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유수한이 선택하면
“윤화진에게 백이현은 그런 사람이니까.”
백이현은 윤화진의 잊지 못할 사람이 된다.
사랑을 하다 보면 한 번에 사랑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경우도 숱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었다. 서서히 마음에 스며들어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모르는, 윤화진에게 백이현은 그런 사랑이었다. 자연스럽게 마음에 스며들어 사랑인 줄 몰랐던 사람.
“윤화진에게 잊지 못할 사람이 백이현이니까. 사실 특별출연이라고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역할은 아니죠.”
주상혁은 백이현 역할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수한이 그에게 1순위였다. 백이현이 비중이 없는 역할이 아니다. 일찍 극에서 퇴장할 뿐, 윤화진이 품고 있는 불꽃을 키우는 사람이었다. 윤화진에게 잊지 못할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그렇기에 유수한에게 캐스팅 제안을 했다. 사실 크게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이 중심이 작품을 남배우들은 보통 기피한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뭐든 자신이 중심이고픈 감정은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특별출연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였지만, 유수한이 톱스타인 만큼 출연 기대를 접었었다.
주상혁은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수한의 출연 확답을 듣고 소리를 질렀다. 여러모로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연기력은 물론 인기도 좋다. 요즘 연예계에 그런 말이 돈다. 유수한이 선택하면 그 작품은 된다, 뜬다.
“악수 한 번만…….”
갑자기 말을 하다가 벅차오른 주상혁이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요?”
“기운 좀 얻어 가려고…….”
어, 기운 다 뺏길 것 같은데.
주상혁의 얼굴은 살이 없어서 삐쩍 말랐고 다크서클도 심하다. 영양 상태가 부족한지 입술도 텄다. 유수한은 애써 내색하지 않으면 그의 손을 잡았다. 지그시 눈을 감는 주상혁을 보고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여전히 프로답게 미소를 짓고 있다.
“기운이 좋네요.”
“예?”
“대박 날 것 같아요.”
주상혁은 지금까지 만났던 감독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지금 얼굴이나 몸 상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였지만,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백이현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모든 캐릭터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백이현은 윤화진에게 마치 겨울 같은 사람이고-”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며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던 주상혁의 목소리가 멎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커피와 샌드위치 사 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그 순간만큼은 낯선 누군가의 방문이 굉장히 반가웠다. 주상혁은 흐름이 끊긴 듯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말을 더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턱.
테이블 위에 커피와 샌드위치가 놓인다.
“주 감독이 한번 입이 터지면 쉽게 못 말려요.”
그는 이번 영화 홍보를 맡은 이수철이었다. 홍보대행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작년 회사를 차리며 독립했다. 대학 동기였던 주상혁과 계속 인연을 이어 가던 이수철은 독립하면서 그의 영화를 모두 흡수했다. 자연스럽게 이번 영화도 함께하게 된 이수철은 그 누구보다 유수한의 합류를 좋아했다.
“이수철입니다.”
유수한이 명함을 받았다. 짧게 명함을 응시하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듣던 대로 미남이시네요.”
유수한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타이밍을 놓쳤다. 이수철은 유수한의 얼굴을 흐뭇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홍보거리가 굴러들어 왔다. 윤화진 역을 맡은 주해원도 톱스타였지만, 유수한도 그에 못지않았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샌드위치 좋아하세요?”
“아, 네.”
“몸 관리 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소스도 적게 넣어 달라 했어요.”
“감사합니다.”
샌드위치도 잘 먹으면 다이어트 식품이다. 유수한을 배려했다는 게 느껴졌다. 통밀빵에 닭가슴살, 채소 위주로 속이 꽉 채워져 있었다. 아침에 우유 한 컵을 마시고 나온 유수한은 빈속이나 다름없었다.
“저 사실 주 감독이 수한 씨 캐스팅하겠다고 했을 때, 미친놈이라고 욕했어요.”
껄껄.
이수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진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유수한 씨가 캐스팅된 거예요. 말 그대로 복권 당첨된 기분이었다니까요.”
유수한은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매니저라도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해원 씨하고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주해원. 영화 ‘마지막 겨울’ 주연을 맡은 주해원은 톱스타였다. 유수한과 비슷한 또래였고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주해원은 이번 영화로 이미지 변신을 노리는 것이다 다름없었다. 기존 활달하면서도 가벼운 이미지를 벗으려는 것이다.
특별출연이어도 엄연히 상대역이었다. 그렇기에 주해원이라는 사람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촬영은 한 겨울이다. 12월 초에 시작되는 촬영은 장장 3개월이나 진행된다. 영화치고는 긴 촬영 일정이었다. 그 대목에서 주상혁의 연출 스타일이 보였다. 한 컷을 찍어도 오래 걸리는 감독, 모든 순간에도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이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었다. 작품을 물 말아 먹듯이 후루룩 해 먹는 감독이었다면 긴 촬영을 할 수 없다. 촬영 하루 하는 것도 모두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슨, 주 감독은 제작비를 여유롭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1시간 후, 주상혁의 작업실에서 벗어나게 된 유수한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 * *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면 그 시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몰아 한다. 첫 번째는 광고였다. 며칠 동안은 밀린 CF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핸드폰을 시작으로 음료, 화장품, 의류 광고까지 모두 모아 찍었다. 그 다음은 인터뷰 하나를 진행했고 화보 촬영도 했다.
