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56화 (156/175)

156. 야, 떨어져

연기대상 출연진은 대부분이 배우였다. 물론 전부 배우는 아니었다. 진행 같은 경우는 중심이 되는 사람은 대부분 개그맨이었다. 반면 연예대상 출연진들은 구성이 다양한 편이었다.

유수한은 작가와 짧게 대본 리딩을 하고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은 유수한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시상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널 여기서 다 보네.”

민서온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예능 ‘캐스팅’팀은 테이블을 두 개 사용했고 유수한은 같은 소속사인 민서온과 함께 테이블을 썼다. 분위기는 흥겨웠다. 예능인 특유의 익살맞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풍기고 있었다. 리액션도 전체적으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배우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와.”

KBC 연예대상의 포문을 여는 1부 축하 무대가 시작되었다. 올해 히트쳤던 곡이 메들리로 나온다. 걸그룹 노래는 남자가 여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보이그룹 노래는 여자가 반대로 남장을 했다.

연기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이라, 유수한은 살짝 입을 벌리고 박수를 치며 공연을 보고 있었다.

- 그래, 연예대상은 처음이지? 유수한 입에 나방 들어가겠다

└ ㅋㅋㅋㅋㅋㅋㅋ 갑분 나방 뭐야 ㅋㅋㅋㅋㅋ

└└ 앜ㅋㅋㅋㅋㅋㅋㅋ 나방 들어갈 정도로 입 벌리진 않았다고 ㅋㅋㅋㅋ

└└└ ㄱㅇㄱ ㅋㅋㅋㅋㅋㅋㅋㅋ

└└└└ 또 유수한이 댕청미를 뽐내네 ㅋㅋㅋㅋㅋ

그저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기했을 뿐이었다. 연기대상에서는 보통 가수가 와서 축하 무대를 꾸며 주거나, 신인 배우를 모아 어색하게 춤추는 공연 정도가 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빠, 나랑 사귈래?”

듬직한 체구의 개그맨이 여장한 채로 씩씩하게 걸어와 유수한에게 끼를 부렸다. 그 순간, 당황한 유수한의 얼굴이 잡혔고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 그대로 방송에 나왔다.

“이거 먹으면 나랑 사귀는 거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빵이었다.

모닝빵. 먹으라는 듯 입에 들이대는 빵을 유수한은 눈치를 보다 결국 한 입 베어 물었다. 결국 이것도 방송이다. 시상식 이전에 방송이었기에 유수한은 당황하면서도 방송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수한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

- 유수한 오늘 댕청미 졸라 폭발하네 ㅋㅋㅋㅋㅋㅋ

- 아 커여워 미쳤어 존나 귀여워 댕댕이같아 ㅠㅠㅠㅠ

- 뚝딱거리면서도 콩트 맞춰주니까 넘 좋다 ㅋㅋㅋㅋㅋ

- 내 남자 놀라는 것도 참 잘생겼네 ꈍᴗꈍ

└ 혹시 도르신?

└└ 도른게 분명

└└└ 약빨 떨어진게 분명

└└└└ 도른게 아니라면 아픈게 분명

└└└└└ 아픈게 아니라면 미친게 분명 ㅇㅇ

- 모닝빵 들고 계속 먹고 있는 거 나만 귀여워? ㅋㅋㅋ

└ 2222 ㅋㅋㅋㅋㅋㅋㅋ 옴뇸뇸뇸뇸

└└ 33333 존나 귀여워 ㅋㅋㅋㅋㅋㅋㅋ

└└└ 444 싫을 수도 있는데 저러니까 너무 귀여워 ㅠㅠㅠㅠㅠㅠ

└└└└ 5555 씹덕사 당할 것 같음 ㅠㅠㅠㅠ

유수한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개그맨의 연기에 맞춰 주었다. 여기서 가끔 정색하는 배우도 있었지만, 유수한은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뭔들 못 할까.

반응은 좋았다. 객석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유수한의 팬이 무대가 떠나갈 정도로 꽥꽥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분위기는 말 그대로 화기애애했다.

