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PD가 주는 상
연기대상이건, 연예대상이건 어느 시상식이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상 부문은 ‘신인상’이었다. 대상 같은 경우는 전년도 수상자가 시상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기에 제작진이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신인상은 다르다. 생애 단 한 번 받는 상이기에 누가 주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그렇기에 유수한이 신인상 시상자가 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연기대상 제작진 역시도 수상자가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회의를 하며 누가 받을지를 예상한 후에 시상자를 고른다. 어떤 때는 시상자가 먼저 정해질 때도 있었다.
“양순아, 축하한다.”
유수한의 애드리브는 제작진이 생각했던 그림을 완벽하게 연출했다. 여기저기서 작은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상자는 한초원 씨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상을 받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다. 한초원은 이미 유수한이 예고했음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 유수한 센스 지렸다 ㅇㅈ?
└ ㅇㅈㅇㅈㅇㅈ
└└ 크으 드덕들 환장하는 소리 들린다 ㅋㅋㅋㅋㅋ
- 양순아..축하한다..드르륵..탁..양순아..축하한다..드르륵..탁..양순아..축하한다..드르륵..탁...
- 웬일로 단독 수상자냐?
└ 2222 깔끔하네
└└ 33333 당연히 공동수상일 줄 ㅋㅋㅋㅋ
└└└ 444444
└└└└ 5555
요즘 시상식은 공동 수상을 남발한다. 그러다 보니 권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단독 수상자라 무게감이 느껴진다는 평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 시작이었다. 처음이 좋았다고 해서 끝까지 좋을지는 미지수였다.
“축하해요.”
유수한이 트로피를 건네주며 말했다.
“떨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해요.”
받을 만한 사람이 상을 받았음에도 한초원은 떨고 있었다. 유수한은 한초원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상은 개인에게 어떤 느낌일까.
유수한에게 상은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만들어 준다. 배우 일을 하는 건 즐거웠다. 연기를 통해서 새로운 인물을 경험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보상이 주어진다면 더 큰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게 상이었다.
“감사합니다.”
유수한은 뒤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한초원을 지켜보았다. 시상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실감 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유수한 역시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상을 받을지에 대한 생각은 최대한 잊으려고 했지만, 역시 머리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솔직히 받으면 좋겠지.’
언제나 그렇듯 담백하게.
너무 많은 욕심을 품으면 받지 못하게 될 경우 실망하게 된다. 그렇기에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늘 그렇듯 사람이라 쉽지 않았다.
“첫 드라마 주연을 맡아서 부담감에 시달렸을 때, 많이 도와준 나의 왕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한초원은 딱 FM 스타일이다. 말도 별로 없고 일에만 집중하는 스타일. 그렇기에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도 풍긴다. 그래서 수상 소감도 한초원답게 할 줄 알았다. 줄줄이 기억해 둔 사람을 읊거나, 아니면 수상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짧게 소감을 끝낼 줄 알았다.
살짝 뒤돌아본 한초원이 유수한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순간, 그 모습이 참 반짝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을 들고 밝게 웃는 얼굴을 보며 유수한이 화답으로 박수를 쳤다.
- 둘이 모야?
└ 22 비즈니스?
└└ 333
└└└ 4444 비즈니스는 아닌 것 같은데
└└└└ 555 모야모야? ㅁ_ㅂ
- 양순이가.. 나의 왕이라고 말했다...
└ 나의왕.. 드르륵 탁... 나의 왕... 드르륵 탁... 나의 왕... 드르륵 탁...
└└ 진짜 오늘 나는왕 덕후들 죽이려고 환장했나 봐 ㅠㅠㅠㅠ
└└└ 오늘 진짜 원양이들 떡밥 오진다 ㅠㅠㅠ
└└└└ 제가 나는왕 과몰입 덕후처럼 보이나요? 정답입니다 ㅋ
항상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로맨스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도 로맨스를 상상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초원과의 그런 오해는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남자와 엮여 봐서 그런가? 이제는 뭐 별생각도 들지 않았다.
