였다.
“그럼 백이현이라는 인물을 연기할 때, 신경 쓴 부분이 있을까요?”
유수한은 마이크를 들며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백이현이라는 인물은 친일이라는 행위를 하는 비겁자였기 때문에, 멋있어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결국 변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윤화진에 대한 연심 때문이었고 근본적으로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정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백이현은 멋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유수한은 언제나 캐릭터 분석에 공을 들인다. 연기할 인물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어떤 방식으로 연기할지 늘 고민했다. 백이현은 멋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멋있다는 반응이 터진다면 그건 실패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수한 씨는 존재 자체가 멋있잖아요.”
그런 반응도 나올 수 있다. 유수한이었기에, 잘생긴 외모가 있었기 때문에 인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외적인 것만 주목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웃어넘겼다.
1시간가량 진행한 기자 간담회가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유수한은 결과물을 확인할 생각에 조금 떨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늘 그런 듯했다. 작품을 계속해도 처음 그 작품을 확인할 때, 기분이 묘했다. 제대로 연기를 했을까, 생각했던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을까, 조바심이 늘 마음이 떨렸다.
“안녕하세요. 백이현 역할을 맡은 유수한입니다. 저도 오늘 처음 영화를 보는데요. 기대가 됩니다. 부디,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짧게 소개를 마치고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스크린을 보는 유수한의 얼굴에 진중함이 묻어났다. 이윽고, 상영관 불이 꺼진다.
「싫어요! 나는 조선말만 하고 싶단 말이에요!」
아직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윤화진의 아역은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윤화진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친일 집안에 태어났어도 그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도 일본의 것은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가둬.」
결국, 어린 윤화진은 벌을 받는다.
「며칠 굶고 나면 정신 차리겠지.」
어두운 골방에 갇힌 어린 윤화진은 그 작은 머리로 생각을 거듭한다. 조선에 살면서 왜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지. 왜 일본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아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그 어떤 것도 쉬이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 참 독하죠. 그깟 왜놈 말 좀 거부했다고 사흘 동안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다니까요.」
어둠 속에서 성장한 윤화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졌어요.」
씁쓸한 목소리.
서서히 화면이 밝아지며 베레모를 쓴 윤화진의 얼굴이 드러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윤화진이 툭, 미리 준비해 둔 돈을 테이블에 놓았다.
「빌어먹을 왜놈 말을 배우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죠.」
슥.
돈을 내민 윤화진이 말했다.
「숨죽인 채 살아야겠다. 지금은 내가 너무 작으니까. 더 커서, 더 커지면, 그때.」
「…….」
「내 손으로 이 집을 몰락시키리라.」
그러니까, 받아 둬요.
「이건 내 자존심값이니까.」
화면이 바뀌었다.
일본, 그때 당시에는 동경이라 불렸던 도쿄. 윤화진은 일본 유학생이었고 호시탐탐 고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윤화진은 부모를 속인다. 착한 딸로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윤화진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도 속에는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백이현입니다. 일본 이름은 나카모토 현입니다.」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뿐이었다. 일본에 있는 한, 윤화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패물 따위나 팔며 돈을 마련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집안의 곳간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에 남아 있었다.
「나카모토 현.」
윤화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백이현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단번에 윤화진은 백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했다. 아무렇지 않게 일본 이름을 소개하는 사람.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나 보네요.」
차라리 잘됐다. 적어도 이용하는 것에 자책감은 없을테니.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 노력합니다. 나카모토는 저를 보살펴 준 대부의 성이거든요.」
「아, 대부.」
윤화진은 피식 웃으며 비웃는다. 하지만 첫눈에 윤화진에게 마음을 빼앗긴 백이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으냐는 질문은 조선인이면서 스스럼없이 일본 이름을 갖고 있는 것에 수치심을 갖고 있지 않으냐는 의미였다.
