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41화 (141/175)

141. 마지막 겨울

드라마 성적이 좋았으니, 김승찬 감독도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다. 애초에 드라마를 하던 감독도 아니었고 처음 시작부터 힘들게 들어갔던 ‘EXIT’였다. 김승찬 감독은 드라마 ‘EXIT’가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욕심과 기대는 있지만, 늘 그렇듯이 모든 일이 기대만큼 풀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라마 ‘EXIT’는 기대 이상으로 잘된 작품이었다.

“아, 저는-”

유수한은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전화를 받기 전부터 김승찬 감독은 무슨 이유로 전화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드라마 시즌2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드라마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EXIT’의 시즌2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당사자는 당연히 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연 배우였던 유수한에게 의견을 묻는 건 당연했다.

“아무래도 제가 시즌2에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말하되, 돌려서 자신의 의견을 내뱉었다. 드라마 ‘EXIT’에서 유수한이 맡은 주인공 이은결의 존재감은 냉정히 말해 8할 이상이었다. 작품의 중심이자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연출자 입장에서도 주인공 이은결을 배제하는 시즌2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이럴 때도 겸손을 챙기는 거예요? 다들 입만 열면 이은결을 찾는데?

유수한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살아남은 이은결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은결은 혼자 살아남은 것 자체를 버티지 못할 사람이니까요.”

시즌2의 스토리의 시작점은 머리에 그려진다. 이은결이 살았든, 죽었든 흐름의 시작은 동일했다. 군대 외에도 퍼진 좀비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투. 그리고 시즌1의 중심 이야기였던 군대에서부터 퍼진 좀비 바이러스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다룰 것이다.

이은결이 살았다고 해도 군대에 퍼진 좀비를 혼자 막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은 군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소린데, 그 과정은 이은결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은결은 그 자리에 남을 것이다. 홀로 살아남은 것을 저주하며 목숨이 끝날 때까지 좀비에 대항할 것이다.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은 이은결답지 않았다.

“시즌2는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거잖아요. 이은결이 혼자 살아 군대를 나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와 함께하는 모습도 쉽게 납득할 수 없어요.”

이은결을 잘 아는 사람은 역시 그 캐릭터를 창조한 작가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만큼 이은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면 역시 배우였다. 이은결이 되었고 연기했던 유수한은 작가만큼이나 이은결에 대해 잘 알았다.

- 오 작가님하고 같은 말을 하시네요.

오한성 작가도 유수한과 같은 생각을 했다. 사실 오한성 작가는 작가로서 생각했을 때는 시즌2는 이은결과 별개의 이야기로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즌1은 말 그대로 시작이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이 세세히 그려졌다. 시즌2에서는 좀비 바이러스가 어떻게 퍼졌고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무너졌을지를 그릴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은결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애매했다. 물론 주역이 아니라, 특별출연 느낌으로 후반에 임팩트 있게 등장하는 방향을 생각했지만, 역시 곁다리일 뿐이었다.

“근데 진짜 시즌2 생각 있으신 거예요?”

- 아무래도 반응이 좋으니까요. 낫플릭스에서도 제작비를 두 배로 지원해 주겠다고 하고…….

감독 입장에서는 제작비를 풍족하게 지원해 주겠다는 말은 그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하고 싶은 걸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담감도 찾아온다. 시즌1이 잘된 만큼 그다음 시즌의 기대감이 따라온다. 그걸 충족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은 같아요.”

물론 드라마가 잘된 만큼 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에 악영향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시즌2에는 저는 출연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김승찬 감독은 시즌1 주인공 이은결을 계속 끌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오한성 작가는 합류 여부에 따라 스토리를 짜겠다는 입장이었다. 작감 입장에서는 유수한의 존재는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유수한이 출연한다면 시즌1 애청자도 자연스럽게 끌고 올 수 있다.

- 음.

김승찬 감독에 잠게 신음을 흘렸다.

- 알겠습니다.

우선 수긍을 했다. 유수한의 말을 듣고 나면 안 된다고 꼭 출연해 달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유수한은 자기 주관이 확실했다. 생각 역시도 깊다. 단순한 배우였다면 흥행작이니, 단번에 출연하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승찬은 유수한을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돈이나 인기를 따라가지 않고 생각할 줄 아는, 생각이 뚜렷한 배우였다.

“아깝기는 하지…….”

통화를 마친 유수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작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낫플릭스 드라마 ‘주꾸미 게임’만큼은 아니었지만, 김승찬 감독이 연출한 ‘EXIT’는 흥행했다. 그 반응이 유수한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해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한류 덕분에 아시아권 인기는 조금씩 오르고 있었지만, 서양권에서는 이름 없는 배우였다. 단 하나, 낫플릭스가 제작한 드라마에 출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수한의 위치는 달라졌다.

어쩌면 낫플릭스에서 시즌2 제작 조건에 유수한 출연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배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따로 시즌2 출연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었으니,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연예뉴스] 낫플릭스 ‘EXIT’ 시즌2 제작 확정 …… 유수한 출연은 불투명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첫 방송이 다가올 즈음, 시즌2에 관련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수한의 소속사 K엔터는 시즌2에 출연하길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표 이성실은 소속 배우의 의견을 존중했다.

