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특별출연치고 분량이 없지 않다.
김 실장은 직접 준비한 의상이 까이는 걸 굉장히 기분 나빠 했다. 물론 배우 앞에서 대놓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기분 상했다는 걸 은근히 표현했다.
반면 보라는 유수한의 성격에 잘 맞춰 줬다.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유수한은 의상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기에, 요구가 납득할 만했기 때문이다. 이는 매니저 김민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건 배우로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예능이나 시상식 같은 경우는 웬만하면 주는 대로 입는 편이었다.
“수한 씨, 이건 어때요?”
보라는 백이현의 콘셉트를 확실히 잡아 놓았다.
처음 등장은 검정색이었고 극 흐름에 따라서 회색이 되었다가 점차 하얗게 변한다. 최후의 장면에서는 블랙과 정반대인 화이트였다. 의상에 백이현의 감정을 섞은 것이다. 윤화진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서서히 바뀌는 그의 감정을 표현했고, 유수한은 그 콘셉트가 좋았다.
“지금 입기에는 화려한 것 같아요.”
유수한이 김 실장의 의상을 전혀 입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현장에서 백이현에게 어울릴 만한 의상을 고르다 보니, 보라가 준비한 의상에 손이 더 갔던 것뿐이었다. 그는 김 실장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모른 체했다.
“비가 오면 좋겠네.”
백이현이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일부러 스케줄을 비 소식이 있는 날로 정해 놓았다. 비 내리게 하는 작업을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소나기가 내리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비가 아니라 눈이 되겠는데요?”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한동안 따뜻해서 함박눈이 아니라 비가 오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이러다 눈이 오게 생겼다. 유수한은 비를 맞아야 하는데,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물론 촬영은 가능하다.
비가 오지 않을 걸 대비해서 살수차도 준비했다.
“해야죠.”
안 그래도 얇은 옷차림이었다. 촬영하기 전에는 롱패딩을 입고 있어서 따뜻했지만, 벗으면 칼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뼈가 아릴 것 같은 추위였다.
“최대한 일찍 끝내야겠네요.”
NG를 내지 않고 빠르게 촬영을 끝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유수한은 따뜻한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몸을 녹이며 감정을 잡는다.
지금 찍을 장면은 단독이었다.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장면이었고 대사가 없었다. 주변 엑스트라들도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딱히 오래 걸릴 장면은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는 단역 배우들을 위해서라도 짧게 치고 끝내야 한다.
“레디, 액션!”
낮에는 햇빛이라도 있지, 해가 지면 겨울 날씨가 더 혹독해진다. 살수차가 가동되자 순식간에 몸이 젖어 버린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걸음이 빨라지는 사람들 사이에 백이현이 움직이고 있다. 감정을 잡으려 노력했다. 피부에 달라붙는 추위 탓에 입이 덜덜 떨리고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컷!”
살수차가 멈추고 수건을 든 스태프들이 달려온다. 유수한은 적당히 물기만 털어 내고 수건을 건네주었다. 젖은 몸 위로 롱패딩을 걸친다.
“한 번 더 갈게요.”
유수한은 모니터를 확인하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요?”
“네, 바로 가시죠.”
지체할 것 없다.
찍은 걸 확인하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감정에 몰입하지 못했다. 유수한은 얼어붙은 얼굴 근육을 풀며 숨을 골랐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네.”
롱패딩을 벗는다.
살수차가 가동되고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디-”
유수한은 감정을 잡으며 눈을 떴다.
“액션.”
지금 백이현은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에 무너지고 있다. 백이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돈 많은 집안에 잘생긴 외모 덕에, 조선인이라고 해도 여자들이 달라붙었다. 그 속에서 백이현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찾지 못했다. 원하는 여자는 쉽게 얻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컷!”
이제야 장면 하나를 끝냈다. 살수차가 멈추고 유수한은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 내고 롱패딩을 걸쳤다. 따뜻한 손난로를 두 손에 쥔 유수한은 찍은 장면을 확인했다.
“다음 촬영 바로 갑시다.”