윤화진은 늘 부끄럽다. 윤화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일본의 이름을 가져야만 한다는 그 이유가 늘 그녀를 괴롭게 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윤화진이에요.」
백이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그는 윤화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 얼굴, 어느 집안 사람인지, 또 나이는 몇 살인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사실 갑자기 결혼이라니, 당황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뵙고 나니, 마음이 놓이네요.」
윤화진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결혼’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그가 신기했다. 그 어떤 감정의 교류도 없이 어떻게 부부가 된단 말인가.
「그렇군요.」
짧게 대답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어차피 윤화진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백이현을 만나 결혼을 약속해야만, 조선으로 떠날 수 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윤화진의 숨통을 조이게 했다. 숨을 쉬고 싶어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모든 곳에 일본인이 있고 그 사이에 천대 받는 조국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일본인이 키우는 가축보다도 못한 대접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윤화진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차마 같은 조선인에게 도움의 손길도 내밀 수 없었다. 친일하는 집안 덕분에 편하게 사는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는단 말인가.
「조선은 언제쯤 가실 생각이십니까?」
무의미한 대화 끝에, 이제야 비로소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들 화제가 나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갈 수 있다면 가고 싶다면요?」
「정말입니까?」
「네.」
차라리 잘되었다.
「백이현 씨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이렇게 바보같은 남자라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백이현의 눈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토록 쉽게 빠지는 남자라면 손쉽게 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죄책감? 그런 것도 없을 것이다. ‘나가모토 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였기에, 더 가차없이 갖고 놀다가 버릴 수도 있다. 차라리 잘됐다. 윤화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같은 나라 아닙니까.」
이 남자는, 머리에 꽃만 든 이 남자는 때때로 윤화진을 화나게 만든다. 쓸데없는 말을 하고 언제나 윤화진의 환심을 사려 하지만, 늘 화만 사는 어리석은 남자였다.
「같은 나라? 참으로 역겨운 말이네요.」
윤화진은 백이현의 마음을 확신했다. 일본에서 그는 윤화진에게 마음을 얻으려 안달 나 있었다. 그렇기에 윤화진은 백이현에게 조금 더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다.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당신은.」
그 말은 백이현에게 했던 말이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다. 일본의 개가 된 아버지 덕분에 윤화진은 지금까지 편한 삶을 살았다. 그건 개와 다를 게 없었다. 일본에게 달라붙어 꼬리를 흔들다 보면 먹을 것이 주어진다. 그걸 받아먹으며 구걸하는 삶, 조국을 저버린 대가로 받은 달콤한 꿀에 의지하여 사는 삶. 그렇기에 떳떳하지 않다.
차라리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마음이 편하기를 바란다. 이 불편한 감정이 해소되길 바란다. 조국이, 사랑하는 조국이 일본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일본의 개가 되었던 자신을 심판해 주길 바란다.
「조국이 독립만 한다면.」
윤화진이 담배를 피우며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목이 잘리더라도 행복할 텐데.」
어느새 배는 조선에 닿았다. 배에서 내릴 때, 백이현이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 하기를 원했지만, 윤화진은 그를 외면했다. 홀로 배에서 내린 윤화진은 고국에 두 발이 닿는 그 순간 희열을 느꼈다.
어릴 적, 억지로 왜놈 말을 배워야 했고 억지로 일본으로 끌려가야 했다. 동경대에 다니던 그 시절,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웠고 화가 치밀어 욕지기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화진 씨. 피곤하죠? 어서 집에 가서 여독을 풀도록 해요.」
백이현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화진은 그를 보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나는 오늘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지금 말입니까? 아니, 조선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윤화진이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어디론가 사라지는 윤화진을 백이현이 멀거니 바라본다. 남자였기에, 힘으로 어딜 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윤화진은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그건 어쩌면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백이현은 윤화진에게 마음을 빼앗겼기에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쁘더라도 한 번은 돌아봐 주면 좋을 것을.」
윤화진이 멀어진다.
사람에 섞여 보이지도 않는다. 윤화진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백이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뿌연 연기가 허공에 퍼지고 백이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날 돌아봐 주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