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가장 높은 곳에
유수한은 웃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PD상 역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수한은 주변 사람을 돌아보며 천천히 무대로 걸어갔다. 시상식 분위기가 묘했다. 거의 대부분 사람이 PD상 수상자로 유수한이 아닌 안정석을 예상했다. 그렇기에 다들 축하하면서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 헐 유수한?
- 유수한이 PD상이라고??
- 엥? 갑자기 유수한???
- 설마 진짜 대상 안정석임?????
- SBC 무슨 생각이냐?
- 이 와중에 안정석 잡는 거 봐 ㅋㅋㅋㅋ
└ 안정석 표정 관리 하는데?
└└ 지금 안정석이 제일 놀란 듯 ㅇㅇ
└└└ 맞아 유수한은 여유로워
안정석은 처음에는 놀라 눈이 커졌지만, 지금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당연히 PD상은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대상을 자신에게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이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이번 SBC 연기대상에서 이변이 일어날 만한 일이 있을까? 힘들었다. 유수한은 지금 전성기나 다름없었다.
“감사합니다. 상의 무게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PD상은 저에게는 굉장히 값진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수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대상에 대한 생각은 지운 상태였다. 아직 젊었고 앞으로 기회는 무궁무진했다. 지금 받지 못한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 혹시 유수한 PD상도 주고 대상도 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 ㅋㅋㅋ 그런거면 안정석 불쌍한데
└└ 아, 이거 같다..
└└└ 이거면 안정석 미리 애도...
└└└└ 정석아 그렇게 됐다
└└└└└ 22 그렇게 됐다
여러 가지 추측이 나왔다. 우선 PD상 수상자가 유수한으로 밝혀지자, 다소 떨어지던 긴장감이 오르고 있었다.
“배우로서 어떻게 하면 더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많은 PD님을 만났고 많은 조언을 받으며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객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유수한의 팬들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평소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이 추운 날에 저 하나 보겠다고 여기까지 와 준, 그리고 지금도 생방송으로 저를 보고 있을 빛유 팬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늘 부끄럽지 않은 배우 유수한이 되겠습니다.”
물론, 유수한이 팬을 언급했을 때는 참지 못하고 까마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약간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매니저가 따로 팬에게 보내 준 이번 연기대상 방청권은 유수한이 대상 유력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 모든 경쟁을 뚫고 여기까지 온 팬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대상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뒤틀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모르는 일이다. 아직 대상 수상자가 발표되지 않았고, PD상을 받았다고 한들 대상 후보 자격이 박탈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방금까지 당연히 대상을 받을 거라 생각했기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 SBC 바보 아님 ㅋㅋㅋㅋ 대상 유수한 안 준다? 성실이랑 척지는 거야 ㅇㅇ
└ 요즘 공중파가 예전 같지도 않음 성실이가 배우들 타 방송국에만 돌릴 듯
└└ ㅇㅈ 이제 방송국에서 배우가 갑임 ㅋㅋㅋㅋ
└└└ 유수한 대상 아니면 욕 엄청 먹을 텐데, 과연 SBC가 안정석을 줄까?
- 설마 공동수상?
└ 헐, 그건 진짜 에바다
└└ 그건 안정석에게도 못할 짓 아니냐 ㅋㅋㅋㅋㅋ
└└└ 일단 유수한이나 안정석 둘 다 싫어할 듯
└└└└ 그건 배우에게 예의가 아님
└└└└└ 공동수상이면 불판 난리나겠네 ㅋㅋㅋㅋ
물론 대상 공동 수상이 없는 건 아니다. 누구 하나 선택하지 못했을 때, 방송사에서 공동 수상이라는 이유로 상을 뿌리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응이 좋았던 적은 손에 꼽았다.
누가 봐도 대상 적임자였던 중년 배우와 시청률과 연기력 모두 거머쥐었던 젊은 배우가 대상을 두고 충돌한 적이 있었다. 그 정도가 되어야 공동 수상이 납득이 된다. 누가 봐도 대상은 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눈치를 보듯이 한 명을 끼우는 일은 그림이 좋지 않았다.
유수한과 안정석, 두 사람 모두 젊은 배우였고 톱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유수한은 드라마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고 안정석은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유수한이 대상을 받아야 옳았다.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다들 유수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럼요. 상 받았는데, 축하할 일이죠.”