[연예이슈] 유수한, 영화 ‘마지막 겨울’ 백이현 역 출연 확정
유수한은 밀린 스케줄을 소화하고 그 이후에는 틈틈이 이정우의 연기를 손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특별출연 하기로 했던 영화 ‘마지막 겨울’ 관련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HOT] 영화 <마지막 겨울> 캐스팅 진행 상황.jpg +219
주상혁 감독은 나름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었다. 매체 출연은 거의 하지 않지만, 마이너 감성도 가지고 있어서 마니아층도 확고했다. 언제나 주상혁 감독의 신작은 주목을 받는다. 이번 영화는 시대극이었고 거기에 톱스타를 기용하며 늘 그렇듯 화려하게 등장했다.
- 헐 유수한 ㄷㄷㄷㄷㄷㄷㄷㄷ
- 유수한은 소야? 진짜 안 쉬네 ㅋㅋㅋㅋㅋㅋㅋㅋ
- 와 안 봐도 존잼이겠다
- 유수한 특출이네
- 유수한X주해원 이건 되는 조합 ㅇㅇ
└ 잘 어울려
└└ 그림체 존똑 ㅋㅋㅋㅋㅋ
└└└ 주해원 키 큰데, 이번에는 무릎 안 굽혀도 되겠다
└└└└ 헉헉 덩치 차이 벌써부터 기대되고요
영화 ‘마지막 겨울’ 주인공을 맡은 주해원은 모델 출신 배우였다. 키가 170cm가 넘는 장신이었고, 그러다 보니 남주 캐스팅이 힘들 때가 있었다. 적어도 상대역이 180cm는 넘어야 보는 맛이 있다. 남주가 키가 작고 왜소하면 소위 말하는 케미스트리가 생성되질 않았다.
유수한은 키가 크다. 180cm가 넘는 신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주해원과 자연스럽게 몸집 차이가 났다. 어깨도 넓은 편이니, 주해원 입장에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는 캐스팅이었다.
[빛유/자유] 휴, 가뭄 시작하나 했더니 떡밥이 계속 터지네요 +21
[빛유/자유] ㅋㅋㅋㅋ 예능 이어서 특출 떡밥 ㅋㅋㅋㅋㅋㅋ +9
[빛유/자유] 떡밥이 너무 많아서 배 터질 것 같은 덕질은 처음... +16
[빛유/자유] 배우 덕질하면 굶어 죽기 딱 좋다던데, 이게 머선129? +11
이제 유수한의 팬들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떡밥이 하루도 끊기지 않고 터진다. 갑자기 공중파 예능에 합류하지 않나, 작품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영화 출연 확정을 지었다. 줄줄이 터지는 떡밥에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유수한은 담담했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출연하는 게 당연하다. 항상 생각하지만, 작품이 좋다면 비중이 낮아도 괜찮았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도 주연이 아니었음에도 선택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고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왔냐?”
출연 보도 자료가 나온 후에 반응을 살피던 유수한이 초인종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급한 스케줄이 마무리되었기에, 다음 일을 진행했다.
“네…….”
짐을 잔뜩 들고 온 이정우가 눈에 보인다.
“들어와.”
이번에는 다행히 카메라를 달고 오지 않았다. 물론 몇 차례 주의를 주었다. 집에 올 때, 카메라를 대동해서 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방은 부엌 옆에 비어 있는 방 써.”
이정우는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유수한은 1차 경연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정우를 직접 집에 데려다 놓고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어딜 못 가게 가둬 놓고 연기로 쥐어 패는 일이나 다름없다.
“스케줄은?”
“정리했어요.”
“잘했다.”
이정우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방에 짐을 두고 나왔다. 벌써 거실 테이블에는 이정우가 소화해야 하는 대본이 출력되어 있었다.
“일단 이거부터.”
유수한은 미리 이정우가 소화할 하루 스케줄을 출력해 놨다. 일주일 동안 이정우는 이 집에 갇혀서 오직 연기 연습만 하게 될 운명이었다. 물론 유수한이 계속 집에 있는 건 아니었기에 잠시 자유를 만끽하겠지만, 미리 짜 둔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했다.
“이걸 어떻게 해요?”
“고작 일주일인데 왜 못 해?”
“헐.”
이정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촘촘히 적혀 있는 계획표를 보았다. 우선 새벽 6시 기상이었다. 여기부터 믿기지가 않는다. 유수한은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아침형 인간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발성, 발음 교정을 오전 시간에 하고. 그 이후에는 이 대본을 소화할 거야.”
미리 유수한은 대본 몇 개를 준비했다. 하나는 단막극이었고 나머지는 인상 깊은 장면을 몇 개 추려 놓았다. 일부러 책으로 만들어 연습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단막극은 오늘부터 준비할 거야. 그러니까 대사 다 외우고 대본 분석해. 리딩은 내일 할 거니까, 최대한 완벽하게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연기로 쥐어 팬다.
유수한은 이정우를 이 집에 가둬 놓고 원 없이 쉐도우 복싱을 할 생각이었다. 이정우 소속사에서도 협조했다. 이정우가 예능 출연을 확정 지으며 자잘한 스케줄을 이미 정리한 상태였다. 이정우 매니저 반응은 시원했다. 이정우를 데려다가 죽을 끓여 먹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지금 오전 9시니까 발성부터 시작해.”
이정우는 고개를 푹 숙인다.
아무래도 연미새를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싶었다. 꼼짝없이 이 집에 갇힌 이정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세를 고쳐 앉고 발성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소리를 길게 내뱉던 이정우가 힐끔 유수한을 보았다. 그 순간에도 유수한은 영화 ‘마지막 겨울’ 대본을 읽고 있었다. 흔들림이 없었다. 볼펜을 쥐고 진지한 눈으로 대본을 읽는다. 이미 수차례 읽었던 대본은 조금씩 낡기 시작했다.
‘연기에 미친 놈.’
아무래도 아무리 뜨고 싶어도 유수한을 붙잡은 건 실수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