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네가 없으면
예능 프로그램 ‘캐스팅-배우들의 전쟁’은 올 가을, 편성을 확정 지었다. 알려진 멘토 라인업은 젊은 배우로 구성했고 심사위원은 명예와 권위가 있는 배우가 대부분이었다.
[연예뉴스][단독] 유수한, 이정우 멘토 된다? 예능 ‘캐스팅’ 출연 확정
점차 예능 ‘캐스팅’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유수한에 대한 기사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유수한은 확고히 자리 잡은 톱배우였다. 사건 사고가 많았던 배우였지만, 어느새 그 이미지도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선택하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었기에 대중들은 유수한의 행보에 주목했다. 따라서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끝난 후에 선택한 예능에도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 유수한 예능 나와? ㅋㅋㅋㅋ 노예식당이 끝일 줄
- ㅋㅋㅋㅋㅋㅋㅋ 유수한은 몸이 열 개는 되는 듯 ㅋㅋㅋ 꾸준히 일하네
- 이정우랑 진짜 친한가 봐... 유수한 예능 울렁증 있는데.. ㅋㅋㅋㅋ
└ 이정우가 커피차 보낸 거 보니 친하긴 한가 봐 ㅋㅋㅋㅋㅋ
└└ 안 어울리는 조합 같은데 친한 거 보니까 잘 어울리네.. ㅋㅋㅋㅋ
└└└ 의리 오짐 이정우 나온다니까 도와주는 거 같은데?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친하다는 오해를 사게 되고 그것에 대해 딱히 해명하지 않게 되었다.
- 유수한이 멘토? 너무 어리지 않나 ㅋ 쟤 연기 잘해?
└ ㅇㅇ 너보다 잘해
└└ 잘해 유수한 본업 존잘임
└└└ 유수한이 연기 못할 때는 오직 노예식당 상황극 뿐임 ㅋ
└└└└ ㅋㅋㅋㅋ 아, 알지알지 상황극할 때 그런 발연기가 없어 ㅋㅋㅋㅋㅋ
처음에는 배우와 관련된 예능이라고 해도 굳이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가 끝나면 숨을 좀 돌리고 바로 영화 특별출연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사이에 예상하지 못한 스케줄이 굴러올 줄은 몰랐다.
“형, 여기 커피요.”
유수한은 커피를 마시며 이정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이정우를 키워야 한다. 듣기로 이정우는 연기 수업을 받고 있었고 오디션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이돌이었고 예능 ‘캐스팅’ 안에서 손꼽을 만큼 유명한 이정우였다. 그러니 자존심도 있을 것이다. 본업이 아이돌인 만큼, 조금만 못해도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숙제.]
라고 쓰던 유수한이 말을 바꾸었다.
[과제. EXIT를 보고 강휘민 연기의 장단점을 모두 찾아올 것.]
짧게 압축한 내용을 보냈다.
이정우의 연기 경력은 ‘EXIT’가 끝이었다. 연기 경험이 거의 없다. ‘EXIT’도 유수한이 이정우를 강제로 끌고 간 거나 다름없었다. 유수한이 아니었다면 이정우는 그대로 주저앉아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언제까지요?]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정우 답장이 돌아왔다.
[다음 주까지.]
유수한의 공식적인 드라마 촬영 일정은 다음 주에 끝난다. 촬영이 끝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생기는 유수한이라, 이정우 연기를 본격적으로 봐줄 생각이었다.
예능 ‘캐스팅’에서 유수한의 분량은 크지 않다. 하지만 방송의 파급력은 분량과 비례하지 않았다. 이정우가 못하면 유수한에게도 영향이 온다. 그러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닌 연기와 관련되어 있으니, 더더욱.
[네.]
지금 이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답은 선선히 돌아왔다. 이왕 하게 된 거, 좋은 결과물을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이정우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작진과 대화하면서 느낀 건데, 애초에 한초원을 생각할 정도였다면 꽤 수준급의 연기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 말은 이정우가 우승할 가능성은 제로라는 뜻이었다.
“초원 씨.”
다시 촬영에 집중한다.
