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후배 유수한은
- 나도 저거 실제로 보고 싶어....
- 진심 이번 팬미팅 스케일 돌았네
- 아니.. 갑자기 나타난 서윤한이라뇨?ㅠㅠㅠㅠㅠ
- 갑자기 총 들이대는 거 보솤ㅋㅋㅋㅋㅋ
└ ㅋㅋㅋ 둘 다 연기 존잘이얔ㅋㅋㅋㅋㅋㅋㅋ
└└ 진심 영화 보는 거 같앜ㅋㅋㅋㅋ
팬미팅 반응은 전체적으로 좋았다.
“너, 너…… 지, 지금 뭐 하냐?”
이인태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서윤한은 표정에 미동이 없었다. 총구를 겨눈 채로 말없이 이인태를 쳐다보고 있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가 퍼진다.
“지령이 왔습니다.”
“뭐?”
“당신을 죽이고 복귀하라는 명령.”
“뭐?”
장난인가?
이인태는 서윤한을 보며 떨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서윤한은 올림픽 직전까지 커리어를 착착 쌓아 가고 있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 대표.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사격 선수였다.
“미안합니다.”
서윤한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이인태가 뭔가 터지는 소리에 기겁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어, 어, 어, 내 머리, 내 머리!!”
서윤한은 장난감 총을 들고 있었고 당연히 모두 장난이었다. 하지만 극도로 놀란 이인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또 만졌다.
“어?”
몇 초 느리게 정신이 돌아온다. 이인태는 뒤늦게 자신의 머리가 터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없는 눈으로 고개를 드니, 서윤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다.
“너, 너 이 새끼…….”
분노로 이인태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서윤한은 빙긋 웃고는 주저 앉은 이인태 앞에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장난감 총을 흔들며 입을 연다.
“형도 큰일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과 달라졌다. 서로 가까워진 상태였고 서윤한의 마음의 벽도 무너진 상태였다.
“날 아직도 못 믿어?”
“야, 네가 총 들이미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이 새끼는 옛날에도 저 지랄 떨더니, 이번에도! 이 새끼, 이거. 인간이 글렀어. 스승한테 이 지랄을 떨어? 어?”
이인태는 발작하듯이 화를 낸다. 그건 트라우마였다. 이미 서윤한은 예전에도 같은 행동을 하며 이인태를 협박한 적이 있었다. 이마에 닿는 차가운 총구는 이인태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지금은 서윤한을 믿는다. 그는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예전 느꼈던 그 경험은 이인태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윤한아 ㅠㅠㅠㅠ 잘 살고 있다니, 다행이다 ㅠㅠㅠㅠㅠㅠ
- 와, 연극 보는 것 같다 ㅠㅠㅠㅠㅠ 연기가 넘 생생하네 ㅠㅠㅠㅠㅠ
- 윤한이 마음이 편해져서 머리 기른 것 같지??
└ ㅇㅇ 그런 듯
└└ 이제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ㅠㅠㅠ
└└└ 캐해 무슨 일이야 ㅠㅠㅠㅠㅠㅠ
- 난 이제부터 성실이한테 뼈를 묻을 거야 생중계 너무 고마워...
└ 222 성실아 고맙다...
└└ 3333 성실아 건강하자... 영원히 K엔터 사장해줘...
└└└ 444 성실아.. 생중계 고마워...
└└└└ 5555 성실아 영원히 함께하자...
유수한이 준비한 이벤트는 모두 팬을 위한 것이었다. 서울 공연에서는 서윤한의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다음 공연에서는 게스트에 따라 연기가 달라질 예정이었다. 가능하다면 작가에게 대본을 받거나, 그게 힘들다면 배우끼리 의논하면서 즉흥 연기를 보이기로 했다. 오늘 같은 경우는 고운영 감독의 조언을 받고 진행한 즉흥 연기였다.
즐겁다.
항상 생각하지만, 노래나 춤을 추는 것보다 역시 연기하는 일이 가장 마음이 편했다. 항상 후줄근한 옷을 입던 서윤한은 남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며 때깔이 달라졌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브랜드도 없는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입었다면,
- 우리 윤한이 성공했어ㅠㅠㅠ 저거 에디다스잖아 에디다스 ㅠㅠㅠㅠㅠㅠ
└ 22222
└└ 유수한 디테일 미쳤어 ㅠㅠㅠㅠ 사격선수로 성공해서 좋은 옷 입은 거잖아
└└└ 역시 디테일 장인...
└└└└ 좋은 옷 입은 서윤한 왜 이렇게 좋냐 ㅠㅠㅠㅠㅠ
지금은 번듯한 옷을 입고 있다. 삶의 여유가 생긴 서윤한은 웃음도 많아졌고 눈빛도 순해졌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유해졌다.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유수한이었다.
“저기…….”
그리고.
오늘 팬미팅에는 게스트가 한 명 더 있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나타난 인물 덕분에 분위기가 들썩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유수한이 이번 서울 공연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무대가 있었다.
예전 연기대상에서 각자 다른 드라마 인물이 나와 짧은 공연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그 무대를 참고해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
“정유환.”
지금 유수한은 서윤한이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서윤한은 멍한 눈으로 걸어 나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다리가 좋지 않은지, 아주 천천히 두 발로 걸어 나온 여자, 이은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내가 묻고 있잖아.”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
항상 생각하지만, 민서온은 연기를 잘한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도 순식간에 배역에 몰입했다. 민서온은 게스트 제안을 귀찮아하면서도, 오랜만에 연기하는 이은서가 제법 반가운 눈치였다.
