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이게 되네?
간절했다.
최이영 피디는 진심으로 유수한이 프로그램 MC를 맡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MC는 프로그램의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MC를 후보에 두고 있지만, 유수한을 직접 본 이상 성이 차지 않았다.
“제가 멘토도 하는데 엠씨도 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해 주시면-”
“안 돼요.”
유수한이 딱 잘라 거절했다.
“일단 멘토가 MC를 하게 되면 그림이 좋지 않잖아요. 이정우 씨가 연기를 할 텐데, 리액션할 때마다 댓글 어떻게 감당하실 거예요? 제가 감당 못 해요. 자기가 맡고 있는 애가 연기한다고 리액션 더 좋은 거 같다는 말, 분명 나올 거라고요.”
일리가 있다. 이쯤 되면 최 피디도 욕심을 접는다. 지금 MC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석찬이었다.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지금 이석찬은 30대 후반, 10년 전에는 유수한처럼 톱스타였지만, 지금은 조금씩 내리막을 걷고 있는 배우였다. 생각보다 MC를 맡아 줄 사람이 여의치 않다. 젊은 톱배우는 시간이 없다며 거절했고 다른 배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멘토 라인을 젊은 배우로 채웠다 보니, 더 리스트가 적어졌다.
“아니면 제 인맥 좀 도와드려요?”
“네?”
그 순간, 최 피디의 눈이 반짝인다.
“남자로 생각하시는 거죠?”
“아휴, 여자도 괜찮죠.”
“주민하는 지금 작품 들어가서 힘들 것 같고. 조이수 형은 어때요?”
“아닙니다. 그냥 제가 알아서 진행하겠습니다.”
조이수가 뭐 어때서.
“그럼 어쩔 수 없죠.”
“혹시 같은 소속사에…….”
“민 선배요?”
“아, 네…….”
“될 거라 생각하세요?”
유수한이 코웃음을 쳤다.
민서온 공백이 길어지고 있긴 하다. 드라마 ‘시간’을 찍고 그 이후에 작품을 거의 안 하고 있으니. 영화 한 편을 찍은 게 전부였다. 민서온은 연기에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남자 배우에 비해서 들어오는 역할에 제한이 있었다. 늘 같은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아 쉬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 성격에 MC 같은 걸 할 리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배우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캐스팅’ 진행을 맡은 민서온입니다.”
이게 되네.
유수한이 직접 섭외한 건 아니었다. 괜한 소리 듣기 싫어서 발을 뺐고 최 피디가 공식적인 루트로 섭외를 진행했다. 당연히 민서온은 MC 제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공백기가 길어지자, 이성실이 칼을 빼 들었다. 민서온은 K엔터를 대표하는 톱 중의 톱 배우였다.
K엔터의 간판 배우 중에 한 명이었고 소속사 대표 역시도 쉽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쓴소리를 거의 안 하는 이성실이었으니, 그 무게감이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 하기 싫어요. 무슨 MC예요. 그냥 작품 할게요.]
당연히 싫다고 했지만, 민서온이 직전에 시나리오를 모두 깠기 때문에 마땅히 들어갈 만한 작품도 없었다.
“저도 오늘 ‘캐스팅’에 참여하는 배우들을 처음 보는데요. 얼마나 재능이 빛나는 보석이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싫다고 하던 사람답지 않게 잘한다.
발성이 좋은 배우라 전달력 역시도 탁월했다. 대본을 미리 숙지한 것도 모자라 통으로 외웠는지, 큐카드를 보는 횟수도 적었다. 싫다고 하더니, 역시 무슨 일을 하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답다.
“잘하네요.”
당연히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감탄한다.
최 피디는 감격에 젖은 눈빛이었다. 멘토에 유수한도 벅차오르는데, 그 유명한 민서온이 MC를 맡았다. 리허설도 완벽했고 대본 리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본을 다 외웠는지,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했다.