* * *
SBC 연기대상에 참석하면 상 하나를 두둑하게 챙겨 가는 것 같다. 인기상만큼은 유수한이 침 발라 놓은 격이었다. 자연스럽게 인기상이 테이블 위에 놓였고 그다음은 베스트커플상이었다. 예전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좋았을 상이지만, 이번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베스트커플상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정우와의 베스트커플상은 여전히 충격이 컸다. 한동안 대형 커뮤니티의 주요 플로우는 이정우와 유수한의 베스트커플상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베스트커플상만큼은 손에 거머쥐고 싶었다.
“사실 촬영하면서 저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초원 씨거든요. 저는 실내 촬영이 많았는데, 초원 씨는 산도 뛰어다니고 넘어지고 맞고 그래서, 함께 이렇게 상을 받게 된 건 다 초원 씨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ㅋㅋㅋㅋ 와, 유수한 온도차 보소 ㅋㅋㅋㅋㅋㅋ 이정우 섭섭하겠다 ㅋㅋㅋ
└ 내 말이 ㅋㅋㅋㅋㅋㅋ
└└ 온도차 지려 ㅋㅋㅋㅋㅋㅋ
└└└ 이정우는 차가운 프라푸치노였다면 지금은 부드럽고 따뜻한 카페라테 같아 ㅋㅋ
└└└└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
└└└└└ 역시 공식은 원양이지 ㅋㅋㅋㅋ
두 번째 상을 테이블에 놓았다. 언제 시상식이 끝날지 모르지만, 유수한은 이 상을 들고 집에 돌아가 진열할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이제 시상식은 조금씩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굵직한 상이 남아 있다. 우수상과 최우수상, 그 이후에는 PD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은 역시 연기대상이었다.
- 사실상 PD상 받는 사람은 대상 탈락인거지?
└ ㅇㅇ 대상후보인데 대상 못 받으면 아까운 사람에게 주는 상
└└ 거의 그렇지
└└└ 지금 안 그래도 긴장감 없는데 피디상이 더 긴장감 떨어뜨릴 듯 ㅋㅋㅋㅋ
└└└└ 222 맞아 유수한이라고 못 박는 수준일 듯
대부분 사람이 이번 연기대상의 대상을 유수한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시청률이나 화제성, 그리고 배우 개인의 인지도까지 타 배우를 압도했다. 하지만 유수한은 쉽게 단정 짓지 않으려 했다. 너무 기대하면 아닐 경우, 더 실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상은 부담스럽다. 아직 받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 상을 받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지금 받아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남자 우수상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서브 남주였던 배우가 받았다. 오늘 SBC 연기대상은 전체적으로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독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서브 여주였던 중전 역을 맡은 배우도 우수상을 받았고, 심지어 작가와 감독까지 상을 거머쥐었다. 말 그대로 축제, 축제였다.
- 한초원 신인상으로 끝인가? 그래도 주인공인데...
└ 신인상에 베커상까지 줘서 이게 끝일 듯?
└└ 그렇긴 한데, 신인이긴 해서 ㅋㅋㅋ
└└└ 솔직히 우수상 받을 줄
└└└└ 맞아 주인공인데 이대로 끝나면 좀 아쉬울 듯
그러거나 말거나, 한초원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인상을 받고 나서는 더 상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긴장도 풀린 얼굴이었다. 오히려 지금 드라마 팀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 유수한이었다.
“최우수상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시간이 성큼성큼 흐른다. 유수한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대상 시상이 다가올수록 묘하게 긴장감이 몰려오는 건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축하합니다. 한초원 씨.”
예상하지 못한 수상자에 ‘나는 왕이로소이다’ 팀 테이블이 들썩거렸다. 유수한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함께 있던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최우수상 후보는 우수상과 동일했다. 한초원은 매체 데뷔를 한 지 얼마 안 된 배우였고, 그렇기에 우수상을 받지 못해서 이제 받을 상은 없을 듯했다.
