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최종 시청률 21.1%로 마무리되었다. 첫 사극이었던 만큼 더 신경 썼던 유수한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고, 같은 주연이었던 한초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유수한의 다음 선택은 예능이었다. 물론 선택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것이었지만, 배우로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정우를 가르치는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좋아했다. 유수한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고 연기에 대한 진지함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유수한은 세 번째 영화이자, 두 번째 특별출연으로 영화 출연을 확정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 늘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았다.
“조선은 힘이 없는 나라죠. 일본의 통치를 받는다면 그 영향으로 더 강대한 나라가 될 겁니다.”
백이현은 세상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편한 대로 살고 싶은 충동이 강한 사람이기에, 그릇된 것을 외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만 부강해지겠죠.”
“이제 같은 나라 아닙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다.
백이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씩 웃고 있었다. 그런 백이현을 보는 윤화진의 눈이 곱지 못했다.
“같은 나라? 참으로 역겨운 말이네요.”
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윤화진이 고개를 돌렸다. 윤화진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한 여자였다. 부모가 일본 앞잡이 짓을 해 번 돈으로 공부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조선에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면 조국에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여자기도 했다. 그렇기에 윤화진에게 백이현은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백이현은 힘 있는 자에게 침묵하기를 원한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부조리함을 모두 정당화하려 한다. 백이현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이대로 편하게 살아가는 것, 그뿐이었다.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윤화진이 가까워져 가는 조선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오늘 처음 만난 백이현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에 짧게 차를 마시며 대면했다. 백이현은 외관은 멀쩡한 남자였다. 도쿄대를 졸업했다는 그는 일본의 인재였다. 백이현은 조선을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친일파라고 한들, 일본인이 될 수는 없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 지옥에 당신과 함께라면…….”
백이현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윤화진의 공격적인 말투에도 백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윤화진을 처음 보는 순간, 그는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첫눈에 반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설렜다. 그녀가 시선을 옮겨 멍하니 서 있던 백이현을 바라봤을 때는 이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멋지겠군요.”
첫 대본 리딩.
특별출연이었기에 유수한은 1부가 끝난 후에는 할 일이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다른 사람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해원의 연기는 좋다. 로맨스 코미디 장르도 많이 찍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와 다른 톤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묵직하다. 오늘 짧게 연기를 맞춰 보며 느낀 감정은 경멸이었다. 윤화진으로 분한 주해원은 끊임없이 백이현을 경멸했다. 그걸 알면서도 백이현이 된 유수한은 웃는다. 그럴 수밖에. 사랑은 원래 그런 거였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는 법이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사실 유수한은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계속 자리를 채웠다.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수한 씨, 여기 옆에 서 봐요.”
단체 사진을 찍고 이걸로 오늘 일정은 끝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유수한을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주해원 옆에 이끈다.
“나름 러브라인이니까.”
그러기에는 유수한은 특별출연이었다. 감독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최대한 유수한을 써먹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 경우는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예능 ‘캐스팅’에서도 그랬었다. 그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유수한이 그만큼 영향력이 큰 배우가 되었다는 걸 증명하니까.
“자, 찍습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본을 든다.
카메라 셔터가 눌리고 두 차례 더 사진을 찍은 후에 오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 * *
본격적인 촬영은 보름 후.
그 시간 동안 유수한은 쉬었다. 쉬면서 작품을 준비했다. 말은 특별출연이었지만, 사실상 특별출연 그 이상의 배역이었다. 유수한에게 주어진 촬영 시간은 대략 일주일. 그 시간도 특별출연치고는 길었다.
[HOT] 영화 <마지막 겨울> 대본 리딩 스틸컷.jpg +198
대본 리딩 스킬컷이 떴다.
- 주해원 오랜만에 키가 딱 맞네 속이 시원하다
└ 222222
└└ 지금까지 난쟁이랑 연기하느라 고생 많았지...
└└└ 유수한 인간 사이다설
└└└└ 둘이 길쭉길쭉해서 너무 잘 어울려
주해원은 키가 크다. 연기할 때마다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배우였다. 심지어 만나는 상대역마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해원 팬들은 유수한을 환영했다. 오랜만에 주해원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 유수한 개존잘 ㅠㅠㅠㅠㅠ 왜 특별출연 ㅠㅠㅠㅠㅠㅠㅠㅠ
└ 정보 뜬 거 보니까 흥미돋음
└└ 친일파였나?
└└└ 그냥 친일파였으면 유수한이 안 했을 듯
└└└└ 2222 단순한 친일파는 아닐 것 같아
슬슬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유추하기 시작했다. 유수한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특별출연이라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유수한이었기에 단순한 역할은 아닐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뭐든.
배우가 관심을 받는 건 좋은 일이다.
[HOT] 한 달 남은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 추측 +266
그러고 보니, 연기대상이 한 달 남았다.
유수한은 한동안 연기대상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드라마가 끝나고 예능을 하게 됐고, 지금은 영화 촬영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여론은 SBC 연기대상은 유수한이 가져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유수한은 지금까지 단계를 밟아 가며 성장했다. 처음 S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그다음에는 타 방송사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영화로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 유수한에게 남은 건 대상뿐이지 ㅋㅋㅋㅋㅋ
그렇다.
