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54화 (154/175)

154.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시상식 시즌이 되면 스타일리스트는 비상이 걸린다.

그저 그날 하루 입는 옷이지만, 의미는 달랐다. 현재 트렌드를 살리면서도 입는 사람에게 어울려야 한다. 시상식 베스트 드레서가 아니더라도 워스트는 피해야 한다. 즉, 시상식 시즌 의상 확보는 스타일리스트에게는 자존심이었다. 그것도 같은 급이라면 더더욱 의상에 신경 써야 한다.

“오빠 시상식 의상은 제가 준비해야죠.”

당장 연예대상 시상식이 3주 남짓 남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기대상도 남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영화 촬영이 끼어 있어서 보라가 두 가지를 모두 소화할 수 없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소화하는 스타일리스트도 있지만, 시상식에 입을 완벽한 의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나누는 게 낫다. 더불어 유수한은 지금 톱이었다. 톱에게 한 명의 스타일리스트가 추가 지원되는 건 당연했다.

“그럼 현장은?”

매니저가 물었다.

“그 실장님 계시잖아요.”

“수한이 형이 싫어할 텐데.”

“왜요?”

“그 형이 은근 낯을 가려서.”

“뭐, 코디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다고.”

보라는 오랫동안 유수한의 의상을 담당했다.

유수한은 사람을 쓰면 웬만하면 바꾸지 않았다. 그 덕분에 유수한이 점차 성장하면서 보라 역시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위치가 올라가고 있었다. 보라는 성격은 틱틱거리고 무신경해 보이지만,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프라이드가 있었다.

지금 보라는 유수한을 전담하고 있다. 시상식 의상은 특히 공들여서 구하던 보라였다. 심지어 비겁하지만 선점도 한다. 지금은 경력이 붙고 실력도 붙으며 인맥도 따라와서, 이 시즌이 되면 자연스럽게 예약이 됐다. 보라가 연락하기도 전에 미리 유수한의 의상을 빼놓는 거다.

“이번에 명품 입힐 거라고요.”

“작년에도 입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다른데요.”

보라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유수한 담당 스타일리스트로서 시상식을 포기하는 건 뼈아픈 일이었다. 두 개 다 병행할 수도 없다. 유수한은 그 누구보다 꼼꼼한 사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촬영장에서 입을 의상만큼은 디테일하게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시대극이다. 지난 작품은 곤룡포를 주로 입었고 한복은 유명 디자이너에게 맡겼기에 한결 몸이 편했지만, 이번 작품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무척 많았다.

“뭐, 둘이 왜 싸우고 있어?”

유수한은 영화 촬영도 가까워졌으니 의상을 확인할 겸 회사를 찾았다.

“오빠.”

“어, 말해.”

“당장 현장에서 입을 옷은 준비했어요.”

“응, 근데.”

“저 시상식 준비하고 싶어요.”

“해.”

왜 저 말을 저렇게 힘줘서 말하는지 유수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보라가 힐끔 매니저를 본다.

“그럼 현장 의상 담당할 사람이 구멍이 나요.”

“김 실장 있잖아.”

“형, 낯선 사람 싫어하니까.”

“민수야.”

유수한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애냐? 그 짧은 시간도 못 버티게.”

가끔 매니저는 담당 배우를 애처럼 대할 때가 있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케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연예인이 많긴 했다. 애처럼 굴고 세상 물정도 몰랐다. 하지만 유수한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보라가 시상식 해. 매년 했는데, 올해 안 하면 쟤도 자존심 상하지.”

유수한은 노숙자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았다. 보라가 시상식에 목숨 거는 이유를 안다. 매년 해 왔고 유수한을 담당한다는 프라이드도 있을 것이었다. 근데 갑자기 시상식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하니, 저항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빠.”

“왜, 징그럽게.”

갑자기 은근한 눈으로 다가오는 보라를 보며 유수한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제가 뼈를 묻을게요.”

“뭐래.”

“저 진짜 독립할까 봐요.”

“독립?”

“다른 사람 필요 없고 오빠만 담당하고 싶어서.”

“아, 좋긴 한데 다른 의미로는 좀 징그럽다?”