요즘 유수한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후반부 촬영에 집중하고 있었다. 드라마 주연을 하다 보면 종종 현장에서 메이킹 카메라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능숙해진 유수한이었다.
“카메라. 메이킹 왔어요.”
“아.”
한초원은 주연 경험이 없다.
물론 드라마 촬영을 해 봤으니 메이킹 촬영을 경험해 봤겠지만, 중심은 아니었다. 보통 메이킹 촬영은 주연 위주였다. 조연이 나온다 해도 주연과 함께이거나, 함께 걸리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현장에서 딱히 메이킹 촬영을 의식하지 않았던 한초원이었다. 그것도 이번 드라마를 통해 달라졌다.
“웃어요.”
메이킹 촬영이 오면 유수한은 일단 웃었다. 심각한 상황이 아닌 이상,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웃는 얼굴은 호감을 가져다준다. 그저 웃지 않았을 뿐인데 촬영 현장에서 불성실한 배우가 될 수도 있었다. 소문은 보통 그런 식으로 퍼진다. 촬영장에서 웃지도 않고 삐딱하더라, 그 말을 시작으로 스태프에게 갑질하고 태도가 불손한 배우가 되는 것이다.
“지금 무슨 촬영 중이에요?”
역시나, 메이킹 담당 PD가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어, 짧게나마 양순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철종이죠.”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짧나요?”
“네, 짧아요.”
작게 웃음이 터진다. 그것도 잠시였다. 양순 역을 맡은 한초원은 좀처럼 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뭔가 골몰히 생각하는 듯했다. 한초원의 버릇이었다. 촬영장에서 연기에 집중하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던 유수한이 툭, 한초원의 손을 건드렸다.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아주 작은 부분도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피곤해요?”
유수한이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요. 생각 좀 하느라고요.”
“무슨 생각이요?”
“그냥, 이 순간에 양순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초원은 딱 배우였다.
연기만 하는 배우. 요즘은 배우가 노래도 하고 예능도 한다. 그런 배우가 늘어 가고 있는데, 한초원은 딱 연기만 할 수 있는 배우였다. 촬영장에서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항상 연기하는 그 인물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말이 없는 건 당연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상대역이니 촬영장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사람인데, 서로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게 또 싫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말이 없는데 다른 한 사람은 활달하면, 가끔 기가 빨릴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울 것 같아요.”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말하는 한초원을 보던 유수한이 되물었다.
“울 것 같아요?”
“네. 여러 가지 복합적이에요.”
“어떤?”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아서 울 것 같고. 이게 한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서 울 것 같고. 또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울컥할 것 같고.”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킹 PD가 눈앞에 있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 머리에 연기 생각이 가득했다. 한초원과 연기를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온다. 서로 말이 없어서 침묵이 흐르다가, 누구 하나가 연기에 대해 물꼬를 트면 그 순간부터 말이 많아졌다.
“근데 울면 안 되니까.”
연기에 대해 진중히 얘기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그래서 참아야 하니까, 심각해진 거죠?”
유수한의 물음에 한초원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기애애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간다. 드라마 내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지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웃음꽃이 피었다. 유수한은 한초원과 눈을 마주치며 어떻게 연기할지 이야기했고 서로의 의견을 들었다. 점차 두 사람은 메이킹 PD를 잊어 가고 있었다.
[메이킹]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원양커플♥ 자기들만의 세상에 푹 빠진~ '◡'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14회의 내용은 궁궐에서 도망 나온 이원범의 모습을 그렸다. 몰래 양순을 만나고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하루를 그렸다. 물론 그 하루가 짧디짧았지만.
메이킹 내용의 중심도 원양커플의 짧은 하루였다. 곤룡포를 벗은 이원범의 모습은 색달랐다. 양순 역시도 늘 추레한 모습에서 벗어나 이원범이 선물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이원범이 선물한 노리개를 했다.
- 어어, 셔터 내려 영업 끝났어ㅜ
└ 드르르르르륵
└└ 내려내려
└└└ 빨리 내려
행복한 모습을 보던 시청자들은 이대로 극이 끝나기를 바랐다. 역사와 다르게 도망간 이원범이 양순의 손을 잡고 멀리멀리 떠났으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 슬픈 장면이었다.
