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손대지 말라
8월 중순, 화려하게 문을 연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평범한 나무꾼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왕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양순과의 운명적 사랑, 한순간에 신분이 뒤바뀌며 양순을 잃은 이원범의 고뇌, 극에 달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보여 주며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유수한의 첫 사극이었다. 기존 철종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한순간에 왕이 된 신데렐라였다. 유수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유수한은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첫 등장한 이원범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OKEN] SBC ‘나는 왕이로소이다’ 1회 7.6% 평탄한 출발!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시청률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성적표였다. 처음 시작에 시청률이 저조하면 여러 가지 영향을 받는다. 물론 시작이 저조하다고 해서 끝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여러 드라마가 초반 분위기와 상반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저조한 시청률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시청률이 나았다.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젊은 감성의 사극이었다. 주연 롤을 맡은 배우가 모두 젊다. 40대가 되어서도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요즘 현상을 보면, 젊은 배우가 주연 롤을 맡으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마디로 신선한 느낌이 든다. 그 말은 곧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수한은 경험이 많은 배우였다. 다작을 하는 배우였고 매 작품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배우였다. 거기다가 연극 경험이 풍부한 한초원의 연기력 역시 묵직했다.
[HOT] 저 시골에 사는 나무꾼인데요. 갑자기 제가 왕이라네요? 이거 사기죠? +459
첫 방송 후에 커뮤니티 여기저기에 영업글이 올라왔다. 드라마의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부분을 편집해서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유수한 저 꼬라지여도 존잘이네
└ 분장을 뚫고 터져 나오는 존잘력...!
└└ 진심 볼 때마다 새로워 매번 잘생김
└└└ 벌크업 꾸준히 유지하네 몹시 바람직해 ㅋㅋㅋㅋㅋㅋㅋ
초반, 이원범의 평범한 나무꾼 모습을 보여 줘야 하기에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학문에 대한 욕구는 있었기에, 남는 시간 공부를 하는 모습이 나왔지만, 잠깐이었다.
- 1회 마지막에 곤룡포 지렸다 순간 철종이 성군으로 보였잖아 ㅋㅋㅋㅋㅋ
└ ㅇㅈㅇㅈ 말해 뭐해 얼굴로는 성군 쌉가능임
└└ 얼굴로 정치 했으면 세도가 눈빛 한 방에 정리 쌉가 ㅋㅋㅋㅋㅋㅋ
└└└ 연산군이 그렇게 잘생겼다던데, 폭군도 졸라 잘할 거 같음 ㅎ
└└└└ 내가 대신 시중 들고 싶을 정도로 존잘임...
이원범은 모든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옷 하나 입는 것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다. 그 모든 순간에 적응해야 하는 이원범이었다. 작은 실랑이 끝에 결국 이원범은 두 손을 들어야 했다.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내면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수한은 위태로운 이원범을 눈빛으로 표현했다.
- 이거 재밌나 봐 ㅋㅋㅋㅋ 오늘 출근하니까 여자들 다 유수한 얘기 하더라
└ 재밌어 ㅋㅋㅋ 일단 얼굴이 재밌음 ㅋㅋㅋㅋㅋ
└└ 존잼임 ㅇㅇ
아직 시작이지만, 전체적인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2화부터는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랑에는 뭐든 걸림돌이 있다면 더 불타오르는 법이었다. 이원범에 대한 사랑을 지우지 못한 양순은 궁에 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의 인연이 생긴다. 이원범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양순의 흔적을 찾아간다.
“안녕하세요.”
방송이 시작되고 나면 촬영장 분위기가 달라진다.
촬영 현장은 언제나 바쁘고 정신없다. 자신의 체력을 갉아 작품에 쏟아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물이 나오고 성적에 따라 촬영장 분위기가 달라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오늘 촬영장 분위기는 좋았다. 완벽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좋은 분위기로 스타트를 끊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방송 봤어요?”
자연스럽게 드라마 이야기를 한다.
유수한은 호텔에서 방송을 봤다. 스태프와 함께 모여서 드라마를 보는 것도 좋지만, 요새 계속 밤샘 촬영에 몸이 지쳐서 호텔로 돌아왔었다.
“네.”
당연하다는 듯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촬영을 계속하고 있기에 모니터링은 필수였다. 언제나 공부하듯이 드라마를 본다. 항상 두 번 이상 모니터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체력이 없었다. 아쉽지만, 시간 날 때 다시 드라마를 찾아 볼 생각이었다.
“점점 후반으로 갈수록 분당 시청률이 좋아져서 2회는 시청률 더 나올 것 같아요.”
항상 그렇듯, 분당 시청률을 세세하게 분석한다.
어느 장면에서 시청률이 올라갔고 초반 유입이 그대로 이어졌는지, 후반에서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세세하게 분석해서 보완점을 찾는다.
“확실히 초원 씨와 붙을 때 반응이 좋아요.”
주인공의 케미스트리는 중요하다. 극을 이끌고 가는 주연이 잘 맞지 않으면 결국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온다. 한초원과는 여러 번 함께 호흡을 맞추었기에, 익숙한 상대였다.
“안녕하세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한초원이 저 멀리서 졸린 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살짝 눈이 붉어져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잠을 못 잔 눈치였다.
“초원 씨,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유수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어제 방송 보느라고요…….”
한초원이 말끝을 흐렸다.