“네, 축하 무대 덕분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네요.”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1부, 신인상을 시작으로 수상자가 호명되었고 다들 얼굴에 기쁨이 묻어 있었다. 딱히 유수한이 할 일은 없었다. 자리를 채우고 수상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면 진심을 다해 축하하는 것. 딱 그 정도였다.

“왜, 예능에도 요즘 말로 케미스트리라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서로 잘 어울리고 마치 커플 같아야 그 프로그램도 살거든요.”

“네, 맞습니다. 다음은 그 케미가 잘 맞는 커플에게 주는 상입니다.”

유수한이 맡은 시상은 ‘베스트커플상’이었다. 같이 시상할 사람은 개그우먼이었는데 입장하기 전부터 설레어하는 게 보였다.

“저, 베스트커플상인데…….”

개그우먼 이윤서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팔짱 끼고 가도 돼요?”

예전에는 시상하러 갈 때면 팔짱을 끼는 경우가 흔했다. 지금은 팔짱을 끼는 것보다는 각자 입장하는 게 더 많아졌다.

이윤서는 데뷔 10년 차 개그우먼이었고 계속 무명 생활을 하다가, 올해 개명을 하면서 서서히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무명 생활이 길었던 만큼, 이윤서는 지금 이 시상식이 그 누구보다 뜻깊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유수한은 유수한이었다. 개그우먼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네, 그렇게 하죠.”

“정말요?”

유수한은 웃으며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베스트커플상 시상이니, 팔짱을 끼고 들어가는 데 의미도 있었다. 유수한을 굳이 베스트커플상 시상을 맡긴 이유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유수한이라면 대부분 여자들이 연애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팔짱을 끼고 팔로우하는 카메라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운 미소를 건 채 무대에 등장하자,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배우 유수한입니다.”

팔짱을 풀고 마이크 앞에 선 유수한이 먼저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이 최고의 날이 된 개그우먼 이윤서입니다.”

입장할 때부터 이윤서는 수줍어하면서도 개그우먼다운 익살을 보여 주었다. 괜히 유수한의 어깨에 살짝 기대는 척도 하고 마치 연인인 것처럼 과장된 행동을 했다. 그럴 때마다, 객석에서는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제가 올해가 데뷔 10년 차인데요. 10년을 남을 웃기며 살다 보니, 이렇게 제가 웃게 되는 날도 오네요. 수한 씨, 영광입니다.”

대본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영광이죠.”

유수한은 당황하지 않고 이윤서의 멘트를 잘 받아 주었다. 당황할 일도 아니었다. 유수한으로 살다 보면 이런 호감을 얻는 일은 흔했다. 그렇기에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익숙해졌다. 별걸 하지 않아도 외모로 받는 호감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제가 최근에 타 방송사이긴 한데, 드라마 정말 잘 봤거든요.”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살짝 보여 주실 수 있으세요?”

“어, 그 드라마 배역처럼요?”

“네. 왕처럼요!”

대본에 적혀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 진행 흐름만 적혀 있고 철종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은 애드리브였지만, 그렇기에 유수한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

“흠.”

유수한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 나는.”

고개를 돌려 이윤서를 보았다.

“너를 품을 것이다.”

이왕 하는 거, 발칙하더라도 여심을 자극하는 말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객석은 소리 지르고 난리 났고 이윤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윤서는 1초간 방송을 잊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안 되나요? 저 지금 당장 가능한데.”

유수한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지금은 어서 베스트커플상 시상을 해야 하거든요.”

“네, 맞습니다. 제가 지금 잠깐 본분을 잊었네요.”

“지금 바로 후보부터 보겠습니다.”

준비된 영상이 나가는 동안, 유수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객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도 꽤 많은 팬들이 방청을 왔다. 듣기로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듯했다. 이벤트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팬에게는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팬질을 하다 보면 출근길, 퇴근길이라는 말이 있었다. 방송국에 일하러 가는 연예인의 출근길을 따라가 얼굴 한 번 보고 녹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퇴근길에 얼굴을 또 보는 게 출근길, 퇴근길이었다.