- 이제보니 유수한 캐미장인인 듯
└ ㅇㅈ 만나는 여배우마다 다 잘 어울려
└└ 아무래도 얼굴이 잘생겼으니까
└└└ ㅋㅋㅋㅋㅋㅋ 맞아 얼굴이 유수한이니까~
늘 그렇듯, 주인공 커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상대역과의 캐미스트리는 늘 중요했다. 주인공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반응이 오다가도 멈추는 경우가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말이 없었고 그저 재밌으면 봤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공의 합을 굉장히 중요히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 솔직히 둘이 그림체 안 맞는데, 성격이 너무 잘 어울림 ㅋㅋㅋㅋㅋ
└ 맞아 그림체는 딴판인데 분위기가 존나 맛집임 ㅋㅋㅋㅋ
└└ 돈 없는 선비와 가난한 양반가 셋째 딸이 만나는 거 같아 ㅋ
└└└ ㅋㅋㅋㅋㅋ 윗댓 비유 찰떡이다 둘 다 가난해서 떡 하나 나눠 먹으며 살 상
└└└└ 떡 하나 나눠 먹으면서도 지들끼리는 대화가 잘 통해서 행복할 상
└└└└└ 딱이다 겨론해라
성격이라.
확실히 유수한의 성격은 활달한 편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오직 연기에만 집중하는 편이었다. 한초원 역시도 그런 성향이었기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인간적인 호감이었다. 연애를 하고자 하는 그런 호감이 아닌.
“촬영 시작합니다!”
오늘은 까다로운 촬영이 예상되었다.
가장 편한 촬영은 역시 세트장이었다. 편하게 대기할 수 있는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고 극심한 더위를 피할 수도 있다. 원하면 커피를 마실 수 있고 화장실도 있다.
반면 오늘 촬영할 장소는 화장실도 마땅치 않은 공간이었다. 바로 산에서 이루어지는 촬영이었다. 괴한에게 끌려간 양순을 뒤늦게 찾아가는 이원범이었다.
“양순아!”
달음질을 친다.
이원범 역시도 언제 붙잡힐지 모른다. 그가 또다시 궁궐을 빠져 나간 걸 알게 된 대왕대비가 이미 사람을 보낸 상황이었다. 왕이 사라진 궐 역시도 심상치 않았다. 철종을 모시던 사람들 모두를 문책하고 있었다.
“김정오…….”
칼을 맞은 채 쓰러진 김정오가 보였다.
이미 김정오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원범이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는 양순이 없었다. 그저 떨어진 노리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원범은 눈 뜬 채 죽음을 맞이한 김정오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감겨 준다. 김정오는 끝끝내 양순을 사랑하는 연심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의 끝은 죽음이었다. 양순을 살리는 선택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 김정오 살려라
└ 2222222
└└ 3333333
└└└ 444444444
순애보 성향이 강한 서브 남주였기에, 남주만큼이나 인기가 좋았다. 차라리 김정오와 양순이 연결되기를 바란 팬도 있을 정도였다. 이해는 한다. 역사가 있기 때문에 철종은 무능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양순아.”
이원범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양순을 보았다. 그의 눈이 붉어진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양순이 고개를 저었다.
“위, 위험하다. 어서, 여기로, 여기로 와라…….”
심장이 매섭게 뛰었다.
얼굴에 피가 묻은 양순은 눈에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손에 묻은 피는 양순의 것이 아니었다. 김정오의 것이었다. 양순을 지키기 위해 자객과 싸우고 숨이 끊어진 김정오의 피였다.
“전하.”
양순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원범은 두렵다. 사늘한 시체가 된 김정오처럼 양순 역시도 그리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발, 이리, 이리 와. 양순아, 제발…….”
이원범이 주저앉는다. 무릎을 꿇은 채로 애원하고 있었다. 뒤틀린 삶에서 그를 지탱해 준 건 양순이라는 존재였다. 원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을 해야 하는 순간에도, 세도가에게 속절없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발버둥 치는 그 순간에도, 늘 이원범은 양순을 생각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양순은 웃고 있었다.
홀가분하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다시 뒷걸음질 치던 양순이 그대로 허공에 몸을 맡기며 벼랑에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