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42화 (142/175)

142. 아니라고

무더운 여름.

겨울보다는 낫겠지만, 한여름 촬영은 힘들다. 첫 방송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점점 밤샘 촬영을 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대기 시간, 유수한은 선풍기 앞에 앉아 열을 식히고 있었다. 철종이 수렴청정을 마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수염을 붙였다. 분장은 낯설었다. 처음에는 수염을 붙인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면 지금은 불편했다.

“오빠!”

스타일리스트 보라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갑자기 카메라에 관심이 생겼다던 보라의 말에 유수한은 선물로 원하는 기종의 카메라를 사 준 적이 있었다. 주변 사람에게 잘하자는 생각을 하는지라, 같이 일하는 스태프에게 선물을 주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찍는 거야?”

“네.”

찰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셔터를 누른다. 보라가 뽑은 사진을 흔들며 유수한에게 다가갔다.

“오빠가 필름도 넉넉하게 사 줘서 요즘 열심히 찍고 있어요.”

“그래?”

“잘 나왔다.”

보라가 찍힌 사진을 보며 말했다. 선풍기 앞에 앉아 있는 유수한의 모습이 제법 선명하게 나왔다. 보라는 계속 유수한의 사진을 찍었다. 이제 연예인 생활에 익숙해진 유수한은 카메라 셔터음에 맞춰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이거 좀 멋지다.”

유수한도 사진을 구경했다.

생각해 보면 현대극은 아무 감흥 없었지만, 사극은 느낌이 달랐다. 언제 이런 곤룡포를 입을 거고 수염을 붙일까.

“혼자 보기 아까운데, 팬사이트에 올릴까요?”

보라가 물었다.

“에이, 이런 걸 뭐 하러.”

“이 오빠, 아직도 팬을 모르네. 팬들은 이런 사진에 환장할걸요?”

유수한은 말없이 보라를 보았다. 그냥 촬영 대기 중에 찍은 사진이었다. 다른 점은 사극 분장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보라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테이블에 모아 놓고 카메라로 찍었다.

“이렇게 멀리서 찍어서 잘 안 보이면 더 환장할 듯.”

“악취미가 따로 없네.”

“확대해서 더 선명하게 보려고 난리 날걸요.”

혼자 푸흐흐 웃은 보라가 신나서 유수한 팬사이트에 들어갔다.

이미 유수한은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스태프까지 팬사이트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등급도 높다. 유수한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보라는 우수 등급을 손쉽게 얻어 냈다.

[빛유/자유] 코디 보라예요! 사진 뿌리고 ㅌㅌㅌㅌㅌ

아주 빠른 속도로 사진을 첨부해서 글을 올린다. 업로드 되자마자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헐 ㅠㅠㅠㅠㅠㅠㅠ 수염 모야 ㅠㅠㅠㅠㅠ 사진 고맙습니다 ㅠㅠㅠㅠ

- 전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ㅠㅠㅠㅠㅠㅠㅠ

- 이렇게 귀한 사진을... ㅠㅠㅠㅠㅠㅠㅠ 더, 더 뿌려주세요 ㅠㅠㅠㅠㅠ

- 코디님 지금 어디 계신지? 너무 고마운데 잡으러 가도 될까요? 아, 넝담 ͡° ͜ʖ ͡°

댓글이 폭발한다.

보라는 댓글을 읽어 보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 관심을 받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보라는 가끔 팬사이트에 글을 종종 올렸고 그럴 때마다 팬들이 소위 말하는 떡밥을 던져 주었다.

[빛유/자유] 흑흑흑흑 드라마 언제 시작해요? 전하 보고 싶어요 ㅠㅠㅠㅠ +11

[빛유/자유] 우리 전하 더우신가 봐 ㅠㅠㅠ 얼음 동동 띄운 아메리카노 주고 싶어 +9

[빛유/자유] 전하 ㅠㅠㅠㅠ 옥체 강녕하시옵소서 +7

요즘 팬들은 유수한을 ‘전하’라고 부른다.

직전에 찍은 드라마 ‘EXIT’가 공개되었을 때는 ‘하사님’이라고 불렀고 역할에 따라 호칭이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은 전하였다.