- 와, 대박
└ 반전 오진다 ㅋㅋㅋㅋㅋ
└└ 최우수상도 결국 나는왕이 가져가네 ㅋㅋㅋㅋ
└└└ 양순이 ㅊㅋㅊㅋㅊㅋ
여전히 한초원은 얼떨떨한 눈치였다. 커진 눈으로 멍하니 주변을 살피던 한초원은 주변에 모여 있는 배우들이 박수를 치며 다가오자, 뒤늦게 실감하는 듯한 눈치였다.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한초원이 많은 축하를 받으며 무대로 걸어갔다.
유수한은 진심으로 축하를 하고 있었다. 오늘 함께한 배우들이 모두 상을 받아서 좋았다. 누구 하나만 빈손이면 미안해지는데, 오늘은 그럴 일이 없었다. 함께 뒤풀이에서 이 기쁨을 나누면 된다.
- 피디상 누가 받을 거 같음?
└ 일단 유수한은 아님
└└ 22 일단 유수한은 아니고 안정석? 일 듯
└└└ 3333 일단 유수한은 아님
└└└└ 44444 안정석 유력
└└└└└ 55 안정석일 듯? 시청률은 아쉽지만, 배우는 연기 존잘이었잖아
PD상은 말 그대로 PD가 주는 상이었다. 드라마국 소속 PD가 전부 투표해서 정해지는 상이었기에, 최우수상만큼 의미가 깊었다. 말 그대로 임원이 뽑는 게 아니라,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뽑는 상인 만큼 더더욱 무게감이 있다.
어쩌면 가장 정확한 평가가 들어간 상일 수도 있었다. PD들은 현장에서 배우와 함께 호흡하기에 가장 정확한 시선을 갖고 있다. 그들이 뽑은 상이 곧 대상일 수도 있었고, 그렇기에 대상을 받지 못하는 배우를 달래는 듯한 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보통 연기대상은 연기도 중요하지만, 결국 성적을 가장 중시한다. 드라마의 시청률, 화제성 등을 종합해서 결론짓는다. 그렇기에 성적은 아쉽지만, 연기는 좋았던 안정석의 수상을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드라마국 소속 PD에게 투표를 받은 결과가 바로 여기 이 봉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유수한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드라마국 국장을 바라보았다. 파트너 없이 홀로 입장한 그는 봉투를 들고 연설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올해, SBC를 빛내 준 배우를 드라마국 PD가 직접 뽑는 이 상은 그 어떤 상보다 의미가 깊을 거라 확신합니다. 저도 마지막에 투표했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고 들었습니다.”
- ㅋㅋㅋㅋㅋ 그래봤자, 대상에서 밀린 후보 줄 거면서 ㅋㅋㅋ
└ 맞아 ㅋㅋㅋ 매년 그랬잖아
└└ 응~ 결국 안정석~
└└└ 솔직히 유수한 없었으면 안정석이 대상 쌉가능이지
└└└└ ㅇㅈ 나는왕 자체가 편성도 못 받던 거 유수한이 끌고 온 거잖아 ㅋㅋㅋ
└└└└└ 어차피 대상은 유수한
그 말대로 안정석은 이미 마음을 놓은 듯했다. 특별상 하나를 받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아쉬운 상이었다. 그렇기에 PD상이라도 받아야 면이 설 듯했다.
“자, 이제 이 봉투를 열어 보겠습니다.”
드디어 PD상의 수상자를 발표할 순간이었다. 괜히 유수한도 긴장되어 목이 탔다. 물을 마시고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는 그 순간, 드디어 봉투에서 카드가 드러났다.
진중한 눈으로 수상자를 확인하던 국장의 눈빛이 빛났다. 마치 이 수상자를 예상했다는 듯,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탁.
물병을 내려놓은 유수한이 심호흡을 했다.
“개인적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한 배우입니다. 아니, 성장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이미 완성형인 배우죠. 축하합니다.”
시상자가 봉투를 든 채로 미소를 지었다.
“올해 SBC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원범 역을 맡은-”
아.
“유수한 씨입니다.”
아무래도 대상은 아닌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