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유수한도 살리지 못함
1차 예선이 끝났다.
무려 10시간 가까이 진행된 녹화였다. 최 피디 말로는 생각보다 일찍 끝난 편이라고 말했다. 20명이나 되는 출연자의 연기 모습을 보는 건 물론, 심사위원의 평가도 들어야 하며 심지어 멘토에게도 마이크가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모로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배, 수고하셨어요.”
유수한은 멘토석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민서온은 그 긴 시간 동안 진행을 해야 했다. 민서온에게는 쉴 틈도 없었다. 참가자가 나와 연기를 하는 순간에도 집중해야 했다. 적절한 리액션 역시도 필수였다. 참가자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면 다음 진행할 때 삐걱거리기 마련이었다. 연기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역시 진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진심이었다.
만약 최 피디의 제안에 넘어가 진행까지 맡았다면 오늘 하루가 지독하게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유수한은 MC 경험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고난이었을 것이다.
“이 짓도 못 할 짓이야.”
민서온은 이번이 첫 MC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종종 연기대상 MC로 나서곤 했었다. 그렇기에 그 경험으로 능숙하게 진행을 해낼 수 있었다.
“다음에는 편한 단화 신어야겠어.”
높은 구두를 신은 민서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1차 예선이 곧 예능 ‘캐스팅’의 문을 활짝 여는 것과 같았다. 전체적인 진행을 맡은 MC의 등장도 1차 예선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의상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너도 오늘 고생했다.”
툭툭.
유수한의 어깨를 두드리던 민서온이 짧게 생각을 하며 말했다.
“뭐, 네 고생은 오래 못 갈 것 같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은근히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유수한은 바로 대기실로 움직였다. 이미 매니저와 코디는 집에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유수한이 찾은 곳은 참가자 대기실이었다.
“괜찮냐?”
스튜디오에서 가장 큰 대기실이었다. 2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어야 했고 세세한 리액션을 딸 수 있게 카메라도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어야 했다.
“음.”
이정우는 역시나 멘탈이 탈탈 털려 있었다. 유명 아이돌이었기에 관객 반응은 준수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만약 일반인 출연자와 같은 조건이었다면 관심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위로를 할 생각은 없었다.
유수한은 이정우에게 다가가지 않고 뒤돌아섰다. 지금은 오히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보다 모른 체해 주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졌을 테니.
“오빠!”
스튜디오에서 나오니, 옹기종기 뭉쳐 있는 팬들이 보였다. 10시간이나 스튜디오에 있었으니, 지칠 만도 한데 유수한을 보니 다들 방긋 웃고 있었다.
“안 힘들어요? 오늘 녹화 엄청 길었는데.”
“힘들어요!”
아무리 팬심이 있어도 선의의 거짓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10시간 동안, 쉬는 시간은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고작 10분 주어졌고 그 시간에 우르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멘토석에 앉은 유수한을 원껏 볼 수 있었지만, 장시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유수한 덕질은 지금까지 참 행복했구나. 오랜 대기도 없이 유수한을 볼 수 있고 심지어 다정하다. 아이돌 덕질은 고난이었다. 오프 한 번 뛸 때마다 다리가 부서질 듯 아프다. 그것뿐인가. 팬을 진심으로 대하는 놈이 몇 없었다. 그래도 얼굴 보겠다고 좋다고 오프를 뛰지만, 유수한 만큼의 보람은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유수한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집에 가고 싶을 텐데, 10분만 기다려요.”
녹화가 끝나고 유수한은 매니저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 있었다. 녹화 중에도 뒤를 돌아보며 팬들을 챙기던 유수한이었다. 연예인들은 따로 초콜릿이나 작은 빵 같은 주전부리를 스태프가 준비했지만, 팬들은 아니었다. 그 시간 내내 쫄쫄 굶었을 것이다.
“아, 왔다.”
저 멀리 매니저가 양손에 봉지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보라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샌드위치.”
“아니, 그건 저희도 알아요.”
“배고프잖아. 그 긴 시간 동안 밥도 못 먹고.”
유수한에게는 별거 아니었다.
그 긴 시간을 유수한 하나만 보고 고생했다. 그렇기에 유수한은 작게나마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미안해. 오늘 고생시켜서요.”
유수한이 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했다.
“뭐가 미안해요? 우리도 오빠 얼굴 보고 좋은데!”