여러 배우를 만났지만,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다. 연기와 다르게 진행 능력이 떨어지는 배우가 많았다. 긴장하고 딱딱한 어투로 큐카드만 보며 진행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민서온은 자연스러웠다. 매끄럽게 발음 하나 나가지 않고 정면을 보며 진행한다. 가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을 만큼 여유로웠다.
“자, 이제 심사를 맡아 주실 배우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민서온이 정면에 앉아 있는 배우들을 보았다. 미소를 짓는다.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한 번쯤 스치듯 만났던 선배도 있었고 함께 연기를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네. 드라마를 보면 자주 뵐 수 있는 분들입니다. 제가 정말 존경하는 양희수 선생님입니다.”
나이가 모두 지긋하다.
멘토진이 젊은 만큼 심사위원만큼은 권위를 존중했다. 연기 경력만 30년이 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다음은 우리 참가자들을 지원해 줄 멘토를 소개하겠습니다.”
멘토진은 양 사이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반인 출연자가 7명, 개그맨 출신 출연자 3명, 아이돌 포함 가수 출신 출연자가 4명, 무명 배우 출연자가 6명이었다. 총 20명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발탁되었다. 물론 개그맨, 가수 출신을 제외한 인원이 그랬다.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멘토는 총 9명이었다.
개그맨 출연자들을 담당하는 멘토가 한 명이었고 가수 출신은 개별로 맡는다. 일반인 출연진은 두 명이 붙었고 무명 배우 역시도 두 명이 붙었다.
“네, 이정우 참가자의 멘토죠? 유수한 씨.”
유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인사를 했다. 심사위원석에도 인사를 하고 뒤로 돌아서 관객들에게도 인사했다. 그리고 까마귀 떼가 나타나 비명이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역시 여전히 인기가 좋네요.”
민서온이 미소를 짓는다.
차례로 멘토진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되었다. 무대 뒤에 서 있는 참가자들은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정우 역시도 손이 차가워질 정도로 떨고 있었다.
“자.”
민서온이 무대 중앙에서 사이드로 이동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소개가 남아 있죠?”
무대 왼쪽에 마련된 MC석.
민서온은 한 템포 쉬며 긴장감을 주었다. 다시 마이크를 든 민서온이 입을 열었다.
“배우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나지막한 민서온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KBC 미니시리즈 주인공을 두고 다툴 20명의 참가자를 소개합니다.”
폭죽과 함께 무대 뒤편에 있던 스크린이 갈라진다. 뿌연 연기 사이, 나란히 서 있는 20명의 참가자가 공개되었다.
“네, 첫 번째 참가자입니다. 그룹 윅스의 멤버에서 연기자로 거듭날 이정우.”
카메라가 이정우를 비춘다.
역시 유명 아이돌 멤버답게 인기가 좋았다. 환호성을 들으니 문자 투표에서는 압도적 1위를 할 게 분명하다. 물론 유수한은 이정우가 우승하길 원하지 않는다.
미리 최 피디에게 이야기해 두었다. 문자 투표 비중을 낮추라고.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투표 비중이 50% 이상을 넘어가면 우승은 당연히 이정우였다. 하지만 유수한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네, 안 그래도 문자 투표 비중은 10% 정도로 둘 생각이에요. 심사위원 평가 비중이 50% 정도고요. 그리고 나머지 40%는 100명의 전문가에게 평가를 맡길 생각이에요.]
10%.
사실 이것도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5% 정도면 좋겠지만, 너무 낮추면 그만큼 반발도 있기 마련이었다. 미리 최 피디는 심사위원에게 심사를 엄격히 해 달라고 언질을 해 둔 상태였다. 점수 차이도 나게끔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야 문자 투표로 결과가 뒤집히는 걸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즉, 실력으로 우승자를 가리겠다는 뜻이었다.
‘뭐, 아직 생방이 아니니 문자 투표 비중은 0이나 다름없지.’
