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64화 (164/175)

164. 그렇게 됐습니다

처음 듣는 멜로디.

당연히 새로운 곡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곡을 부를 거라 생각했다. 유수한은 리프트와 함께 나타났고 텅 비어 있던 무대를 채웠다. 점프를 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유수한 머리 위로 조명이 떨어졌다.

“너라는 존재가 날 빛나게 해.”

유수한의 등장에 한순간 적막했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응원봉이 일제히 켜지고 화려한 빛이 객석을 꽉 채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유수한도 순간 멍해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열심히 뭔가를 흔드는 그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내 곁에 나타난 눈부신 빛을 나는 놓치지 않을 거야.”

처음 듣는 노래. 뭔가 아이돌이 부를 것 같은 노래였다. 유수한은 무리 없이 라이브를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다른 아이돌처럼 AR을 깔아 놨기에 더더욱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유수한은 찢어진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로서만 살아왔던 그였기에 이 광활한 무대를 혼자 채우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었다. 가수로서 경험이 전혀 없기에 어떻게 무대를 채워야 할지 감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섭외했다.

유수한은 싫어했고 거부하려 했던 한 명이었다. 동시에 유수한이 알고 있는 유일한 보이그룹 멤버였기에 무대를 꾸미는 일만큼은 유수한보다 능숙한 사람이었다.

“너는 누구보다 빛나!”

첫 도입부의 짧은 랩은 유수한의 목소리였지만, 그다음 랩은 모두 이정우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이정우는 리듬을 타며 흥겨운 분위기를 한층 더 불타오르게 했다.

- 헐, 이정우?

- 이정우? 이정우 나온 거?

- 이 노래 뭐야? 처음 듣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지 않는 곳이 없어. 너라는 존재가 날 빛나게 해.”

이정우는 노래보다는 랩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유수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이정우가 씩 웃으며 랩을 이어 가고 있었다. 유수한은 말 그대로 긴장한 상태였다. 환호성을 느끼고 객석을 꽉 채운 응원봉을 보며 열심히 준비한 춤을 보여 주고 있지만.

- 내 배우가 아이돌 코스프레를 해요 ㅠㅠㅠㅠ 근데 너무 잘 어울려...ㅠㅠㅠㅠㅠㅠ

└ 태생이 아이돌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

└└ 비주얼 담당 같다고요 ㅠㅠㅠㅠㅠㅠㅠ

└└└ 우리 애 노래도 잘하고 못하는 거 없으뮤ㅠㅠㅠㅠㅠㅠ

- 유수한 ㅋㅋㅋㅋ 춤 잘 추는 것 같은데 왜 묘하게 뚝딱이지?

└ 2222 미치게 한다 진짴ㅋㅋㅋㅋ

└└ 33333 뚝딱거리니까 더 귀여웤ㅋㅋㅋㅋㅋ

└└└ 4444 씹포 미쳐버림

└└└└ 555 존나 귀엽다 진심

랩이 끝나고 이정우는 유수한의 옆에 서서 함께 춤을 췄다. 항상 유수한에게 연기로 구박만 받던 이정우였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색함이 없었고 오히려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유수한은 배우였기에 이정우처럼 잘할 필요는 없었지만, 잘하고 싶었다.

이성실이 이정우에게 피처링을 맡기자고 말했을 때 극도로 싫어했던 유수한이었지만, 좋은 무대를 위해서 그가 필요하다는 걸 일부 인정했다.

춤을 출 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멋지게 출 수 있는지 조언을 들었다. 이번 팬미팅을 준비하면서 유수한은 확실히 아이돌 짬바는 무시하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

“고마워. 너라는 눈부신 존재가 내 곁에 와 줘서.”

첫 무대, 유수한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팬을 위해 준비한 노래였기에 더더욱 잘하고 싶었다. 노래가 끝나 간다. 유수한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너는 누구보다 빛나!”

이정우와 함께한 첫 무대가 끝났다.

유수한은 숨을 몰아쉬며 잠시 여운을 느꼈다. 객석에서는 여전히 응원봉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함성 소리에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한 박자 느리게 유수한이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그 짧은 인사말에 까마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수한은 익숙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무대를 함께 꾸며 준 분이 계신데, 다들 잘 알고 있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정우!”

“이정우! 이정우!”

이정우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정우는 유수한을 도와주기 위해, 주말을 반납한 상황이었다. 사실 이정우에게는 손해 볼 것 없는 상황이었다. 유수한과 함께 있으면 오히려 얻어 가는 게 많은 이정우였다.

“네,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우가 마이크를 들고 씩씩하게 말했다.