“나도 얼굴 보고 좋긴 한데, 미안해서…….”
“미안하면 팬미팅!”
그 말에 유수한이 웃는다.
물론 오늘 팬들이 고생한 건 사실이었다. 10시간이나 녹화를 진행할 줄은 몰랐다. 분명 방청객 모집할 때 6시간이라고 말했는데, 모두 거짓말이었다. 물론 10시간이라고 말했어도 유수한을 보기 위해 왔을 것이다. 그깟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정이 고될수록 좋아하는 배우를 봤을 때의 보람은 몇 배로 부풀어 오르는 법이었다.
“팬미팅, 알았어요.”
첫 팬미팅 이후로 다음은 기회가 없었다. 물론 유수한도 팬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늘어 간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해 주는 존재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다들 조심히 가요.”
“네, 오빠!”
유수한이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다들 샌드위치와 콜라를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유수한이 아쉬운 듯 미간을 좁힌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는데,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미안했다.
[HOT] 유명 아이돌이 본받아야 할 유수한의 팬서비스 +581
그리고.
그날, 유수한의 팬서비스가 작게 화제가 되었다. 이유는 팬들이 유수한에게서 받은 샌드위치를 인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수 출신 참가자가 있었던 것만큼 자연스럽게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비교였다.
이정우를 비롯한 가수 출신 참가자의 팬들도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유수한은 최대한 오래 팬들과 만남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기에 힐끔대며 유수한을 멀리서 구경했었다. 부러울 수밖에 없다.
- 진짜 유수한 스윗하더라. 거의 30분? 팬들하고 얘기하던데?
- 와, 진짜 센스있다 배고플까 봐 샌드위치 사온 거잖아?
- 개부럽 덕질할 만 하네
- 나 탈덕할 뻔... ㅋ 멀리서 유수한 구경하는데 진심 좀... 박탈감 느꼈어
└ 맞아 나도 방청했는데 유수한은 쉬는 시간에도 팬들 챙기더라
└└ 일단 잘생겼음 ㅋ 나 지금 탈덕각이야 유수한 보다가 내 돌 보니까 짜게 식더라
└└└ 유수한 개존잘임... 실물 보고 나니까 심장이 울리더라;;;
└└└└ 박탈감 오짐;; 진짜 팬 하나하나 소중하게 생각하는게 느껴지더라 ㅋ
- 정우야 넌 깨닫는게 없니?
└ ㅇㄱㄹㅇ 친하다며 좀 배워라 진심
└└ 스포면 댓 지울게 연기라도 잘하든가 ㅅㅂ
└└└ 정우야 연기가 하고 싶니?
└└└└ 아니야 그래도 꽤 변했어 예전에는 동태 눈이었는데 지금은 사람 눈이더라
└└└└└ ㅇㅇ 유수한에게 꽤 영향 받은 듯 ㅇㅇㅇㅇㅇ
- 백퍼 그 자리에 있던 타팬들 철새처럼 유수한에게 흡수될 듯
└ 빼박이야 녹화 끝나고 타팬들 다 웅성거렸잖아 유수한 존멋이라고
└└ 잘생겼는데 팬한테도 잘해 덕심 흔들릴 만 함
└└└ ㅇㅈ 나도 모르게 유수한 검색하게 됨
└└└└ 정신차리고 유수한 덕질하는게 현명할 수도
타 팬들이 박탈감을 느꼈다면 유수한 팬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딜 내놔도 모자라지 않는 배우였다. 배우가 팬에게 잘하면 팬들은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올라간다. 반대로 좋아하는 스타가 팬에게 잘 못하면 자존감이 박살난다. 그것도 처음에는 팬심으로 이겨 내지만, 하루 이틀이었다. 탈덕길이 열리는 건 시간 문제였기에.
- 근데 댓글 연어하는데 이정우 못했어?
└ 난 그냥 그랬어
└└ 그냥 뭐, 기다려서 방송 봐봐
└└└ 봐줄만 한 정도?
└└└└ 확실한 건 잘하진 못함
1차 예선 녹화 후 유수한도 심란했다.
이정우가 심각하게 무대에서 떨었다. 애초에 기량이랄 것도 없었지만,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적어도 그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는데.
당장 내일이 ‘캐스팅’ 1화 방송이었다. 1차 예선에 진출한 참가자의 합류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지고 연습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다음 주가 1차 예선 방송이었다.