배우는 연기를 주로 하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이벤트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상식에 배우가 참석하는 날이면 팬들은 전날부터 설렜다. 오랜만에 얼굴을 볼 기회였기에.

[빛유/자유] 흑흑흑 수한아 너는 면봉처럼 보이는데 왜 이렇게 잘생긴 거니? +29

[빛유/자유] 우리 전하 언제 봐도 잘생김 ㅠㅠㅠㅠㅠㅠ +11

[빛유/자유] 다들 연예대상 보고 있죠? 현장에 있는 사람들 겁나 부러움... +23

[빛유/자유] 내가 경기도만 됐어도 보러 갔을텐데... 서경 사람들 부럽... +75

생각해 보면, 덕질도 서울에 살아야 편하다. 서울에 가까울수록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러 가는 일이 수월했다. 유수한의 첫 팬미팅은 서울이었다. 일회성에다가 작은 공연장을 빌렸기에 못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언젠가는 더 늦지 않게 팬미팅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고 지방에 사는 팬들까지 폭넓게 챙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일이 커지겠지만, 유수한은 팬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질기군.”

유수한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우야, 너 진짜 연기가 하고 싶어?」

후보를 이미 확인했기에 알고 있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영상을 확인하니 혀를 차게 된다.

「네, 저 연기가 정말 하고 싶습니다.」

「…….」

「형, 저 형처럼 만들어 주세요.」

「그건-」

유수한은 다른 생각은 뒤로하고 영상을 보았다. 카메라는 벌써 이정우의 얼굴을 잡고 있었고 유수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힘들어.」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유수한의 진지한 얼굴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짧은 영상이 끝나고 유수한은 큐카드를 든 채로 박수를 쳤다.

“제가 이렇게 쭉 영상을 봤는데, 제가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이윤서의 말에 유수한이 의아한 듯 보았다.

“지금 저 밑에 앉아 있는 이정우 씨가 여기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아닙니다.”

유수한의 냉정한 반응에 이정우는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정우를 비추던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 나 이 커플 응원해 ㅋㅋㅋㅋㅋ

- 이정우X유수한 커플상 주라

- 둘이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 유수한 정색할 때가 제일 웃겨 ㅋㅋㅋㅋㅋ

- 유수한 이정우랑 엮이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그게 또 맛있어 ㅋㅋㅋㅋㅋ

└ 2222 존맛 없어서 못 먹음

└└ 33333 아, 내 안에 호모렌즈가....

└└└ 4444 ㅋㅋㅋㅋㅋㅋㅋ

└└└└ 55 ㅁ_ㅂ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다.

유수한이 지금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유수한은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네, 이제 시상하겠습니다.”

봉투가 뜯긴다.

그리고 유수한은 떨렸다. 상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혹시나 상을 받을까 봐 가슴이 떨렸다. 제발, 저 봉투 안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네, 총 두 커플이 탄생했네요.”

뭔, 공동 수상이야.

“축하합니다!”

유수한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배우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 제발 이러지 마.

“‘캐스팅’의 멘토 유수한 씨와 이정우 씨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남자와 커플상이라니. 그것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정우라니. 유수한은 굳을 얼굴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이정우가 폴짝대며 뛰어오는 꼴을 보니, 이게 지금 현실이 맞았다.

“형!”

저거 봐라.

평소엔 연기 더럽게 못하더니, 지금은 잘하네?

“수한이 형!”

이정우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아이돌 그룹 멤버였기에, 남자와 남자가 엮이는 일을 자주 겪었다. 그렇기에 유수한과 이렇게 얽히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이미 팬픽이라는 것에서 별짓을 다 하는 걸 두 눈으로 본 적도 있기에.

이게 또 은근 효과가 좋다. 팬서비스하듯이 원하는 그림만 조금 맞춰 주면 더 열광하기 때문이었다. 유수한은 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자신이 총대 메고 해 주는 거다.

“야, 떨어져.”

물론, 유수한은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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