현재 보라는 유수한을 담당하고 있지만, 회사 내에서 그 자리를 뺏길 뻔한 적이 있었다. 유수한의 위치가 올라가고 있으니 그에 걸맞은 유명한 스타일리스트를 붙여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물론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톱스타 유수한을 담당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보라는 아직 어리고 경력이 별로 없으니 밀어내기 쉬울 거라는 판단.

“오빠가 저랑 계속할 거라고 했을 때부터 전 이미 오빠에게 인생을 바쳤어요.”

“야!”

스타일리스트가 바뀔 뻔했을 때 유수한이 막아 주었다.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유수한은 보라의 빛나는 눈이 버거웠다. 체질에 안 맞았다.

“일단 그 초롱초롱한 눈부터 버려.”

“넹.”

“내가 네 실력 아니까 맡기는 거지. 네가 시상식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도 알아. 기본은 명품 입히면서도 그 안에 네가 직접 만든 수제 액세서리를 매치하잖아. 그것들 다 반응 좋았고.”

“감사합니당.”

“이럴 땐, 진지하게 들어.”

“네.”

보라가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눈으로 유수한을 보았다.

“네가 독립하면 나는 너에게 일 줄 거야.”

그건 신뢰였다.

보라는 일단 입이 무겁다. 어디 가서 유수한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저 그 느낌만 만끽했다. 예를 들어, 유수한 코디라는 이유로 수많은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유수한이 다른 유명 스타일리스트를 거절하고 보라를 선택했다는 일화가 퍼졌다. 스타일리스트는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유수한의 행동은 감동받을 만한 일이었다.

“오빠, 뼈를 묻겠습니다.”

“뼈를 왜 묻냐고!”

짧게 화를 낸 유수한이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됐고.”

“네.”

“일단 준비한 의상부터 보자.”

“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매니저가 듣고 있었다. 유수한이 의상을 확인하러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가던 김민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제가 독립하면-”

“넌 안 돼.”

“그렇게 딱 잘라서…….”

“이 대표님께 내가 받은 게 많아.”

“아…….”

“대신 넌 내가 보너스 많이 주잖아.”

유수한은 자신의 담당 매니저 김민수를 챙겼다. 명절이 되면 따로 보너스 개념으로 돈을 챙겨 주었고 연말에도 마찬가지였다. 김민수가 처음 유수한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불쌍한 매니저였다면, 지금은 천상에 있는 매니저였다.

다른 배우는 촬영이 없는 날에도 매니저를 부른다. 사적인 일정에도 매니저를 끌고 다니는 경우가 숱한데, 유수한은 그러지 않았다.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는 배우였으니, 김민수도 몸이 편했다.

“넌 일단 사업하면 안 돼.”

“네?”

“넌 월급쟁이 관상이야. 여기서 승진할 생각이나 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행거에 걸린 옷을 살펴본다.

“첫 촬영 때 쓸 의상이라고 안 했어?”

유수한이 꽤 많은 의상을 보며 말했다. 보라가 말없이 의상 하나를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자존심이죠.”

보라 손에 들린 건 직접 만든 의상이었다. 좋은 원단에,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었던지라, 가장 마음에 드는 의상이었다.

“근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해요. 메인 의상은 제가 만든 건데요, 세부적인 게 부족해서요.”

“그래.”

“일단 이 의상부터 입고 나오세요.”

깔끔한 블랙 정장.

수트는 유명 브랜드 의상을 사서 리폼했고 속에 입는 와이셔츠는 직접 만들었다. 그 시절 분위기를 살리려고 셔츠 카라 끝에 신경 썼다.

백이현은 부잣집 자제였다. 물론 친일을 하는 집안이다. 그렇기에 모든 의상은 모두 고급이어야 한다. 그 시대에서 딱 봐도 부잣집 자제로 보이는, 딱 봐도 일본의 발닦개로 보이는 모습이어야 한다.

“잘 어울린다.”

“좋아요. 딱 봐도 친일파 같네.”

유수한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백이현 초중반은 이런 느낌이에요. 잘 다린 셔츠처럼 친일 짓을 하며 사는 고고한 친일파?”