“근데 민수는 어디 갔냐?”

“일 때문에 잠깐 통화하고 오신대요.”

“그래?”

유수한은 드라마가 마무리되면 바로 영화 특별출연 촬영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직 감독과 제대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구두로 출연 협의에 들어갔다. 지금 영화 ‘마지막 겨울’은 막바지 기획 단계였다.

윤화진 역할을 맡은 배우는 주해원이었다. 30대 초반으로 재작년 백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톱스타였다. 아직 단 한 번도 마주쳐 본 적 없는 배우였다. 여러모로 이번 영화 작업이 기대되는 유수한이었다.

“형.”

대기실 문이 열리고 보이지 않던 김민수가 나타났다.

“예능 들어왔는데요?”

“드라마 홍보?”

“아니요. 아직 론칭 전이라, 지금 드라마 끝나고 고정으로 들어가는 예능이요.”

“안 해.”

역시나 유수한의 반응은 예상 그대로였다. 예능 고정은 ‘노예식당’이면 충분했다. 다른 예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유수한이었다.

“일단 들어 보세요.”

김민수는 30분가량 방송작가와 통화를 하고 왔다. 보통 방송작가들은 웬만한 연예인의 매니저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가끔 서로 공유하기도 했고 연락처를 구할 데가 없으면 직접 소속사에 전화해 매니저 번호를 따 낼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 출연 섭외 관련해 이야기를 듣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들어 보고 회사에 보고하거나, 매니저 선에서 컷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일단 연기에 관련된 예능이에요.”

여전히 유수한은 관심 없는 눈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될 거 같은데요?”

“나보고 연기 오디션에 나가라고?”

“아뇨! 형님은 심사위원에 더 가까워요.”

“됐어. 부담스러워.”

“가깝다고 했지, 심사위원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유수한은 예능 울렁증이 있었다.

지금처럼 배우로서 자리를 잡기 전에 예능을 종종 나갔었다. 그때마다 성격과 맞지 않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점차 예능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말했던 것처럼 오 피디 예능을 고정으로 출연하는 이유는 이미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단 말해 봐.”

유수한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 이정우 씨가 출연한대요.”

“이정우?”

“네. 참가자요.”

“걔가?”

의외의 이름이 튀어 나온다. 이정우가 계속 연기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신기했고 그 자존심에 연기 오디션에 참여한다는 사실도 의아했다.

“참가자 멘토 제도가 있대요.”

멘토.

그 말을 들으니 슬슬 상황이 짜 맞춰진다. 심사위원은 아니지만, 심사위원에 가깝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아, 설마?”

“네. 형님이 이정우 멘토로 나와 주면 좋겠대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

이정우와의 관계는 드라마 ‘EXIT’와 함께 끝날 줄 알았다. 갑자기 촬영 중에 전화 연결을 한 것도 이상했는데, 계속 질기게도 연결이 되고 있었다.

“싫은데.”

“괜찮지 않아요? 대표님도 좋다고 하시던데요?”

“내가 싫은데.”

유수한은 딱히 이정우와의 관계를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고, 연기와 관련된 예능이라고 해도 딱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근데 걔는 왜 거길 나간대? 오디션에 참가할 성격이 못 될 텐데.”

“아이돌이잖아요. 이제 그룹 활동도 끝물인데, 슬슬 개인 활동 신경 써야죠.”

“그런가.”

“형, 일단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유수한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옆에서 매니저가 조잘거리며 설명을 해 주고 있지만, 딱히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 상금 대신 드라마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그런 프로그램은 이전에도 몇 번 나왔었다.

뮤지컬 배우를 발굴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무명 배우를 중심으로 했던 오디션도 있었다. 매니저 말대로 심사위원이 아니라서 부담감은 덜 수 있지만, 멘토라는 역할 역시도 쉽지는 않았다. 아직 유수한은 젊은 배우였기에 대중이 어떤 시선으로 볼지 가늠할 수 없었다.

“부담스러워. 내 주제에 멘토는 무슨.”