“안 할 거지?”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회사에 들른 유수한은 이성실의 은근한 질문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소속사 대표 입장에서는 아쉬울 만했다. 국내에서 배우 생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지만, 해외까지 활동을 늘려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요즘 한국에서도 조금씩 할리우드 진출을 하고 있었다. 좋은 배역을 맡아 눈도장을 찍는 경우도 있었고, 비중 있는 조연에 도전하는 톱배우들도 늘고 있다.

유수한을 발굴하고 키운 이성실 대표 입장에서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 K엔터에서는 미국 진출에 성공한 배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해외 진출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네, 안 할 거예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단호한 유수한의 반응에 이성실은 아쉬움을 접었다. 폐급으로 분류했던 유수한이 이만큼 성장했으니, 더 바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욕심이었다.

이성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테이블에 놓인 시나리오를 들었다. 이미 드라마 촬영에 바쁜 유수한이라 보여 줄 필요가 없었지만, 많은 대본을 요구하는 유수한인지라 따로 챙겨 두었다.

“자.”

유수한은 이성실이 내미는 시나리오를 들었다.

“영화네요?”

“주연은 아니고.”

“네.”

“특별출연.”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이지만, 조연에 가까운 경우에는 특별출연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주연급 배우가 조연에 출연하면 여러 가지 악영향이 있었다. 물론 애매한 위치가 아니라면 괜찮지만, 어느 정도 그림이라는 게 있다. 톱에 가까운 배우가 조연에 출연하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소리와 소문이 도는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특별출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영향이 오지 않도록 방지했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아.”

유수한은 시나리오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성실이 특별출연에 불과한 영화 시나리오를 권했다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겨울 – 주상혁 감독」

제목으로는 내용을 유추할 수 없었다.

“보면 알겠지만, 독립군 이야기에 여성서사가 강해.”

이성실의 설명을 들은 유수한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배우 중심 시나리오는 남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다. 여배우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렇기에, 주요 배역이어도 캐스팅 난항을 겪고 신인이나 무명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유수한은 그런 생각은 크게 갖고 있지 않았다. 배우로서 작품의 주역이 될 수 없다고 해도 좋은 작품이라면 관심을 갖게 된다. 우선 시놉시스를 읽어 보던 유수한이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특출인데, 임팩트 있는데요?”

짧고 굵다. 하지만 충분히 이 작품에 참여해도 될 만큼 가치가 있는 역할이었다. 이 영화의 연출자 주상혁 감독은 40대 중반,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실히 갖고 있는 감독이었다. 연출력은 말하지 않아도 걱정되지 않았다.

유수한에게 제안 들어온 역할의 이름은 ‘백이현’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건너가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유약한 성향의 사내였다. 그는 독립 운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부러 외면하며 조선이 아닌 서양에 건너갈 생각에만 골몰하는 비겁자일 뿐이었다.

그런 백이현이 달라진다.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꿈꿨다. 정략결혼에 가까운 만남이었지만, 백이현은 주체적인 성향이 강한 ‘윤화진’의 영향을 받는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그렇게 어려운 길만 걸으려고 하는 겁니까. 보지 않으면 되는데, 눈을 감으면 끝날 일인데,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또렷하게 바라보려 하는 겁니까.]

백이현은 사랑하는 이의 비밀을 알게 된다.

윤화진은 은밀하게 독립군을 도우고 있었다. 백이현이 선물한 귀한 귀금속까지 독립군을 위해 사용했다. 집 안의 금고를 털고 마치 도둑이 든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언젠가 들통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윤화진은 거침없었다.

[당신이 내게 묻는 그 모든 질문들.]

윤화진은 모든 비밀이 들통난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야.]

백이현은 윤화진을 사랑한다. 처음 만난 그 순간, 화사한 봄날 옅은 미소를 짓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윤화진의 글을 사랑한다. 때론 의미 모를 짧은 글도 사랑했다.

조금씩 백이현은 윤화진에게 동화된다. 윤화진이 몰래 노비 출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도 평등한 윤화진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백이현이 천하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밝게 웃는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단 한 번도 백이현에게는 보여 주지 않던 순수한 미소였기에.

[왜?]

결국 백이현은 윤화진에게 물들고 말았다.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그 질문의 대답을 백이현은 찾을 수 없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백이현에게 운명은 윤화진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윤화진에게 동화되었다. 자신의 비겁함이 부끄러웠다. 세상의 부조리를 외면하고 강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 순간이 처절하게 괴로워졌다.

무릎을 꿇은 채로 엉망이 된 백이현은 미소를 짓는다.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눈빛이었다. 모든 것을 감내하는 눈빛, 이렇게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백이현이 일본 순사에 의해 몸을 일으킨다. 비틀거리는 그를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윤화진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윤화진에게 남은 백이현의 마지막 순간.

“어떠니?”

시놉시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유수한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특별 출연이었지만,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인물이었다.

“일정만 괜찮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출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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