오히려 유수한이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상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축하받을 일이었다. 언제나 겸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상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PD상을 받고 나니, 마음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대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인기상, 베커상은 물론 PD상까지 받았다. 대상을 받을 기회는 앞으로도 열려 있었다. 지금 받지 못한다고 해도 끝이 아니었다.
- 궁예해보자 대상 유수한이면 1 안정석이면 2
└ 1111111 어차피 대상은 유수한 어대유
└└ 1111
└└└ 2222 잘하면 안정석일 수도
└└└└ 11111 이변은 없다
└└└└└ 33 공동수상 아님?
└└└└└└ 333 나도 공동수상
이제 딱 하나만 남았다. 가장 중요한 상, 대상 수상자가 나올 차례였다. 유수한은 이제 마음을 놓았기 때문에 한결 편한 얼굴로 시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MC석에서 진행을 하던 개그맨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함께 진행했던 두 사람도 따라온다.
“이제 마지막 대상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유수한은 차분히 진행을 지켜보았다.
“대상 시상을 하기 전에, 지금 바로 후보자를 만나 보겠습니다.”
올해 연기대상은 여러 가지 진행 요소가 달라졌다. 보통 대상 시상은 후보자를 무대 위로 올리지 않고, 바로 전년도 대상 수상자와 SBC 사장이 나와 시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구성이 달랐다.
“네, 유수한 씨 올라오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훤칠하고 잘생겼네요.”
올해 대상 후보자는 총 4명이었다. 유수한과 안정석은 미니시리즈의 남자 주인공이었고 남은 배우 두 명은 50부작 주말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었다. 사실상 주말극의 두 주인공은 구색 맞추기나 다름없었다. 이미 최우수상을 받았기에 두 사람의 대상 수상 가능성은 0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경쟁의 후보는 유수한과 안정석으로 좁혀졌다.
“짧게 인터뷰를 진행할까 하는데요.”
이미 대상 후보자의 VCR은 1부가 끝나기 전에 한 번 흘러나왔고, 2부가 시작하기 무섭게 또 다른 영상이 흘러나왔었다. 총 두 차례 후보 영상을 공개했기에, 추가 영상은 준비하지 않고 그 대신 인터뷰로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우선 유수한 씨에게 재밌는 질문이 들어왔어요.”
어느새 유수한에게는 마이크가 전달되었다.
“수한 씨는 미남 배우로 유명하잖아요. 본인 스스로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잘생겼다고 생각하면 얼마만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자세히 말해 달라네요.”
연기대상 공식 홈페이지는 3주 전에 오픈되었다. 따로 시청자 게시판이 있었고 그곳에서 QnA 이벤트를 진행했었다. 질문이 채택되면 소정의 상품이 전달되는 방식이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본인이 잘생겼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질문에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이크를 든 유수한은 선선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잘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거짓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유수한이 되었을 때, 거울을 보았던 그 순간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때의 유수한은 몸 관리를 하지 않아서 술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잘생겼었다. 말 그대로 유수한은 태생이 잘생긴 놈이었다.
“네, 수한 씨는 스스로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군요.”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수한은 고개를 숙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솔직하게 말했지만, 뒤늦게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잘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옆에 서 있던 여자 MC가 물었다. 유수한은 짧게 생각하고는 마이크를 들며 말했다.
“얼마만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거울을 보면 늘 흡족할 정도로 잘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아, 좀 부끄럽네요……. 하하.”
“늘?”
“네, 늘.”
“그렇죠. 저도 유수한 씨여도 매 순간 잘생김에 취할 것 같아요.”
사실 그런 거다. 잘생긴 건 좋은 매력이었다. 물론 잘생긴 얼굴에 연기도 잘하고 또 다른 내적인 매력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애초에 잘생김은 탁월한 매력이었다.
