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그럼 당신도 같이 죽든가
원주 팬미팅의 게스트는 주민하였다. 그리고 이정우는 고정 게스트로 주말마다 시간을 비워야 했다.
주민하는 드라마 ‘시간’의 서브 여주였고 그다음, ‘식사남녀’에서는 여주였다. 그렇기에, 즉흥 연기 역시도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날 사랑해 달라고 했잖아.”
시작은 드라마 ‘시간’의 유은하였다.
유수한은 정장을 입은 채 차를 마시며 마카롱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식사남녀’의 강인한이었다.
“내가 죽으면 되겠어?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허락해 줄 거니?”
강인한이었기에 유수한은 아무 말 없이 유은하를 바라본다. 사실 유수한은 주민하가 설마 유은하를 준비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서로 주인공으로 호흡했던 ‘식사남녀’를 생각했고, 그렇기에 강인한을 준비할 거라 미리 언질을 해 둔 상태였다.
“날 사랑해 줘.”
유수한은 짧게 고민한다.
어느새 눈물까지 고여 열연하는 주민하를 보며, 지금이라도 콘셉트를 바꿔야 하나 생각한다. 정유환 역시도 정장을 입는 캐릭터였다. 초반에는 양아치 같은 모습이 강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각성하며 달라지는 인물이었다.
“제발, 제발 나 좀 사랑해 줘…….”
울음이 섞인 간절한 목소리.
유은하는 서브 여주였기에 서사를 풀 분량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주민하는 설득력이 없는 유은하의 캐릭터를 가장 아쉬워했었다. 조금 더 서사를 풀 시간이 주어졌다면 더 좋은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 거다.
유은하의 손이 간절하게 정유환을 붙잡는다. 유수한은 입을 떼지 않았고 그 순간, 조명이 탁 꺼졌다. 무대가 어둠에 싸이고 주민하는 미소를 지으며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스태프가 달려와 코트를 가져가고, 어느새 유수한 앞에 앉은 주민하가 마카롱을 든다.
‘나만 빼고 다 알고 있었어?’
주민하는 어떤 연기를 할지 함구했다. 즉흥 연기였기에, 유수한에게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주민하는 미리 스태프와 의논을 끝낸 상태였다. 어쩐지, 사전 리허설에 대뜸 나타나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니, 모두 두 인물을 연기하기 위함이었다.
- 유은하 슬프다
- 은하야 욕은 했지만, 네 얼굴은 사랑했어
- 요즘 주민하 밝은 캐릭터만 하잖아 오랜만에 유은하 보니까 좋긴 하다 ㅋㅋㅋ
- 주민하 연기 존잘 근데 잘못 찾아가셨어요 그분은 소시지광공이세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ㅇㅈ 누가봐도 강인한이었음 ㅋㅋㅋㅋ
└└└ 존웃ㅋㅋㅋㅋㅋㅋ
탁.
다시 조명이 켜진다. 밝아진 무대, 달라진 게 있다면 주민하였다. 유은하가 되었던 그녀는 어느새 해맑은 이윤수가 되어 있었다.
“팀장님, 왜 안 먹어요?”
절절하던 유은하는 없었다. 사랑을 구걸하는 유은하가 사라지고 강인한에게 마음을 뺏긴 이윤수가 나타났다.
“안 먹으면 내가 먹어요?”
- 윤수다!!!
- 이윤수!! 윤수야 오랜만이야 ㅠㅠㅠㅠㅠ
- 와, 나 진심 놀랐어 갑분이윤수 미쳤어 ㅠㅠㅠㅠ
- 그렇지ㅋㅋㅋㅋ 주민하 하면 이윤수지 ㅋㅋㅋㅋ
└ 22222
└└ 333333
└└└ 444444 ㅇㅈ
└└└└ 5555
- 미쳤다 유은하 보다가 이윤수 보니까 기분이 이상햌ㅋㅋㅋㅋ
└ 22 맞아 사랑 구걸하던 유은하 어디갔냐
└└ 333 유은하랑 너무 다른 사람이라 무서울 지경 ㅋㅋㅋㅋ
└└└ 44444 ㅇㄱㄹㅇ
└└└└ 5555 알고보니 유은하 아니야? ㅋㅋㅋㅋ
└└└└└ 66666 연기 존잘이네;;
이제야, 유수한은 제대로 연기할 수 있었다. 유은하를 마주할 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약 정유환이었다고 해도 그랬을 것이다. 정유환은 유은하를 사랑하지 않았고, 구걸한다고 해도 마음을 줄 남자가 아니었다.
“먹는 모습이 예뻐서.”
“어우, 미쳤나 봐!”
능청스러운 강인한의 말에 이윤수가 치를 떤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말을 배웠어요?”
“진심인데.”
“입이나 벌려요. 녹차 마카롱 들어갑니다.”
아.
강인한의 입이 벌어지고 그 속으로 마카롱이 쏙 들어왔다. 이윤수는 마카롱을 먹는 강인한을 바라본다. 그 눈에는 사랑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좋아해요.”
수줍은 고백.
“쉽게 놔주지 않을 거예요.”
이윤수가 손을 내밀었다. 강인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맞잡는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그때도?”
“응, 그때도 이 손을 놓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 미친ㅋㅋㅋㅋㅋㅋ 나 순간 이윤수가 유은하로 보였어
└ 야 너도? 나도;;;
└└ 하필 유은하가 다음 생이 있다면 웅앵웅해서;;;;;
└└└ 표정은 되게 해맑은데 유은하 생각나서 그런가 봐 ㅋㅋㅋ
유수한은 몰랐다. 지금 팬미팅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배우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다는 걸. 다들 여기저기 퍼진 팬미팅 영상을 보았고, 덕분에 주민하도 민서온의 연기를 확인했다. 미리 즉흥 연기를 할 거라는 말을 들었기에 무대에서 가볍게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즉흥 연기가 화제가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뭘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형, 나도.”