본선부터 문자 투표가 시작된다. 그때까지 이정우가 살아남을지도 미지수였다. 최대한 도와주고 연기를 가르쳤지만, 단시간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는 건 어렵다. 그래도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배우들의 연기 전쟁이 시작된다.”
씩,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은 민서온이 말했다.
“캐스팅. 지금-”
역시나 이번에도 한 템포 쉬며 강약 조절을 한다. 민서온의 능숙한 진행을 보며 감탄했다. 나중에 MC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시작합니다.”
* * *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의 진행은 비슷하다. 물론 예전에도 획일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획일화되었다.
심사위원 의자에는 버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합격을 알리는 버튼이었다. 심사위원 수는 7명이었고 4명 이상 버튼을 눌러야 합격이다. 즉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버튼 이름은.
“네, 5개의 캐스팅을 얻었습니다.”
캐스팅이었다.
의미는 심사위원이 자신의 작품에 캐스팅하겠다는 의미였다.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기분이 어때요?”
참가자 중에 제일 첫 번째로 등장했던 이정우의 차례는 아직 남아 있다. 지금까지 8명이 무대에서 연기를 선보였고 총 5명이 살아남았다. 1차 예선인 만큼 평가가 후한 편이었다.
“제가 어제 막노동을 하고 왔거든요. 요즘 연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오늘이 1차 예선인데도 돈이 없어서 막노동을 했어요. 그래서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 떨어질 생각으로 왔는데…….”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참가자가 운다.
유수한은 그 모습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인 참가자였고 막노동을 하는 걸로 보아 풍족한 환경은 아니었다. 문득 예전 자신이 생각나서 더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연기는 훌륭했다.
조폭 연기를 했고 맛깔나는 사투리가 인상적이었다. 중간중간 보완해야 할 점도 있지만, 충분히 매력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동적이다.
개인의 서사는 가끔 큰 감동을 준다. 물론 드라마에 나온다면 그 서사는 지워지겠지만, 여기는 오디션장이었다. 참가자에게 서사는 큰 무기였다. 그의 서사를 듣고 나면 그가 하는 연기에 감명받게 된다.
‘이정우 큰일이네.’
사실 설마 1차 예선에서 떨어지겠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직접 참가자 영상을 봤지만, 사실 이정우가 잘만 한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거라 판단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열기가 대단했다. 열정이 느껴졌다. 특히 무명 배우나 일반인 참가자에게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무명 배우는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겨우 배우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프로그램에 열정을 보일 만했다. 하지만 일반인 출연자는 의외였다.
오히려 무명 배우보다 일반인 출연자에게서 더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제대로 연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 날것에 가까웠다. 근데, 그 날것이 굉장히 중독적이었다. 저기서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였나.
‘일반인을 맡은 멘토들이 왜 이렇게 자신감 넘치나 했더니.’
일반인 출연자 멘토를 맡은 20대 후반 연기 트레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우승은 우리 겁니다.]
마이크를 들고 대놓고 말했다.
누구든, 우승자는 일반인 출연자에게서 나올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긴장했냐?”
이정우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기실에서 앞선 무대를 지켜보았던 이정우였다. 하나같이 연기가 출중했다. 가수로서 온갖 무대에 다 올랐는데, 이번에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10명의 참가자를 보고 난 후에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유수한은 대기실에 찾아가 이정우를 불렀다.
“정우야.”
힐끔, 유수한은 어느새 다가온 카메라를 의식하며 말했다.
“하던 대로 해.”
벌벌 떨고 있는 꼴을 보면 엉덩이를 발로 한 대 갈기고 싶지만, 카메라가 있어서 참았다. 이렇게 떨면 곤란하다. 멘토로 이름을 올렸는데, 1차 예선도 통과 못 하면 유수한 역시도 타격이 온다. 물론 큰 타격은 이정우가 받겠지만, 유수한이 멘토인 만큼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었다.
“야.”
작게 이정우를 부른 유수한이 한 걸음 다가가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정우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1차 떨어지면 넌 나한테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