“왜요? 이정우 씨 잘만 가르쳐 놓고.”

“그땐, 걔가 너무 엉망이니까.”

앞에 두고 연기를 해야 하는데, 이정우의 연기력은 감정을 깨뜨릴 만큼 심각했다. 지금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은 만들어 놓았던 유수한이었다. 기고만장한 이정우의 성격을 누르기 위해 집으로 끌고 가기도 했었지만, 이정우라는 사람 자체는 탐탁지 않았다.

“심사위원은 연기 경력이 풍부한 선생님들이 하실 예정이고, 멘토는 젊은 분위기래요.”

옆에서 여전히 조잘거린다.

유수한은 생각이 쉽게 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매니저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무시했다. 촬영하는 것도 힘들었고 매니저도 사람이라, 몇 번 이야기하고 더 권유하지는 않았다.

슬슬 예능에 대해서 잊어 갈 즈음이었다. 해가 동틀 무렵에 호텔에 도착한 유수한은 딱 세 시간을 자고 다시 나왔다.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고 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쫓는데, 그 날따라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뭐냐?”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았다.

“이 새끼…….”

유수한은 넓은 공터에 자리 잡은 커피차를 보았다.

팬이 보낸 커피차였다면 유수한의 입에서 욕설에 가까운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차 상단 현수막에는 유수한의 얼굴이 있었다.

“와, 이정우 씨도 대단하네요.”

그리고.

유수한 사진 옆에는 이정우가 씩 웃고 있는 얼굴이 박혀 있었다. 이 커피차를 보낸 사람은 이정우였다. 누가 봐도 이정우가 보낸 커피차였다. 그리고 이걸 촬영장에 보낸 이유를 유수한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괘씸했다.

[유수한 선배님, 제 연기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문구가 가관이다.

며칠 전, 이정우에게 문자가 왔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말은 없었지만, 은근히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마 이정우도 들었을 것이다. 유수한이 출연을 거절했다는 것을.

이정우는 아이돌 그룹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수한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드라마 출연 후에 인터뷰를 수차례 했었다. 그때마다 항상 타이틀은 유수한과 함께 붙어 있었다. 더군다나, 일회성으로 출연했던 예능 ‘3박 4일’도 마찬가지였다. 유수한에게 전화 연결 한 그 순간이 가장 화제였다. 이정우는 멍청해 보이지만, 가끔 어떨 때는 두뇌 회전이 빨랐다. 그는 이제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할 시기였다. 예능 프로그램 하나가 들어왔고 공교롭게도 연기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피디는 이정우에게 은근히 멘토로 유수한은 어떤지 물었다.

계속 기사를 통해, 이정우의 연기 선생님이 유수한이라는 내용이 흘러 나왔기에 자연스럽게 접점이 생겼다. 그때, 이정우는 생각했다. 유수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야 존재감이 조금이라도 생기겠구나.

“수한 씨, 커피 잘 마실게요.”

벌써 현장에 도착한 한초원은 아이스 라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유수한은 그 모습을 보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사실 지금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아, 골 아파.”

이정우가 커피차를 보냈다.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가 배우에게 커피차를 보냈다. 이 내용이 사방팔방에 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오빠, 이정우가 지금 SNS에 글 올렸어요.”

“뭐?”

“커피차요.”

홱.

유수한이 보라의 뺏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정우가 커피차 사진과 함께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올렸다. 그 순간, 유수한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예이슈] 윅스 이정우, 유수한에게 커피차 보내

당연히 관련 기사가 쏟아졌고 여러 커뮤니티에 관련 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HOT] 곱하면 현실이 된다? 알콩달콩 친목하는 스승과 제자(feat.EXIT) +997

아니야, 그거.

- 둘이 훈훈하다 ㅋㅋㅋㅋ 많이 친해졌나 봐 ㅁ_ㅂ

└ 더 넓은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ㅁ_ㅂ

└└ ㅠㅠㅠㅠ 둘이 친목하는 거 진짜 커여워 ㅠㅠㅠㅠㅠ

└└└ 스승과 제자... 맛있네 ㅎ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야. 아니라고…….”

제발 날 엮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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