“아.”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던 이은서의 몸이 휘청거린다. 그 모습에 서윤한이 벌떡 일어나, 이은서를 부축했다.
그리고.
“아직은 목발 없이 걷지 말라 했잖아.”
어느새 유수한은 서윤한을 벗고 정유환이 되어 있었다.
- 이거 기획한 사람 누구냐
- 와, 이렇게 덕후 저격하기 있냐????
- 돌앗
- 옷은 서윤한인데, 눈은 정유환 됐어 미쳤다;;;;;
- 으악!! 은유커플이다!! 은유!! 은유다!!!!
└ 진정해
└└ 시바 이게 얼마만에 보는 은유커플이냐...
└└└ 진심 나도 내 심장이 반응함 ㅋㅋㅋㅋㅋㅋㅋ
“얘, 지금 뭐 하냐?”
정유환과 이은서가 둘만의 세상에 갇혀 있을 때, 홀로 남은 이인태는 당황한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웃거리는 이인태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야, 너 여자 생겼냐?”
그 목소리는 마치 바람처럼 흩어졌다.
정유환은 이은서를 부축하며 눈을 여전히 마주치고 있었다. 이은서는 그런 정유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당신.”
“응.”
“옷 취향이 왜 이렇게 변했어?”
이은서의 말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전히 이인태는 팔짱을 끼고 두 사람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모습이 묘하게 코믹스럽다. 이인태는 대꾸도 하지 않는 정유환에게 지쳤는지, 어느새 무대 앞으로 다가와 객석을 향해 속삭였다.
“쟤네 사귀어?”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동인은 연기를 연극으로 시작했다. 관객과 호흡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저 아저씨 좀 치워 봐.”
이은서가 자꾸 무대를 뺏는 이인태를 보며 말했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고 정유환은 이은서를 안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평소 유수한은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렇게 키운 근육이 헛되지 않았는지, 민서온을 안는 것에 부담감이 없었다.
“내려 줘.”
철이 든 정유환은 이은서의 말을 잘 듣는다. 다시 두 발로 선 이은서는 정유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지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정유환을 바라본다.
“있잖아.”
이은서가 머뭇거리며 정유환의 손을 잡는다. 이 순간에도 캐릭터에 충실했다. 손 전체를 잡는 게 아니라, 손가락 딱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무대 아래, 카메라가 그 손을 클로즈업했다.
- 섹텐 돌았다 진심
└ 22222
└└ 333 눈빛 맛돌았어
└└└ 4444 텐션 무슨 일이야?
└└└└ 55 이거 때문에 내가 이 드라마에 미쳤지...
이은서는 여전히 손가락을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어떨 것 같아……?”
유수한은 결말을 맞이한 드라마의 인물을 다시 그리고 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행복한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정유환은 불행한 삶을 살았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된 여자 이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함이 있던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서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기에 위태롭게 발을 내디디며 나아갔다.
“그리고 당신이 아빠가 된다면-”
이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유환은 몸이 먼저 나갔다. 이은서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지금 이 행동으로 모든 것에 대한 답이 되었으니까.
“뭐야, 진짜.”
그리고.
여전히 주변을 서성이던 이인태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팍 찌푸렸다.
“대체 이게 뭐냐고!”
그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무대가 어두워진다.
잠시 무대 뒤에서 쉬고 있던 조은희가 큐카드를 들고 나타났다. 유수한은 부지런히 의자와 테이블을 옮기는 스태프를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자!”
조명이 켜지고 조은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느새 1부의 마지막이 다가왔네요!”
무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다. 유수한은 가운데에 앉아 있었고 왼쪽에 민서온이, 오른쪽에는 정동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장소에 조은희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저 뒤에서 진짜 재밌게 봤어요. 배우분들의 즉흥 연기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확실히 이번 팬미팅은 처음과 비교하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첫 팬미팅은 MC를 제외하고 게스트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보다 작은 공연장이었고 화기애애하면서도 소소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공연장부터 비교할 수 없었고 돈 냄새가 풀풀 풍겼다. 유수한 역시도 많은 것을 준비했다. 팬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을 모두 보여 주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번 팬미팅은 여러 가지 이슈를 낳았다.
첫 번째로 유수한이 출연한 작품이었다.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와 드라마 ‘시간’의 후일담을 짧게 연기했다. 드덕의 심장을 울릴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명 아이돌 이정우가 피처링한 팬송까지.
지금 유료 생중계를 하는 만큼, 그 파급력이 순식간에 퍼져 가고 있었다.
“여기서 항상 이런 게 궁금하잖아요.”
조은희가 마이크를 들고 능숙하게 진행을 이어 나갔다.
“후배 유수한은 어떤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정동인은 유수한에게 있어서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리고 민서온 역시도 선배였다. 지금 유수한은 후배 입장이라,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초반, 함께 무대를 꾸몄던 이정우 앞에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수한이는 기특한 후배.”
정동인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재밌게 얘기하려면 좀 욕도 하고 해야 하는데, 얘는 흠잡을 곳이 없어.”
그 말을 듣던 민서온이 마이크를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제가 한번 재밌게 이야기해 볼까요?”
유수한이 슬쩍 눈치를 본다.
정동인에게는 늘 좋은 모습만 보였지만, 민서온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유수한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물론 같은 소속사인 만큼 선을 정확히 지키겠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뭐랄까.”
민서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변한다는 걸 알려 준 후배?”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유수한은 입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고 민서온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동인은 흥미롭다는 듯, 민서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값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