이제 남은 건 대상이었다. 처음 우수상을 받았을 때 생각했다. 대상을 받는 기분은 어떤 걸까. 그해 민서온이 대상을 받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축하해 주던 유수한이었다.
예전 김대한 시절에 상은 언제나 생소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 흔한 상장 하나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 SBC 대상은 유수한 유력하네 연기 잘했잖아
└ 대박 친 작품도 없어서 안 주면 안 될 정도임 ㅇㅇ
└└ 인지도만 봐도 유수한 ㅋㅋㅋㅋㅋ
└└└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도 존나 잘해 요즘 유수한 폼 미쳤음
└└└└ 어차피 대상은 유수한
반응은 긍정적이다.
가끔 후보로 오른 배우가 대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 섞인 여론이 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유수한에게는 그런 반응이 없었다. 모두 인정한다는 투였다. 그것 역시도 감사한 일이었다.
- 근데 유수한 올해 연예대상도 가려나?
└ 가지 않을까?
└└ KBC 그거 말하는 거지? 캐스팅?
└└└ ㅇㅇ 캐스팅 하차했어도 부를 것 같은데
└└└└ 유수한이 갈까?
생각해 보니.
연기대상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연예대상도 있다. 아직 유수한은 연예대상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고정으로 종종 촬영하는 ‘노예식당’은 케이블이었기에 시상식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예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꺼리던 유수한이었기에, 더더욱 연예대상에 참석할 일이 없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배우는 연기를 하는 직업이다. 그렇기에 연예대상은 개그맨의 무대라고 생각했다. 물론 요즘은 배우들도 예능을 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아직도 유수한은 연예대상은 코미디언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네?”
연예대상은 조금 빠르게 진행한다. 보통 연기대상이 한 해 마지막 날을 기념한다면, 연예대상은 조금 더 이른 날짜에 잡히곤 했다.
“연예대상이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물론 댓글을 읽었기에 연예대상에 초청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 현실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지금 유수한은 커피를 마시며 산책 중이었다. 쉬는 날에는 운동하러 나오는 것 외에는 집에만 머물렀는데, 이사 후에 조금씩 생활 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최근 대본을 들고 카페에 가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대본 공부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론 한적한 카페만 찾아다니고 있다. 사람이 조금만 많아져도 유수한을 알아보기 때문이었다.
“음, 제가 굳이 갈 이유가 있을까요?”
통화를 하며 공원에 들어선 유수한은 벤치를 찾아 앉았다.
- 충분히 갈 이유가 있지.
이성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네가 그 예능에 보인 영향력을 생각하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전 배운데요?”
자신은 배우라는 정체성이 강했다.
물론 잘못된 방향의 정체성은 아니었다. 연예대상은 예능인의 축제여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괜히 배우가 끼어 상을 받는 그 그림 자체가 좋은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떨 때는 일부러 배우나 가수에게 상을 몰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뇌물 격으로 상을 주고 우리 방송사를 잘 부탁한다는 느낌이었다.
- 서온이는 배우 아니니?
“아…….”
민서온 이야기가 나오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민서온과는 입장이 달랐다. 민서온은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MC였다. 지금도 출연 중이었고 MC였기에 비중 자체가 달랐다.
“근데, 선배가 용케 참석하네요?”
유수한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 MC잖아. 걔가 가끔 꽉 막힌 구석이 있지만, 해야 할 일은 해. 진행을 맡았으니 홍보에 대한 책임감도 갖고 있고.
하기야.
민서온이 연예대상에 참석한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것이다. 민서온은 신비주의에 가까운 배우였다. 그렇기에 이번 예능 ‘캐스팅’ 진행을 맡은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다. 민서온은 일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렇기에 싫어도 홍보를 위해 연예대상에도 참석하는 거였다.
- 너 상 줄 거야.
“배우가 무슨 연예대상 상이에요.”
- 너 예능인 무시하니?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뺏는 느낌이라서요.”
- 요즘 그런 시대 아니야. 예능인도 연기 하는 사람 있고. 그런 생각은 꼰대나 다름없다, 너.
할 말이 없다.
이성실 대표의 말대로 요즘 세상은 변화무쌍했다. 개그맨이었던 사람이 뮤지컬 배우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고 히트작이 몇 없는 배우가 예능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흔하다. 가수 출신이 배우가 되는 경우 역시도 수두룩하고. 이제는 그 경계가 옅어졌다. 어쩌면 유수한이 이성실 말대로 꼰대일지도 몰랐다.
“일단 알겠습니다. 대표님이 하라면 해야죠.”
연예대상까지 3주 남았다.
영화 촬영은 당장 사흘 남았기에, 지금 우선순위는 촬영이었다. 유수한은 전화를 끊고 커피를 마셨다. 날이 춥지만, 날카롭게 부는 바람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다.
가만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틀에 박혀 있지 말고 뭐든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그런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동안 스스로 경계를 긋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우가 연예대상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끼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연예대상에 참석해서 예능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섞이고 그들과 소통을 하는 그 과정에도 배움이 있을 것이다.
“올해는 시상식이 두 개네.”
시상식은 묘하게 마음을 들뜨게 한다. 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었다.
“기대된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수한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