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유종의 미
「사람을 사랑하는게 왜 죈데?」
유수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1차 예선에서 이정우가 보여 줄 장면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고. KBC 주말 드라마에 나왔던 장면이고 배역 자체는 조연이었다. 갈등을 위해 짧게 스쳐 지나가는 역할이었지만, 제대로 소화한다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집착.
스토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에게 집착하는 남자였다.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범죄를 일으키는 인물. 이정우에게도 다른 방향이지만, 집착이 있었다. 그렇기에 멋있지 않다고 싫다고 거부하는 이정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멋도 연기를 잘해야 나오는 거야. 이거 소름 끼치게 잘하면 너에게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이 생겨. 그니까, 이거 해.]
사람에게 집착하는 모습. 그 날것의 감정을 보여 준다. 아이돌 멤버 이정우에게는 없었던 모습이었기에 신선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좋았잖아. 응?」
문제는 긴장한 나머지 연기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는 것.
「내가 더 잘하겠다니까? 기회를 줘. 한 번만, 하, 한 번만 기회를 주면 되잖아.」
발음 씹혔어.
유수한은 이정우의 연기를 지켜보다 결국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정우가 어떻게 연기를 하든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생각이었지만, 긴장해서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고 냉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잘하겠다잖아!」
이정우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감정은 조금씩 격앙되기 시작했다.
- 근데 내가 너무 기대를 안 했나? 생각보다 괜찮은데
└ 나도 ㅋㅋㅋ 벌벌 떠는게 졸라 무섭다
└└ 기대를 안 하고 봐서 나도 그냥 평타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 유수한도 살리지 못한 이정우 ㅋ
└ ㅋㅋㅋㅋ 저게 그나마 심폐소생술 한 수준일 듯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수한은 뭔 죄 ㅋㅋㅋ
└└└ 이제 1회 유수한이 이해된다 저러니까 독설하지;;;
└└└└ 유수한 표정 봐 ㅋㅋㅋㅋ 포기한 듯
유수한은 다시 이정우의 무대를 모니터하며 고칠 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연습대로만 했다면 이보다 나은 결과를 받았을 것이다.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이게 1차였고 평가가 후했다는 것 정도.
「네, 이정우 씨는 5개의 캐스팅을 얻었습니다.」
아슬아슬했다.
연기가 끝나기 전에 캐스팅 버튼이 눌리지 않아서 유수한도 긴장할 정도였다. 유수한은 적어도 1차는 통과하길 바랐다. 여기서 이렇게 떨어지게 되면 만회할 기회도 사라지기 때문에. 다행히 끝나기 직전에 버튼이 눌렸고 아슬아슬하게 다음 라운드로 넘어갈 수 있었다.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지금 심정이 어때요?」
민서온의 눈빛은,
- 와 ㅋㅋㅋㅋ 민서온 ㅋㅋㅋㅋㅋ 눈으로 혀 차는 것 같아 ㅋㅋㅋㅋㅋ
└ 웃고 있는데 ㅋㅋㅋㅋ 무슨 생각 하는지 훤히 보인다 ㅋㅋㅋㅋㅋㅋ
└└ 아이고 민서온 눈으로 패네... ㅋㅋㅋㅋㅋ
└└└ 민서온 연기 못하는 후배 졸라 싫어하잖아 ㅋㅋㅋㅋ
└└└└ ㄱㅇㄱ ㅋㅋㅋㅋㅋㅋㅋ
유수한도 보였다.
민서온이 ‘이걸 연기라고 하니.’라고 말하는 걸. 물론 눈으로 말한 거지만, 유수한의 눈에도 그 감정이 느껴졌다.
「제가 너무 못한 걸 알아서요……. 떨어지면 수한 형에게 미안해서 죽어야 하나 새, 생각했습니다…….」
무섭긴 했나 보다.
하기야, 1차 떨어지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으니.
「제가 마지막에 캐스팅했는데요.」
심사가 시작된다.
「끝나기 직전에 버튼을 누른 이유는 발전 가능성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긴장해서 목소리가 떨리지만, 또 그게 인물하고 잘 어울렸고요. 발성이 잘 잡혀 있다, 그렇게 생각했고.」
흐음.
짧게 숨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기던 심사위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본을 잘 선택했다. 만약 멋진 역할을 선택했다면 다음 라운드에 넘어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잘 봤습니다.」
이정우는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1차 예선을 통과했다.
유수한은 더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사람들은 이정우를 주시하게 되었다. 다음 라운드에 진출해서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끝이었다.
“알지?”
