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37화 (137/175)

137. 강화 도령의 사랑

새롭다.

이번 드라마는 의상부터가 새로웠다. 항상 현대극만 하다가 시대극을 하니, 모든 것이 어색했다. 첫 시작은 나무꾼이다. 유수한은 허름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왕족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추레한 차림.

“안녕하세요. 감독님.”

윤지성은 이른 아침부터 바빠 보였다.

“어, 어서 와요! 수한 씨.”

그리고 의욕도 엄청나다. 2년이나 밀리고 밀렸던 작품이라, 더 의욕이 넘치는 듯했다. 유수한은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현대극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제가 사극은 처음이라, 걱정이네요.”

“걱정은 무슨. 수한 씨, 남우주연상도 받았는데 실력은 확실하죠.”

윤지성 피디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미 유수한은 현장에 도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사람들 인상에 깊게 박힌 듯했다.

배우들이 하나둘 출근한다. 그다음 온 사람은 한초원이었다. 한복이었지만, 평민이기에 화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추레하지도 않은 차림이었다.

“상 받은 거 축하해요.”

축하를 너무 받아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민망했다. 이제 그만 들어도 될 것 같았다. 한초원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첫 주인공이라 그런지, 한초원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자, 촬영 시작합시다.”

가볍게 한초원과 동선을 맞춰 보던 유수한이 대본을 매니저에게 주고 촬영할 준비를 끝냈다. 첫 촬영은 유수한이 시작이었다.

나무꾼답게 장작을 팔고 돈을 받는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입에 풀칠하고 살기에는 충분했다. 아직 이원범은 젊었고 건강 상태도 좋아서 그 누구보다 나무를 많이 팰 수 있다. 산이라면 이제는 이골이 날 정도로 탔던지라, 산길을 달려갔다 내려오는 일도 가뿐히 할 수 있는 이원범이었다.

“이거 얼마요?”

이원범은 노리개를 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노리개를 구경한다. 그러다 눈에 들어오는 노리개가 있었다. 붉은색의 노리개. 가격을 듣고 망설이게 되지만, 꼭 선물해 주고 싶은 이가 있었다.

“주시오.”

옥이 작게 박힌 노리개.

그 가격은 이원범이 일주일 넘게 나무를 팔아 번 돈을 써야 할 만큼 비싼 물건이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노리개를 든 이원범은 누군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양순아!”

이원범이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양순이 고개를 들었다.

“너 찾으려고 여기 돌았다.”

상기된 얼굴. 이원범은 빙긋 미소를 짓고 빨래를 하는 양순의 주변을 돌았다. 등 뒤로 선물을 숨긴 채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탁.

빨래를 하던 양순이 미간을 좁혔다.

“할 말 있어?”

“아니.”

“그럼 왜 그러고 있어?”

“줄 거 있어서.”

“줄 거?”

두 사람의 관계는 수평적이었다. 서로를 편하게 대하고 있다. 어느새 빨래를 다 한 양순이 빨랫감을 들고 일어났다.

“뭐 줄 건데?”

배시시 웃는 그 얼굴에 이원범도 따라 씩 웃는다.

“손이 차다.”

빨래를 했으니 손이 차가울 수밖에 없다. 이원범이 양순의 손을 잡는다. 여전히 양순은 영문 모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이원범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노리개를 양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선물.”

노리개를 본 양순의 눈이 커진다. 생각하지 못한 귀한 선물이었다. 조선 시대, 평민도 흔하게 착용하던 것이 노리개였지만, 양순의 처지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값도 비싸 보이는 노리개. 이걸 이원범에게 받았다는 사실이 묘했다.

“예쁘지 않아?”

“예뻐.”

양순은 멍한 눈으로 노리개를 보았다.

“이리 줘.”

이원범이 빨랫감을 빼앗아 가듯 가져갔다. 양손은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더 자세히 노리개를 들여다보았다. 손톱만 한 옥이 반짝거렸다.

“나 나무 잘 팬다.”

같이 나란히 걷던 이원범이 힐끔 양순을 보며 말했다.

“글도 읽을 줄 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영원을 함께하고 싶은 사이였다. 이원범은 노리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무를 잘 팬다는 소리는 굶기지 않겠다는 의미였고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소리는 어리석지 않다는 말이었다.

“같이 살자.”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난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이원범은 왕족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고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양순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힐끔 이원범을 보았다. 그러다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옷을 붙잡는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손길에 이원범도 따라 웃었다.

선물한 노리개가 흔들린다. 하늘은 맑았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풍족한 생활이 아니어도 서로만 있다면 충분했다.

“컷!”

바로 모니터를 하러 걸음을 옮긴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잘 살았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만남이라, 서로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 수한 씨 먼저 타이트 숏 찍을게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한다. 양순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한초원에게 보내는 눈빛은 한없이 따스했다. 이원범이 된 유수한은 양순을 사랑한다.

이원범의 삶이 뒤틀리기 직전, 그들의 모습은 따스한 봄처럼 따뜻했다.

* * *

사극은.

“힘들다.”

말 그대로 겁나 힘들다. 불편한 짚신을 신고 뛰어야 하는 것도 힘들고 옷 자체가 불편했다. 지금은 5월이라 날씨가 선선해서 다행이지, 날이 더워지면 고생길이 훤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겨울보다는 나았다.

“자, 다시 가 봅시다!”

짧게 리허설을 끝낸 유수한은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이원범의 삶이 뒤틀리는 순간이 다가왔다.

