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노래나 열심히 했으면
한동안 지방에서 촬영을 계속 이어 갔다. 일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촬영했다면 지금은 곤룡포였다.
조선의 왕이 된 이원범은 낯선 자신의 모습이 버겁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순간의 신분 상승. 자신을 보는 모든 시선에 움츠리고 어깨를 쉽게 펼 수 없다.
“따라오지 말라.”
어딜 가든 혼자가 될 수 없다.
어두운 밤, 홀로 걸음을 옮기던 이원범이 미간을 좁힌다. 뒤를 돌아본다. 따라오지 말라는 말에도 눈치를 보며 따라온다.
“따라오지 말라 했다.”
뭐든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누구도 가까이 둘 수 없다. 권력자에 빌붙은 자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멀리 눈치를 살피고 있는 박 내관 역시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 명을 어기는 것인가!”
억눌렀던 울분을 터트린다.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나약한 왕의 울분에 멀리 눈치를 살피던 모든 이들이 움찔한다. 아무리 힘이 없는 왕이라 해도, 내관이나 궁녀의 목숨쯤은 단숨에 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권력의 끄나풀이라고 해도 이 궁궐 안에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널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납작 바닥에 엎드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원범의 눈엔 참담함이 가득했다. 걸음을 옮긴다. 달빛 아래, 이원범의 모습은 쓸쓸하다.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매일 눈에 아른거리는 양순을 쫓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양순을 그리워하지만,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양순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이 이원범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그는 무늬만 왕이었다. 친정을 할 수 없었고 권력에 짓눌려 살아간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쇠약해지고 있었다.
“컷!”
늦은 시간, 촬영은 계속된다.
유수한은 잠시 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항상 현장에 머물며 촬영을 지켜보는 유수한이었지만, 오늘은 밤늦게까지 촬영이 진행되고 있어서 잠시 눈을 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촬영했다. 몸이 피곤했고 커피를 마셔도 쉽게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눈을 감는다. 다음 촬영이 시작되려면 최소한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아.”
시트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눈을 뜬 유수한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 시간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 사적으로 연락이 올 일은 거의 없었다. 액정에 뜬 번호는 이정우였다. 이 시간에 이정우와 통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난 후에는 이정우라는 존재를 잊고 살았던 유수한이었다.
“여보세요.”
일단 전화를 받아 본다.
- 어어, 받았다. 받았다.
주변이 시끄럽다.
지금 이정우는 집도 아니었고 혼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유수한의 머리 회전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 아, 형. 지금 통화 돼요?
형?
유수한이 미간을 좁힌다. 분명 이정우를 집까지 데려가며 연기를 가르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형’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심지어 자존심이 강한 이정우가 유수한에게 스스럼없이 ‘형’이라는 소리를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건.
“지금 촬영 중인가 봐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예능 촬영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수한의 말에 이정우가 머쓱한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아니, 지금 3박 4일 촬영 중인데요.
그럼 그렇지.
이정우는 낫플릭스 ‘EXIT’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는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였지만, 개인 인지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연차가 쌓일수록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정우는 ‘EXIT’ 출연 이전에는 자신만의 길이 전무했다.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대 위를 휘어잡을 정도로 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키는 크지만, 얼굴이 애매해서 배우로 전향하는 것도 말 그대로 애매했다.
드라마 ‘EXIT’는 이정우 소속사의 힘이었다. 물론 썩어도 준치라고 이정우가 아시아권에서도 인기가 많은 보이그룹 멤버였으니 가능했겠지만, 개인 힘으로는 턱도 없었다.
어쨌든.
드라마로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예능 섭외도 물밀듯이 들어왔을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배우로서 성공 가능성은 적었고 기껏해야 비중 있는 조연 정도가 최고치였다. 그렇다면 다음 길은 예능이었다. 지금 이정우는 예능 ‘3박 4일’의 고정을 노리고 있었다.
- 아니, 여기 사람들이 형이 너무 궁금하다고 해서요.
예능 촬영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전화 연결 하는 일은 흔하다. 그것도 인기 많은 연예인이라면 더더욱 주변에서 연락해 보기를 부추길 것이다.
- 수한 씨, 안녕하세요. 3박 4일 김재완입니다.
지금은 쉬는 중이었다. 예능이라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수한이었지만, 지금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건 좋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어떤 방향일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이 방송에 나올 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유수한은 톱스타였고 목소리만으로도 파급력이 있었다.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지금 전화를 받은 김재완은 배우였다. 예능 ‘3박 4일’은 배우가 주축이었고 아이돌 그룹 멤버 하나와 개그맨 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요즘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유수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주변에서 호들갑 떠는 반응이 들려오고 있었다. 김재완에게 ‘선배’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예능적 리액션을 충실히 보여 주고 있다.
- 수한 씨, 지금 잠깐 통화 괜찮아요?
“아, 네. 지금 촬영장인데요. 대기하는 중이라 괜찮습니다.”
- 아니, 정우가 수한 씨하고 친하다고 해서…….
친해?
“아, 그래요?”