[온에어/불판] 배우들의 전쟁 <캐스팅> 1화 같이 달리자! +99
그리고.
드디어 KBC ‘캐스팅’ 1화가 방송되었다.
* * *
「냉정하게 말할 테니까, 상처받지 마.」
아마 두 번째 연습이었을 것이다.
카메라가 따라붙어서 유수한의 심기가 못내 불편했던 날이기도 했다. 연습은 K엔터에서 진행했다. K엔터에는 배우를 위한 연습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기에, 촬영하기 편했고 연습하기에도 좋았다.
「네 실력으로 1차 통과하는 것도 힘들어.」
첫 연습에서는 카메라도 있었고 좋게 좋게 진행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연습은 그 유수한도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이정우는 쉽게 정신을 못 차렸다. 잠을 포기하고 연습해도 모자랄 판에,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를 만만히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잠을 왜 자?」
독설.
「정우 씨. 지금 잠이 와요?」
그리고.
근래 보기 힘든 유수한의 차가운 모습은.
- 저거 악편이야?
└ 피디가 미치지 않은 이상 유수한으로 악편 불가능
└└ 이정우 실력을 봐라 저게 악편이겠냐?
└└└ 악편무새 또 왔네 ㅋ
- ㅋㅋㅋㅋㅋㅋ 유수한 사이다 오진다 ㅋㅋㅋㅋ
└ ㄹㅇ 내가 하고 싶은 말임
└└ 이정우 연기 킹받았는데, 유수한이 사이다 먹여줌
└└└ 진심 이정우 연기 왜 해?
└└└└ ㅇㅈ 유수한 덕분에 속시원함
이정우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주가를 올리려 했지만, 되레 유수한만 이득을 보고 있었다.
「아니요. 사랑이에요.」
유수한은 직접 연기 시범을 보였다.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건, 착각이 아니에요.」
단숨에 몰입해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절절하다. 서늘하던 눈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눈물이 맺혀 있었다.
- 와, 몰랐는데 유수한 연기 존잘이구나?
- 저 장면 뭐지? 되게 재밌게 본 장면인데 유수한이 하니까 또 다르다
- 유수한 연하남 ㅇㅈ이죠 ㅠㅠㅠㅠㅠㅠ
- 순식간에 몰입해서 울어버리네... 울리고 싶은 얼굴이야
└ 눈 감으면 눈물 또로록 떨어질 듯 ㅠㅠㅠㅠㅠ
└└ 우는 거 너무 예뻐 ㅠㅠㅠㅠㅠ
└└└ 눈물 닦아주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
유수한은 이정우를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그렇기에 예능을 보는 시청자 역시도 유수한이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이정우 1차 떨어지면 그건 전적으로 본인 탓임
- 유수한은 노력했다 진심 합숙까지 하며 가르쳤는데 ㅋ
- 아니, 이정우는 재능이 없다니까? 아예 그딴게 없어. 진심 1차 떨어질 각임
- ㅋㅋㅋㅋㅋ 설마 1차 떨어지겠냐? 멘토가 그 유수한인데
└ 맞아 이정우도 아이돌이라 쉽게 안 떨어질 듯
└└ 근데 일부러 욕받이 캐릭터로 남겨둘 가능성도 있어
└└└ ㅇㅈ 이정우 아예 골로 보낼 가능성 충분함 ㅇㅇ
유수한은 방송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이정우가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게 유수한에게도 좋을 건 없었다. 1차는 이미 끝났다. 적어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연예뉴스] KBC ‘캐스팅-배우들의 전쟁’ 시청률 4.7%
프로그램의 첫 시작은 나쁘지 않다.
본격적인 경쟁은 2화부터 시작이었고 서서히 시청률이 올라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1회가 방송된 후에 가장 큰 이슈는 역시 유수한이었다.
스파르타식 연기 교육이 화제를 일으켰고 연기에 있어서는 한없이 진지한 유수한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HOT] 1차 예선 끝난 <캐스팅> 2차 진출자 정리 +666
다음 주.
드디어 방송된 ‘캐스팅’ 1차 예선. 이정우의 무대는 역시나 편집되지 않았다. 유수한은 긴장된 눈으로 반응을 확인했다.
- 유수한도 살리지 못한 이정우 ㅋ
적나라한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