- 잘생겼지 유수한 외모로는 못 까
- 역시 얼굴 천재
- 하긴 그렇지 유수한은 생얼도 잘생겼음 ㅇㅇ
- 잘생겼는데 씹덕미도 있다? 개미지옥임 ㅋ 유수한 입덕하면 못 벗어나. 그게 나야 ㅅㅂ
└ ㅇㄱㄹㅇ ㅃㅂㅋㅌ
└└ 내가 진짜 유수한 입덕 안하려고 하잖아 입덕하는 순간 현생 불가능임
└└└ 맞아... 내가 그래서 지금 허덕이고 있음... ㅠ
└└└└ 탈덕을 어떻게 해여ㅠㅠㅠ 떡밥이 안 떨어지고 계속 입에 처넣고 있는데 ㅠㅠㅠㅠ
그다음 인터뷰는 작품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수한은 평이한 대답을 늘어놓았고 다음 사람에게로 차례가 옮겨 갔다. 그러고 보니, 유수한에게는 대상에 관련된 질문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대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이 나왔는데, 유수한에게는 이상하게 없었다. 그래서 더욱 대상에 대한 마음을 놓게 되었다.
“자, 지금 대상 수상자가 적힌 봉투가 도착했습니다.”
올해는 대상 후보자를 무대에 세운 상태에서 시상을 진행할 모양이다. 유수한은 왜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작년에 대상을 받았다면 올해도 연기대상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사고 쳤었나?’
딱히 연예계 가십거리에 관심이 없었기에,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 엥? 올해는 MC가 대상 시상해? 최시안 어디감??
└ 최시안 깜빵 갔잖아
└└ ㅋㅋㅋㅋ 최시안은 오고 싶어도 못 와
└└└ 최시안 지금 깜빵에서 감기약 처먹으면서 자고 있을 듯
└└└└ ㅋㅋㅋㅋㅋ 너 외국 갔다 왔냐?ㅋㅋㅋ 약쟁이 왜 찾앜ㅋㅋㅋㅋㅋ
그렇다.
올해 SBC 연기대상에서 전년도 수상자가 아닌, MC가 시상을 대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전년도 수상자였던 톱스타 최시안이 마약 상습 투약과 성추행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었다.
최시안은 톱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징역을 피하지 못했다. 단순한 마약 사고였다면 어떻게 뇌물을 먹여서라도 집행유예를 이끌어 냈겠지만, 성추행 혐의가 컸다. 약에 취한 상태로 일반인을 건드렸는데, 그 수가 10명이 넘어갔다. 마약을 투약한 혐의에 더해 상대를 강제로 끌고 가 추행했던 장면이 CCTV에 그대로 찍혀 물증이 확실했고 피해자 수가 많아, 사건을 묻을 수가 없었다.
최시안의 마약 스캔들은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마약 청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위치가 흔들리는 건 물론, 정치권에서도 최시안의 사건을 엄중히 지켜보겠다는 반응까지 나와 최시안은 그대로 배우 인생을 마감했다.
‘아, 걔였나. 작년 대상이.’
뒤늦게 유수한도 기억나는 듯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이래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아니,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게 유수한의 인생 지론이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
“자, 발표하겠습니다!”
유수한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 SBC 드라마를 빛낸 영예의 대상 수상자는!”
봉투가 열렸다.
이제 내용을 확인하면 누가 대상인지 알 수 있었다. 수상자를 확인한 MC가 미소를 지었다. 마이크를 든 그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원범 역을 맡은 유수한 씨입니다!”
폭죽과 함께 환호성이 터진다.
경쟁자였던 안정석은 씁쓸한 듯 고개를 숙였고 이내 프로답게 유수한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유수한은 당황했다. PD상을 받은 후에 아예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
대상 후보자들이 유수한에게 다가가 축하해 주고 있었다. 유수한은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보다가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트로피가 주어진다. 처음 S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해, 민서온이 대상을 받았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민서온은 눈부시게 멋있었고, 그 순간이 제게도 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마이크 앞에 선 유수한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여전히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트로피를 들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 가, 감사합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던 유수한이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에도 그 누구도 책망하지 않았다. 지금 유수한은 이 시상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떨리는 눈으로 객석을 둘러본다. 팬들이 울며 소리치고 있었다. 상은 유수한이 받았는데, 왜 팬이 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감사했다.
조금씩 흥분한 마음을 진정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가장 높은 곳에서 유수한은 계속 울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김대한으로 살았던 날이 스쳐 지나갔고 유수한이 되어 배우로서 거듭나던 순간도 떠올랐다.
유수한은 잠시 옆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트로피는 바닥에 잠시 내려놓고 그대로 큰절을 올린다. 그대로 몇 초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시상식장에 적막이 흘렀다.
“앞으로 더 좋은 배우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고 굵은 수상 소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