유수한은 순간 기계적인 반응을 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정우와의 관계는 비즈니스였다. 물론 집에 데려와 연기를 가르치긴 했지만, 그것도 일의 연장이었다. 이정우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 측근이었기에 연기가 중요했다. 극 흐름을 깨지 않도록 연기를 지도했을 뿐인데, 그게 친하다는 사실이 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 아니, 친하긴 친한데 그렇게 막 친한 건 아니고요…….
알 만하다.
게스트로 출연한 이정우는 나름대로 고정 멤버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것이다. 출연자들은 자연스럽게 이정우에게 드라마 이야기를 던졌을 것이고, 또 자연스럽게 대화 흐름이 유수한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정우는 말 그대로 허세를 부렸을 게 분명했다. 친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사적으로 친한 척을 했을 테고 그렇게 분위기에 떠밀려 전화 연결까지 시도했을 것이다.
“우리 친해요.”
굳이 이정우를 깔아뭉갤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친해질 생각입니다.”
물론 성격상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 아, 친해질 생각이라고요? 그럼 안 친했다는 거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예능에서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보다.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드라마를 할 때는 연기에 대해 얘기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드라마 끝나고 나서 정우 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일이 있어서 바빴어요. 하하.”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둘러댄다. 결국 결론은 우리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라는 걸 돌려 말하고 있었다.
- 제가 기사 보니까 정우를 집에 데려가서 연기를 직접 가르쳤다는데, 사실이에요?
이정우가 온갖 인터뷰에서 입을 털었던 내용이었다.
“아, 네. 사실입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이정우가 드라마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기본적인 것만 가르쳤다. 물론 단시간에 연기력을 끌어올리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어색한 모습을 줄일 수 있었다. 유수한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정우가 로봇처럼 연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거의 뭐 연기 선생님이네요?
유수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재밌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제가 연기에 미친 사람이라고 소문이 돌고 있어서.”
아마 이 말을 듣고 있는 이정우는 뜨끔하고 있을 것이다. 인터뷰마다 유수한은 연기에 미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니까.
- 연기에 미친 사람으로서 이정우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거 인터뷴가.
“음.”
유수한이 짧게 생각에 잠겼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노래 열심히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대로 끝나면 좋겠지만.
“농담이고요.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성실하게 연기 연습 하다 보면 좋은 연기자가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저도 아직 부족해서 누굴 평가하는 게 쑥스럽네요.”
통화를 마치고 유수한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일을 하고 난 기분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유수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가 기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촬영을 생각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연예뉴스] ‘3박 4일’ 솔직한 유수한 “이정우? 노래나 열심히 했으면.”
연예부 기자들 수준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자극적인 타이틀로 조회수 장사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진 않다.
- 유수한 은근 돌려깐다 ㅋㅋㅋㅋ 이정우 연기 별로였다는 거잖아 ㅋㅋㅋㅋㅋㅋ
└ 이정우 연기 못하긴 함.. ㅋㅋㅋㅋ
- 이정우 연기 못했나? 난 막 거슬리지는 않았음 ㅇㅇ
└ 자세히 보면 거슬리고 그냥 흐린눈 하면 볼 만한 수준임
└└ 유수한이 연기 과외까지 해줬다며 ㅋㅋㅋㅋ 근데도... 할말하않
└└└ 유수한이 고생한게 느껴짐
보름이 지났다.
유수한은 바쁜 촬영 탓에 예능 ‘3박 4일’에서 통화한 것을 잊고 살았다. 오랜만에 서울로 돌아온 유수한은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나 이정우 팬 아닌데, 노래 열심히 하라는 거 좀 마상
└ 22222222
└└ 3333 맞아 좀 좋게 말해줄 수 없나
└└└ 44444 이정우 무안하겠어.
어딜 가나 팬 아닌 척하며 부정적인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다. 방송을 보면 공격적인 말투도 아니었고 웃으며 넘어갔던 이야기를 짚고 있었다.
- 누가 봐도 이정우 팬인데 아니라는 거 개웃픔 ㅋㅋㅋㅋㅋ
└ 222 말만 팬 아니래 ㅋㅋㅋㅋ
└└ 3333 방송 제대로 본 건지 의문 ㅋ 그 다음에 좋은 말 해줬는데, 그건 까먹었나 봄
└└└ 44444 극성팬 특징 좋은 말은 못 들음
└└└└ 555555
└└└└└ 66
물론 이런 반응도 터져 나온다.
- 이정우가 무안하기는 ㅋ 유수한 덕분에 분량 챙겼는데
└ 2 안 친한 거 티났는데 유수한이 말 잘해주더만
└└ 3333 이래서 돌 끼면 피곤해
└└└ 444444
- 나 얘네 관계성 좋아해 가끔 곱하고 싶음
└ 앗 나도 조심스럽게...
└└ 헉헉 나 드라마 보는 내내 곱했다 헉헉헉헉
└└└ ㅁ_ㅂ
└└└└ 존맛임
유수한은 곱한다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몰라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찾아보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반응을 찾아보는 걸 그만두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수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노트북을 켠 유수한은 드라마 ‘EXIT’ 마지막 모니터링을 할 생각이었다.
“봐 볼까.”
보름 만에 주어진 휴일.
「무기고 탈환.」
낫플릭스 ‘EXIT’ 마지막 회가 시작되었다.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