그리고 그사이에 끼고 싶은 이정우였다.
“너 안 갔냐?”
“아니, 형. 나 어차피 오늘 원주에서 잘 거야. 내일도 공연해야 하잖아.”
“말은 왜 짧냐?”
“자기도 짧으면서.”
이정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주말마다 끌려온 사람인데, 해도 너무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정도 투정은 부려도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부산 때 준비해 보든가.”
“영혼으로 만나면 어때? 형도 뒤졌고 나도 뒤졌잖아.”
“말 좀 예쁘게 해. 새끼야.”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민하가 유수한에게 다가왔다. 주민하 얼굴은 밝았다. 보여 주고 싶은 연기를 모두 보여 주었다. 배우로서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오늘 고생했어. 고마워.”
“아니야, 나도 재밌었음.”
주민하는 요즘 밝은 연기를 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주로 하던 악역 연기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 오랜만에 유은하를 연기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캐릭터만 좋다면, 그 캐릭터에 설득력만 있다면 다시 악역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 팬미팅 보고 가도 되지?”
“어. 따로 자리 만들어 놨어.”
“그럼 오빠 노래 기대할게.”
“기대는 말고.”
이미 서울에서 한 번 팬미팅을 진행했던 유수한은 두 번째는 조금 더 수월하게 공연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팬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들었다. 새로운 공간, 수많은 팬이 눈앞에 보일 때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착각도 느껴졌다.
유수한은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배우라는 직업이 생소했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노력했기에,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OKEN] 성공적으로 끝난 유수한 전국투어 팬미팅
팬미팅이 모두 끝났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기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진행한 팬미팅이었다. 마지막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유수한은 후련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을 느꼈다. 내친김에, 제주도까지 날아가 팬미팅을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부산에서는 팬미팅이 끝난 후에 뒤풀이가 열렸다. 유수한은 소속사 식구들에게 한우를 선물했다. 유수한의 고집으로 소속사 직원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렴한 티켓값 때문에 예산 고민이 컸던 이성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고생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못난 자식이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하는데, 싫을 사람은 없었다. 전국 투어 팬미팅은 이성실에게도 뜻깊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다른 소속 배우의 팬미팅도 열고 싶을 정도였다. 손해를 봤지만, 그래도 이런 시간은 필요했다. 팬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건 배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늘 많이 드세요. 제가 다 삽니다!”
한우 파티.
다들 열심히 고기를 굽는다. 어차피 부산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라, 다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열심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어느새, 5월.
4월은 팬미팅에 빠져 살았던지라,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5월은 유수한에게 새로운 일이 생기는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과물을 확인할 시간.
[연예뉴스] 영화 ‘마지막 겨울’ 크랭크인 5월 24일 개봉
바로 유수한이 특별출연 했던 ‘마지막 겨울’이었다. 공식 예고가 오늘 공개되었지만 유수한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팬미팅에 집중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걸 이제야 보네.”
뒤풀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유수한은 바로 샤워부터 했다. 깨끗해진 몸으로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예고편을 찾았다.
[빛유/자유] 마지막 겨울 예고편 보셨어요? +8
[빛유/자유] 흑흑 팬미팅 떡밥으로도 행복한데 영화라니 ㅠㅠㅠ +33
[빛유/자유] 수한아, 넌 언제 쉬어? +15
당연히 팬들 반응도 좋았다. 내 배우가 열심히 일한다는데 그걸 싫어할 팬은 그 누구도 없었다.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문제 될 것 없는 작품이라면 모두 환영한다.
「상관없어.」
유수한은 30초 분량의 짧은 예고편부터 확인했다.
「내 조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데.」
윤화진의 목소리부터 시작된다.
「이깟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앞에는 참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백이현이 서 있다. 마주 본 두 사람이 짧게 스쳐 지나가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당신을 사랑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백이현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무서워서 당신을 버리고 싶은데.」
눈물을 흘리는 백이현의 모습은 순간, 동정심이 들 정도로 처연했다.
「그러지도 못하는 나는, 대체 어떡하라고…….」
「…….」
포커스가 윤화진에게 닿는다. 윤화진은 무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당신도 같이 죽든가.」
그 말은 순간 잔인하게 들렸지만, 사실은 윤화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답변이었다. 윤화진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백이현은 위험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윤화진을 놓지 못했다. 그렇기에, 같이 죽자는 말은 그녀에게는 최선의 배려였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여자와 그럴 수 없었던 남자. 그 남자는 결국 사랑 때문에 그 여자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
“좋은데.”
예고편에는 특별출연이었던 유수한의 분량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듯했다. 유수한은 톱스타였고, 그렇기에 예고편에 최대한 노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인공 윤화진 역을 맡은 주해원과의 호흡도 대중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테고. 쉽게 말하자면 마케팅이었다.
[HOT] 예고부터 넘치는 케미를 보여주는 주해원과 유수한 +469
그 전략은 제대로 먹혔다. 유수한은 말 그대로 특별출연이었기에 이름 앞에 ‘그리고’가 붙었다. 특출이지만, 그 이상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출연자인 만큼 ‘그리고’가 붙었다.
작은 역할임에도 캐릭터 하나만을 보고 출연을 확정 지었다. 유약하지만, 점차 변하는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영화 ‘마지막 겨울’의 개봉은 보름 정도 남았다. 유수한은 주연 배우가 아니기에, 무대 인사 일정을 함께하지 않아도 되어 편한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