“수한이 형의 영원한 제자 이정웁니다!”

하여튼.

유수한은 이정우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아이돌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어떻게 하면 주목받을 수 있는지 잘 아는 듯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수한와의 연결고리를 기가 막히게 언급하고 있었다. 팬들이 어떻게 하면 좋아할지 아는 사람처럼.

- ㅋㅋㅋㅋㅋㅋ 영원한 제자래 ㅋㅋㅋㅋ

- 살다보니 유수한이 이정우랑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도 보네 ㅋㅋㅋㅋ

- 근데 이 곡 뭐야? 미공개 곡 맞지?

- 가사 보면 빛난다는 말이 많이 들어가던데 설마... 팬송...?

└ 헐! 이건가 보다

└└ 맞나보다 팬송 아니야??

└└└ 가사는 딱 팬송이던데...

└└└└ 그럼 우리보고 빛난다고 한거야? 감동...ㅠㅠㅠㅠㅠ

생중계를 보고 있는 팬들이 술렁이는 만큼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응원봉을 흔들면서 첫 곡은 대체 뭐였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유수한이 등장했고 춤을 추며 재롱 부리는 게 귀여워서 푹 빠져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슬슬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곡은요.”

어느새 유수한의 손에는 스태프가 전달해 준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이정우 역시도 하나 선물 받은 모양인지 익숙하게 전원을 켜고 살짝살짝 흔들고 있었다.

“아, 형. 응원봉은 불을 켜야죠.”

유수한은 곡 설명을 하려다 말고 손에 들고 있던 응원봉을 보았다. 이정우는 유수한이 좀처럼 불을 켜지 못하고 있자, 아예 도와주고 있었다.

“아, 이렇게 켜는 거구나.”

유수한은 환한 노란빛이 뿜어져 나오는 응원봉을 보며 웃었다. 회사에서 이것까지 준비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고 해도 이번 팬미팅은 적자나 다름없는데 응원봉까지는 만들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누가 이걸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이거 만들어 줘서.”

바로 팬이었다.

“와, 진짜 존나 귀엽다.”

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팬 하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유수한은 정말 완벽한 존재라고. 만약 유수한이 아이돌이었다면 비주얼은 물론 씹덕까지 겸비한 멤버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늘 완벽해 보이는 얼굴로 허당 짓을 할 때마다 그랬다.

응원봉을 신기해하고 어떻게 만지는지 몰라, 옆 사람의 도움을 받는 그 모습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어떻게 해야 저 얼굴을 가지고 저렇게 귀여운 짓만 골라 할 수 있는지 이해 불가였다.

- 그래서 이 곡은 뭔데?

- 빨리 이 곡의 정체를 말해줘 ㅠㅠㅠㅠ

- 무슨 노랜지 궁금한데 응원봉에 정신 팔린 유수한도 너무 귀엽다 ㅠㅠㅠㅠ

└ 22222

└└ 333 벽 부수고 싶다

└└└ 난 이미 집 부숨

유수한이 한 손에는 응원봉을 들고 남은 손으로는 마이크를 든 채, 하던 말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사랑하는 빛둥이들을 위해 준비한 노래예요.”

빛둥이?

처음 듣는 말에 다들 의아한 듯 술렁인다. 유수한은 조금 오그라들지만, 용기를 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빛유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하더라고요. 그래서 팬분들을 지칭하는 말을 만들어 봤는데, 어떠세요?”

- 앜ㅋㅋㅋㅋㅋ 존나 미치게 한닼ㅋㅋㅋㅋ 빛둥잌ㅋㅋㅋㅋㅋ

- 빛둥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얘들아... 그냥 좋다고 해... 빛둥이 혼자 얼마나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겠냐

- 빛둥이? 빚쟁이 다른 말인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미친 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존나 웃기네 이거 ㅋㅋㅋㅋㅋ

이러나저러나, 내 배우가 만든 애칭인데 싫다고 어떻게 하겠는가.

다들 좋다는 듯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고 유수한은 만족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곡명은 ‘빛나’고요. 빛둥이 보면 생각나는 말을 제가 적었거든요. 그 말을 토대로 작사가님이 멋지게 작사해 주셨습니다.”

- 팬송 맞았네 ㅠㅠㅠㅠㅠㅠㅠ

- 이거 음원 나오나? 음원 소취 ㅠㅠㅠㅠㅠ

└ 22 음원 줘

└└ 333 이대로 일회성으로 묻히기에는 넘 아깝

└└└ 44444 내놔

옆에 서 있던 이정우가 마이크를 들었다.