아무래도 오늘 촬영이 끝나고 나면 지독한 몸살감기에 시달릴 듯했다.
“와, 엄청 젖었네요? 괜찮아요?”
다음 촬영장에는 주해원이 있었다. 주해원은 앞선 촬영을 실내에서 이어 가고 있었기에, 상황이 유수한보다는 나았다.
“춥죠. 근데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유수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를 맞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오는 장면. 윤화진은 백이현의 마음을 짓밟고 또 짓밟는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는 사람 같다.
“레디, 액션!”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일본식 가옥. 윤화진의 집안이 친일파라는 것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고 온몸이 젖은 백이현이 나타났다.
“사람이 왔으면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백이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그 어느 순간에도 윤화진은 돌아보지 않는다. 백이현에게 시선 하나 주기 아깝다는 듯.
“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윤화진은 거울을 보며 말했다. 거울 너머, 지금 백이현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젖은 몸으로 어딜…….”
더럽다는 투였다.
백이현은 그 목소리에 화가 치밀었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다가오던 백이현이 손을 뻗는다. 윤화진은 올곧은 눈으로 백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로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백이현이 주춤한다. 화를 내던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시선을 떨어뜨리는 백이현을 본 윤화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다.
“당신하고 내가 다른 게 뭐지.”
바닥을 보며 백이현이 작게 읊조렸다.
“똑같잖아.”
나처럼 나라 팔아먹은 부모 아래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왔으면서 뭐가 그리 달라서.
“왜 나만 죄인이 되어야 하는 거지?”
그 순간, 처음으로 윤화진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백이현은 윤화진이 갖고 있는 약점을 건드렸다. 윤화진은 깨우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가진 것을 팔아 독립 자금을 대고, 호시탐탐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녀는 곱게 자랐다. 부모가 일본의 개가 된 덕분에 지금도 안락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
처음으로 윤화진이 돌아본다.
겨울비에 젖은 백이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애처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돌아선 백이현은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탁.
문이 닫혔다.
“컷!”
비를 맞는 촬영이 드디어 끝났다.
유수한은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예정된 촬영은 끝이었다. 여기서 더 움직였다가는 몸이 상할 게 분명했다.
“고생했어요. 형.”
“일인데,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혹시 몰라 차에서 해열제를 먹었다. 이제 곧 영화 촬영도 마무리 단계였다.
시간은 성큼성큼 흐른다. 짧고 굵은 촬영이 아쉽기도 하면서 시원하기도 했다. 일 하나를 끝내는 건 언제나 오묘한 감정을 주는 듯했다.
“오늘 수고했다.”
차에서 내린 유수한이 호텔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일도 잘 부탁한다.”
* * *
KBC 연예대상.
처음으로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 참석하는 유수한이었다. 소속사에서는 작은 상을 하나 줄 거라고 예상했다. 참석한 배우에게는 웬만하면 상을 주는 분위기라, 그럴 확률이 높았다. 오늘 유수한에게는 시상자 역할도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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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수트.
유수한은 딱 몸에 맞는 블랙 수트를 입었다. 넥타이는 하지 않았고 셔츠 단추를 풀어 와일드한 느낌을 주었다.
- 유수한 블랙 정장 착붙이다 완전 ㅋ
- 행거치프 예쁘다 약간 나비같이 꽂았네 ㅋㅋㅋㅋㅋㅋㅋ
- 오늘 유수한 헤메코 완벽
└ 시상식 보면 유수한은 늘 갓벽함 ㅋㅋㅋㅋㅋ
└└ 핏도 딱 맞는다 ㅠㅠㅠㅠㅠㅠ
└└└ 얼굴도 잘하는데 옷도 잘함 ㅜㅜㅜㅜㅜ
└└└└ 오늘도 코디열일
연예인에게 스타일리스트는 중요하다.