“고고한 친일파가 뭐야.”

“백이현 그런 느낌이지 않아요? 지가 하는 짓 모두 정당화하며 독립운동 하는 사람, 개돼지 취급 하잖아요. 지가 대단히 특별하다고 생각하니까. 존나 고고하죠.”

“너 점점 대본 해석하는 실력이 는다?”

“근데, 그게 다 허상이잖아요. 그 고고함이.”

보라가 후반부에 입을 의상을 보여 주었다.

“점차 백이현이 바뀌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 줄 거예요. 이건 시간 없어서 딱 한 벌씩밖에 못 준비했어요.”

사실 보라는 거의 밤을 새우며 의상을 준비했다. 일 욕심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손에 유수한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중요한 장면은 한 벌이라도 준비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마지막 장면은 쉬워요. 백의민족에 어울리는 흰 셔츠에 양복 바지예요.”

“응.”

“소매는 두 번 정도 접고. 늘 하던 시계도 이날은 없어요.”

“그래?”

“고고한 척하던 친일파가 정신 차리고 죽음을 각오했으니까요.”

생각이 겹쳤다.

유수한이 대본을 읽고 캐릭터 해석을 하며 생각했던 점이었다. 백이현의 마지막은 담백해야 한다. 손목시계는 물론 그 어떤 꾸밈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거, 이거, 이거.”

옷을 다 입어 본 유수한이 의상 세 벌을 골랐다.

“이렇게 쓰자.”

“나머지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좋은데.”

“근데요?”

“일단 후보, 킵.”

“하여튼 깐깐하시다니까.”

나머지 의상은 김 실장에게 맡기되, 세심히 확인한 후에 현장에서 고를 생각이었다. 입을 옷은 많을수록 좋다. 현장에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촬영장 분위기에 따라 생각했던 의상이 아니라, 다른 의상을 선택할 때도 많았다.

“그럼, 이제 해산!”

* * *

다시 배우로서 바빠졌다.

유수한은 최근 광고 하나를 수락했고 일정을 조율 중이었다. 현재 영화 촬영 중이었고 시상식도 얼마 남지 않아, 내년을 기약할 듯했다. 다양한 광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선택하는 기준은 늘 깐깐했다. 이번에는 단기 계약이었고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광고였다. 커피가 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유수한에게 도움이 될 듯해서 수락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윤화진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이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순간, 백이현이 눈치를 본다.

주변에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가 들을까, 두려운 눈치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에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겁 많은 고고한 친일파는, 일본의 눈에서 벗어나게 될까 봐 움츠린다.

“알고 있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작아진다. 윤화진이 백이현을 보며 비웃었다. 짧게 웃음을 터트리는 윤화진을 백이현이 바라본다.

“무섭지?”

윤화진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백이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 이런 나와 살 수 있겠어?”

올곧은 두 눈을 백이현이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지금 윤화진은 떠보고 있었다. 백이현의 사랑을. 구질구질하게 사랑을 구걸하는 백이현을 떠보고 있었다. 화를 내다가도 주변 눈치를 보며 꼬리를 말고 있는 겁 많은 개가, 독립운동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나는 말이야.”

윤화진이 백이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홱, 윤화진에게 끌려간 백이현은 입술을 말아 문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가까운 거리, 여전히 윤화진은 여유가 있었고 백이현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당신과 결혼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야.”

백이현이 흔들리는 눈으로 윤화진을 보았다.

“당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할 거야. 굴러 들어온 복이 따로 없잖아. 그쪽은 날 사랑한다니, 내가 당신을 갉아먹어도 내게서 못 벗어나겠지. 그게 사랑이잖아?”

윤화진은 백이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신이 있었다. 백이현은 자신을 밀고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

“난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갈 거야.”

백이현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는 두렵다. 윤화진을 향한 사랑을 누를 수도 없었고 일본이 두려웠다. 일본의 개가 되어 사는 것이 가장 편했다. 그 안락함을 두고 왜 가시밭길로 가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이현,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툭.

윤화진이 붙잡은 셔츠 깃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때,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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