알아서 이정우는 머리를 박고 있다. 납작 엎드려서 1차 예선을 망친 대가를 스스로 치르고 있었다. 유수한은 그런 이정우를 보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잠.”
“줄이겠습니다.”
“아니, 뭘 줄여. 안 자면 되는데.”
자리에 앉은 유수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짝이 여고생이라고?”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그 친구 에너지 좋더라.”
“네.”
“멜로는 안 되겠네.”
2차 예선은 커플 미션이었다.
선택권은 당연히 상위권에게 주어진다. 이정우와 함께할 사람은 일반인 출연자였다.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친구였다. 내일 촬영이 잡혀 있는데, 그 전에 어떤 연기를 해야 할지 이정우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내일 만나 확정을 지은 후에 본격적인 연습을 진행한다. 즉, 이번 미션은 협동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자칫 잘못하면 통통 튀는 에너지에 이정우가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넌 아직 멜로는 무리야.”
아직 사랑이라는 세세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이정우는 모자랐다. 차라리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는 게 몇 배는 나았다.
“우선 몇 개 추려 봤어.”
지금 결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준비를 하되, 내일 다시 이야기를 하며 맞추어야 한다.
“이거 읽고 숙지해 놔. 아직은 어떤 걸 할지 모르지만, 그쪽도 생각은 비슷할 거야.”
다음 날.
유수한은 강남역 근처에 있는 대형 카페로 움직였다. 촬영인 만큼, 숍에 들러 단정하게 꾸몄다. 차에서 내린 유수한은 카페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스태프에게 눈인사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목 인사를 했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여고생 참가자 ‘이은설’이 난리가 났다. 미리 도착한 이정우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밝은 에너지였다. 방방 뛰고 유수한을 보며 수줍어하고 있었다.
“난리 났네.”
이은설 옆에 앉아 있던 일반인 담당 멘토 ‘최경호’가 혀를 찬다. 이정우와 짝이 되었을 때 이은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었다. 그 이유는 이정우 때문이 아니라, 유수한 때문이었다.
“저, 저, 저…… 손 한, 한 번만 잡아도 돼요?”
“그럼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덥석, 손을 붙잡고 방방 뛰는 이은설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은설에게 팬서비스를 하고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제 생각에는 남매 연기로 가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최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몇 개 후보를 추려 봤는데, 하나는.”
미리 출력한 대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현실 남매.”
“아, 네.”
“근데 나이대가 안 맞아서 잘 살 것 같진 않더라고요.”
두 번째는.
유수한이 다음 후보를 보여 주었다.
“영화 대본인데요. 두 사람의 매력을 모두 보여 줄 수 있는 장면이라 생각해요.”
최경호가 말없이 대본을 확인했다.
유수한을 보고 방방 뛰던 이은설도 진지한 얼굴로 대본을 읽는다. 이정우는 이미 숙지한 대본이었다. 어제 잠도 포기하며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좋네요.”
최경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슥.
최경호가 이정우를 보며 말했다.
“소화 가능할까요?”
뭐,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지.
물론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이정우를 무시하는 건, 멘토인 유수한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대사부터 맞춰 보시죠.”
그렇기에.
“시작도 하기 전에 판단하지 마시고요.”
이정우를 감싸고 싶진 않았지만, 감싸야 했다. 물론 웃음은 잃지 않았다. 이정우는 유수한의 말에 감동했는지,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연습 시작해 볼까요?”
* * *
2차 예선.
엉망이었던 1차를 만회해야 한다. 이정우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처음보다는 표정이 한결 나았다.
KBC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캐스팅’은 2회에서 시청률 상승을 보였다. 5%를 넘겼고 화제성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 이정우 잘할까?
- 과연 유수한이 이번에는 이정우를 살리는 데 성공할 것인가 ㅋㅋㅋㅋ
- 이정우 어떨 거 같음?
└ 이은설한테 묻힐 거 같음 ㅇㅇ
└└ 1차 때 이은설 연기로 씹어 먹었잖아 묻힐 듯
└└└ 솔직히 큰 기대는 없어 ㅋㅋㅋㅋㅋㅋ
차라리 1차 때보다 낫다. 관심이 없고 기대감이 없다면 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좋았다. 유수한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정우를 가르쳤다. 떨어지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목표였다.
「이제 세 번째 무대를 곧 시작할 텐데요.」
슬슬.
이정우가 나올 때가 되었다.
「지난 1차 예선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는 이정우 씨와 여고생 특유의 발랄한 에너지를 보여 준 이은설 양이 뭉쳤습니다.」
미소를 지은 민서온이 말을 잇는다.