나름 한초원에게는 첫 주연작이었다. 단막극 주연을 두 차례 경험했지만, 이번 드라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계속 부담감이 있었고, 그렇기에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보고 또 보고. 그러다 보니 해가 떴고 잠을 잘 타이밍을 놓쳤다.
“밤새웠어요?”
한초원이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우리 오늘 스케줄 빡빡한데.”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수한도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잠을 설쳤다. 첫 작품을 한초원과 함께했고, 그때 유수한에게는 한초원이 그 누구보다 멋진 베테랑 연기자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도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대기 시간에 자면 돼요.”
한초원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촬영을 하다 보면 잠이 모자란 건 일상이었다. 그리고 촬영에는 대기 시간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그때 조금씩 잠을 자면 된다.
“무리하지 말고요.”
“네.”
“그럼 이따 봐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따로 촬영을 이어 나간 후에 오후에는 징그럽도록 계속 붙어 있어야 한다. 스토리가 진행되면 될수록 한초원과 함께하는 장면이 많아지고 있었다.
“전하께오선-”
이미 험난한 사랑이라도 그것만으로는 심심하다.
“무얼 하실 수 있으십니까.”
허.
이원범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찬다. 허수아비라 불리는 왕. 겉으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마치 왕 대접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시당하는 일이 일상이다.
“네 목숨 따위는 가져갈 수 있을 테지.”
충직한 신하.
처음에는 그렇게 여겼다. 그 누구도 이원범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지만, 그는 들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께오선, 지킬 힘이 없습니다.”
고개를 숙인 모습과 달리 말투는 공격적이었다.
주먹을 쥔 이원범의 손이 떨린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명문가에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었다. 세도 정치에 물든 조정을 바꿀 힘은 없지만, 저항심을 갖고 있다. 그는 이원범을 좋은 군주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바꾸려고 미약하게나마 발버둥 치는 그를 지지할 뿐이다.
“그 여인을 지킬 힘도, 명분도 없으십니다.”
이원범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제게는 있습니다.”
서브 남주.
역사에는 없는 인물이지만, 삼각관계를 위해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픽션이 가미된 드라마였고 사실상 정통 사극보다는 퓨전 사극에 더 가까웠다. 전체적인 굵직한 역사는 건들리지 않고 그 안의 관계성만 만들어 냈다.
“저는 그 여인을 지킬 힘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갈라진다.
이원범은 양순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했다. 양순에게는 모든 것이 위협이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고 그런 그를 직접적으로 지키는 사람은 서브 남주, 김정오였다.
“손대지 말라.”
이원범의 목소리가 떨린다.
“내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내 사람이다.”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김정오를 본다. 그는 김정오를 죽이고 싶을 만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손대지 말라.”
떨리는 목소리로 힘주어 말한다.
“어명이다.”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7화 마지막을 장식할 장면이었다.
촬영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철종 역할을 맡은 유수한은 생각보다 편하게 촬영하고 있었다. 머물러 있는 곳은 실내라 덥지 않았고 움직일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양순은 달랐다. 신분이 낮아 하대받는 건 일상이고 넘어지고 달리고 자주 얻어맞는다. 듣기로 산에서 촬영하다가 크게 다쳤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한초원의 얼굴이 초췌해지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달려와서.”
야외로 이동했다.
오늘은 드라마 첫 키스신이 있는 날이었다. 여러 가지 역경을 딛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이었기에 절절함이 포인트였다. 이원범은 주위에 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한다. 일부러 시선을 돌리려 여색에 빠진 척을 하지만, 그럼에도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양순이 사라지고 이원범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다. 세도가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가고 왕으로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결국,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가. 이원범은 지금까지 보였던 순종적인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대왕대비를 찾아갔다.
“이렇게 손목을 잡고 살짝 당길게요.”
처음 키스신을 할 때는 고장 난 기계처럼 굴었던 유수한이었지만, 지금은 제법 배우 티가 났다. 능숙하게 한초원을 리드하며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감독님, 각도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카메라 위치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오늘은 메이킹 촬영까지 와 있었다. 주인공의 첫 키스라, 리허설부터 꼼꼼히 팔로우 하고 있었다.
“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돌아간다.
이원범이 달려오고 있었다. 등을 진 채, 하늘을 올려보고 있는 양순에게 달려간다. 양순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면 놀란 눈을 한 양순이 보였다.
“전하…….”
바로 이어진 입맞춤에 양순의 목소리가 멎는다.
놀란 듯 눈이 커졌던 양순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는 작은 손이 올라가 있었다.
“컷!”
두 사람이 동시에 떨어졌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일은 역시 기분이 묘했다. 유수한은 일부러 괜찮은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우선 모니터를 확인하고 보완점을 찾을 생각이었다.
“여기, 손 괜찮은데?”
윤 피디가 유수한의 어깨를 붙잡은 한초원의 손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꽉 붙잡았다가 서서히 힘 풀어지면서 옷깃을 그러쥐면 좋을 것 같아요.”
직접 손 연기를 보여 주는 윤 피디는 마치 양순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초원은 윤 피디의 디렉션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감정을 표현하라는 뜻이었다.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그날, 수십 번 넘게 입맞춤을 하고 또 했다. 몰랐는데, 윤 피디는 키스신에 목숨 건 연출자였다. 극에서 처음 보이는 두 사람의 키스신이었기에 더 공들이는 눈치였다. 그렇게 입술을 부딪히고 부딪히다 보면 고생하는 건, 유수한과 한초원 두 사람이었다.
“컷!”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좋은데, 한 번만 더 찍을게요.”
마지막은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