아무리 잘생기고 예뻐도 옷을 제대로 입히지 못하면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오죽하면 팬이 코디가 안티라며 소속사에 항의하는 일도 생길까. 그렇기에 유수한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옷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유수한은 예능 ‘캐스팅’의 멘토들과 함께 레드카펫을 걸었다.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유수한이었다. 유수한은 여유 있게 레드카펫을 걸었고 기자들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와, 우리 멘토분들 오늘 참 멋있어요.”
레드카펫 끝에는 아나운서가 큐카드를 들고 서 있었다. 짧은 인터뷰가 진행된다. 유수한은 멀리 보이는 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플래카드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이미 유수한 손에는 손 편지가 가득 들려 있었다. 선물은 받지 않고 편지만 쏙쏙 뽑아 갔다.
“수한 씨는 오늘 연예대상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유수한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카메라가 보이고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연예대상이니, 수상하는 모든 예능인들에게 축하하는 마음으로 왔어요.”
말 그대로였다. 오늘 유수한은 상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받는다고 해도 머쓱할 듯했다.
“오늘 유수한 씨 상을 기대해 봐도 될까요?”
“저요? 아니요. 제가 예능국에서 한 게 없어서요. 받으면 좀 쑥스러울 것 같습니다.”
진심이었다.
상은 받을 생각이 없다. 만약 준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받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것도 아니고 짧게 출연하고 하차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상을 받는다는 건 그리 썩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유수한! 존나 잘생겼다!”
갑자기 크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유수한이 1초간 정적이었다가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하던 아나운서도 미소를 지었다.
- 미친 ㅋㅋㅋㅋㅋ 생방송이라 비속어 그대로 들어감 ㅋㅋㅋㅋㅋ
- 유수한 인기 존나 많네 ㅋㅋㅋㅋㅋㅋㅋ
- 근데 존나 인정이야 ㅋㅋㅋㅋ 유수한 개존잘임
└ 진심 비현실적인 미모
└└ 개존잘
└└└ 수트 입으니까 그냥 빛나 ㅋㅋㅋㅋㅋㅋ
인터뷰를 마치고 유수한은 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같은 멘토들은 이미 대기실로 움직이고 있었고, 유수한은 몰린 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수한!”
“수한 오빠!”
“수한아!”
여기저기서 유수한을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수한은 그 사이에서 편지만 골라 뽑아내고 있었다.
“고마워요.”
유수한이 손을 흔들며 대기실로 향했다.
[HOT] 연예대상에서 선물은 안 가져가고 편지만 쏙 빼가는 유수한 +415
유수한은 사생팬이 하나 달라붙은 이후로는 개인 선물을 더 강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그 흔한 서포트도 금지였다. 커피차 역시도 웬만하면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찾아오는 건 괜찮지만, 자신에게 돈을 쓰는 일은 없게 했다. 그래야 서로 편한 관계가 될 수 있다.
- 인터뷰할 때 편지 들고 있는 거 멋있더라
- 진심 선물 다 외면하는 거 존멋ㅋㅋㅋ 본새난다 ㅋㅋㅋㅋㅋㅋㅋ
- 와, 지금 들어가면서 편지 읽어보는 거야?
└ 미친 감동이다 ㅠㅠㅠㅠㅠ
└└ 저 편지 준 팬은 오늘 잠 잘 수 있냐? 설레서?
└└└ 와, 헐... 이 모습을 아이돌이 싫어합니다
└└└└ 222 이 모습을 내돌이 싫어합니다
└└└└└ 33333 ㅅㅂ 이 모습을 내 배우가 싫어합니다 ㅋ
- 유수한 저런 모습이 너무 좋아 쓰레기통에 편지만 버렸던 어느 아이돌 생각남 ㅋ
└ 아, 걔네? ㅋㅋㅋㅋㅋ
└└ 한둘이 아니라서 ㅋㅋㅋㅋㅋㅋ
└└└ 그거 진심 마상이야 편지만 다 버린 거 ㅋ
└└└└ 진짜 유수한 보고 본받아야 한다니까;;;
유수한은 늘 기본만 하자고 생각했다.
팬이 있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늘 겸손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기에 이런 사소한 일로 칭찬받는 것이 의아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늘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