“이거 제가 피처링한 거 알고 계시죠? 제가 알기론 오늘 6시에 음원 공개된다던데.”

이정우가 유수한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형?”

자연스럽게 팬들이 궁금해할 정보를 알려 주었다. 오늘 음원 공개가 될 예정이었다. 성적에는 관심이 없지만, 유명 작곡가가 작곡한 곡이었고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까운 노래였다. 그래서 이 곡이 마음에 든 사람이 있다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정식 발매를 결정한 것이다.

- 내 배우 노래 나오냐고 엉엉

- 근데 이 노래 존나 좋지 않냐? 입에 막 맴돌아

└ ㅇㅈ 쉬운 멜로디라 좋아

└└ 계속 빛나! 이러고 있다 나ㅋㅋㅋㅋㅋㅋ

└└└ 딱 아이돌 노래야

- 성실이는 이런 노래 어디서 구해왔대?

└ 그러게? 배우 소속사라 아는 작곡가도 몇 없을텐데

└└ 설마 예전에 키우던 아이돌에게 왔던 노랜가?

└└└ 아... 그 아이돌?

└└└└ 그 아이돌이 누군데?

└└└└└ 있어 K엔터 흑역사

- 우리 스밍 가냐?

└ 가야지

└└ 당연

└└└ 차트 1위는 못해도 차트인은 해야지

└└└└ 222 차트인은 해야지

음원은 팬들에게 새로운 떡밥이었다.

유수한은 자연스럽게 첫 무대를 마무리 짓고 이정우와 함께 잠시 퇴장했다. 그사이, 이번 팬미팅 진행을 맡아 줄 엠씨가 등장했다. 바로 첫 팬미팅도 함께했었던 조은희였다.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경쾌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유수한은 의상을 갈아입었다. 이정우는 계속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옷을 상의를 훌러덩 벗은 유수한을 보며 말했다.

“형, 인기 진짜 많네요?”

이정우는 생각보다 놀랐다.

배우 팬미팅이라 해서 생각했던 분위기가 있었다. 배우니까 차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마치 아이돌 공연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팬이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퀄인 응원봉까지. 모든 것이 신기했다.

“뭐, 내 입으로 인기 많다고 말하긴 좀 그래서.”

유수한은 대충 둘러대고 코디가 주는 의상을 받았다. 바로 탈의실로 들어간 유수한은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다음은 조은희와 함께 팬들과의 시간을 보낸다. 여러 궁금증에 대해서 해소하는 시간이었다. 팬미팅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코너였다. 하나하나 준비한 것을 보여 주다 보면 어느새 1부가 끝나 있을 것이다.

일단 가장 걱정했던 첫 무대를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오늘 고생했다.”

“뭘요. 형이 부르면 무조건 온다니까요?”

“다음 주에도 잘 부탁한다.”

“네.”

이정우는 짧은 공연을 마치고 돌아갔다.

유수한은 다시 무대로 복귀했다. 의자에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저번 첫 팬미팅도 그랬지만, 팬들은 참 작은 것에도 좋아했다. 웃기만 해도 자지러지고 손만 흔들어도 행복해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중한 존재였다.

“이제 어느새 1부가 끝나가는데요.”

그 말에 아쉬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오늘 수한 씨가 특별한 무대를 준비하셨다면서요?”

특별한 무대.

배우로서 팬미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특히 배우라서 할 수 있는 일들.

“네, 기대하세요.”

유수한이 잠시 대기실로 돌아와 머리를 만지고 옷을 갈아입었다. 익숙한 물건 하나를 손에 든다. 어느새 무대에서 시간을 끌던 조은희가 퇴장하고 있었고 조명이 한순간 모두 꺼졌다.

“어?”

“이거 그거 아니야?”

익숙한 OST가 흘러나왔다.

서정적인 영화 OST. 바로 유수한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겼던 ‘내 심장을 향해 쏴라’ 주제곡이었다. 이윽고.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에이, 이 새끼 또 늦네.”

정동인의 목소리.

아니, 이인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서히 무대가 밝아진다. 정동인은 영화에서 입었던 의상을 똑같이 입고 있었다. 극중에서 실업팀 유니폼을 자주 입었던 정동인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까마귀 소리가 울린다.

다소 머리가 길지만, 서윤한의 모습을 한 유수한이 총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걸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진 유수한은 없어졌고 무뚝뚝한 서윤한이 그대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

짜증 섞인 얼굴로 서윤한을 기다리던 이인태의 얼굴이 당황해 굳는다.

“그렇게 됐습니다.”

서윤한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이인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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