「두 사람의 무대, 지금 시작합니다.」
그 말을 끝나기 무섭게 무대가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은 물론 심사위원들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빠!」
찢어질 듯한 이은설의 목소리.
「으어어어엉, 오빠아아……!」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정우의 흰 와이셔츠가 피로 젖어 있다. 총성이 울리고 여기저기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으윽.」
피가 흐르고 있는 배를 움켜쥐며 이정우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상황에 몰입한 이은설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오빠가 따라갈 테니까, 가.」
긴박한 상황.
이정우는 동생을 달래며 잡은 손을 놓는다. 하지만 이은설이 그 손을 허겁지겁 붙잡았다. 울며 고개를 젓는 이은설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집중하게 했다.
「가!」
이정우가 다시 손을 뿌리친다.
「싫어, 싫어……!」
「오빠가, 따라간다잖아. 응? 으윽, 여, 연정아. 어서 가.」
여전히 고갯짓을 하는 이은설을 보며 속상한 듯 이정우가 미간을 좁힌다. 우는 눈물을 닦아 주는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연정아.」
어느새, 감정에 몰입한 이정우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먼저 가면 오빠가, 갈 테니까, 그니까, 어서 가라.」
「안 올 거잖아!」
「갈 거야. 연정이 가면 오빠가 따라갈 거야. 오빠가 다쳐서 조금, 조금 늦을 거 같아서 그래.」
「거짓말!」
이정우가 친동생이 된 이은설을 끌어안는다. 그 등을 두드리며 달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포옹이었다. 눈을 감으며 감정을 추스른 이정우가 이은설을 떼어 내며 말했다.
「가.」
다시금 격발음이 울린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이은설은 여전히 울며 저항한다. 이정우가 이은설의 등을 밀었다. 몸을 일으킨 이정우는 멀어져 가는 동생을 바라본다.
「오빠, 오빠아…….」
교복을 입은 이은설의 셔츠에도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정우는 배를 움켜쥐며 위태롭게 걸음을 옮긴다. 이은설은 달아나면서도 뒤를 계속 돌아보았다.
「어서 가.」
이정우가 동생을 달래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그 웃음에 이은설이 안심하는 그 순간.
「오빠!」
타앙!
크게 울리는 격발음과 함께 이정우가 휘청인다.
- 헐 총 맞은 거야?
- 뭐야 ㅠㅠㅠㅠ 죽지 마!!! ㅠㅠㅠㅠㅠㅠ
- 이거 그거네 ㅠㅠㅠ 광주민주화운동.... ㅠㅠㅠㅠㅠㅠ
└ 생각만 해도 눈물 나 ㅠㅠㅠㅠㅠㅠ
└└ 둘이 왜 연기 잘함 미쳤나 ㅠㅠㅠㅠㅠ
총에 맞은 반동을 이정우가 제대로 연기해 냈다. 총에 맞는 연기도 중요했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마치 춤추는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된다.
타앙!
이번엔 어깨였다. 총에 맞은 어깨가 흔들렸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이정우는 끊어질 듯한 숨을 붙잡으며 고개를 든다.
「오빠아아아악-!」
우는 여동생을 향해 손짓을 한다. 어서 가라고. 찢어질 듯한 고통에서도 이정우의 얼굴은 힘겹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놔, 우리 오, 오빠가…….」
이은설의 연기 역시도 좋았다. 감정을 터트리면서도 끌려가는 모습을 어색하지 않게 연기하고 있었다. 단둘이서 하는 연기였기에 다른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걸 소화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이은설은 울면서 이정우에게 손을 뻗는다.
툭.
무릎을 꿇은 채로 죽어 가던 이정우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 나 왜 울어?
└ 나도 왜 이거보고 우냐 ㅠㅠㅠㅠㅠ
└└ 미쳤음 ㅠㅠㅠㅠ 이정우 고개 떨어질 때 눈물 폭발함 ㅠㅠㅠㅠㅠ
└└└ 연기 이렇게 살벌하게 하기 있냐???
극적인 장면이었기에 연기력이 중요했다. 이은설은 울음을 터트리는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 주었고 이정우 역시도 1차와 비교하면 준수했다. 두 사람의 연기가 끝나고 잠시 무대에는 적막이 흘렀다.
「좋은 연기였습니다.」
그리고.
- 이야, 유수한이 기어코 이정우를 살리네
└ 2222222
└└ 3333333
└└└ 444 자존심 상해 이정우 보고 울다니 ㅅㅂ
└└└└ 5555 띠옹때옹 이걸 살리네?
유수한은 이정우를 살리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