“전하!”

한양에서 내려온 호종 행렬, 아무것도 모르는 이원범에게는 그저 두려움이었다. 왕족이었지만 왕족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적이 없었다.

14살이 되던 해, 역모에 엮이면서 큰형을 잃었고 지금은 강화에서 숨죽인 채 살고 있었다. 낡은 초가집, 나무를 베며 살아가던 이원범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다. 이 행렬이 평범하게 나무꾼으로 살아가던 이원범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찾은 행렬이라는 것을.

“전하, 제발 이러지 마시옵소서!”

누가?

누가 대체 전하란 말인가.

“전하! 소인의 마음이 찢어지옵니다!”

울음기 어린 목소리가, 그 가식적인 목소리가 이원범을 혼란스럽게 했다. 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주상.”

어디선가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어나세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목소리였다. 사람을 보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강화까지 함께한 순원왕후였다.

“주상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군주입니다.”

상황 설명도 없이 대뜸 왕이란다.

고개를 든 이원범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왕대비의 눈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타의에 의해 몸을 일으킨 이원범은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평화로웠던 그의 인생이 뒤틀린다. 뒤늦게 소란을 알고 찾아온 그의 형은 호종 행렬을 보고 놀란 듯 비틀거렸다.

“양, 양순아…….”

끈질긴 설득으로 가마에 오르려던 이원범은 멀리 보이는 양순을 발견했다. 이대로 끌려간다면 다시는 양순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양순아!”

이원범은 양순에게 달려가려 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왕족이었지만, 평범하게 나무꾼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양순과 사랑을 속삭이고 혼인하자고 약속했다.

그 모습을 대왕대비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가마에 올라탄 대왕대비는 양순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담았다.

“저 계집애를 주시하게.”

분란이 될 만한 싹은 없애야 한다. 하지만 허수아비 왕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지금은 그저 감시하는 정도로 견제를 할 생각이었다.

“양순아…….”

결국 가마에 오른 이원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컷!”

유수한이 숨을 크게 내뱉었다.

낡은 옷과 화려한 가마는 조화롭지 못했다. 가마에서 내려온 유수한은 바로 이어서 촬영을 진행했다. 엎드린 그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다. 바들바들, 떠는 그의 어깨가 가련했다.

조금씩 유수한은 이원범이라는 인물에 젖어들고 있다. 허수아비 왕보다는 자유롭게 사는 나무꾼이 더 나았을 것이다. 직전에 양순과 사랑하던 장면을 찍었기에, 이원범의 좌절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어때요?”

유수한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연기를 살펴보았다. 극 초반, 급격한 신분 상승을 겪는 장면은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다시 촬영을 이어 나갔다.

“네, 좋아요.”

이제야 유수한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원범은 분명 멋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신분 상승을 겪고 왕이 되어서도 무기력하다. 허수아비 왕이었어도 나름대로 주관을 갖고 정치를 하려 했지만, 역사에 남은 것처럼 늘 좌절당한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으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정도였으니, 그 고통을 쉽게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유수한은 어떻게 이원범을 표현할지 생각했다. 유약한 모습을 살리되, 어느 부분에서는 기존 철종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건 천천히 촬영을 하면서 자신만의 철종을 만들어 갈 생각이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첫 촬영을 마쳤다.

사극은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던 유수한이었다. 한복을 벗고 나니까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짚신하고도 오늘은 안녕이다.

“형, 여기 커피요.”

“고마워.”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트장에서 계속 촬영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인근 호텔에서 숙박할 예정이었다.

차에 올라탄 유수한은 잠시 대본은 가방에 넣어 두었다. 이른 새벽부터 진행한 촬영은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났다. 오늘 유수한이 촬영해야 할 분량은 끝났다. 아직도 세트장에는 불이 밝았다. 보통 촬영장 스케줄은 주연 위주였다. 그러다 보니 조연은 대기 시간이 길었는데, 주연 촬영 분량이 끝난 후에야 촬영을 시작하는 듯했다.

그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내일부터는 꼼짝없이 밤샘도 각오해야 하는지라 일단은 다른 것보다는 쉬는 걸 먼저 생각하게 된다.

“아, 초원 씨.”

호텔 앞에서 한초원을 마주쳤다.

“오늘 고생했어요.”

“수한 씨도요.”

한초원 역시도 피곤한 얼굴이었다. 오늘 하루, 유수한보다 더 긴장했던 한초원이었다. 드라마 주인공으로 발탁되고 항간에서 신데렐라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유수한 덕분에 캐스팅됐다는 소리도 돌고 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부담감을 갖고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수한 씨.”

“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직전, 한초원이 말을 걸었다.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그 말에 유수한은 의아한 듯 보였다. 한초원은 알아서 자기 밥그릇을 챙길 사람이었다. 작품에 피해를 줄 배우도 아니었기에,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잘 자요.”

뭐라, 말을 건네려는 순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유수한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드라마 주연 발탁이 된 것을 계속 신경 쓰는 눈치였다.

“형.”

매니저가 음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연애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시죠?”

뭐래.

“너는 그 입을 조심해야겠다.”

“왜요. 재밌잖아요.”

“그러다 맞으면 안 아프냐?”

“아니, 남녀 관계가 얼마나 재밌어요?”

“시끄러.”

유수한이 혀를 짧게 차고는 매니저 손에 들린 카드키를 빼앗아 갔다. 점점 김민수는 말이 많아졌다. 그만큼 유수한이 편해졌다는 뜻이겠지만, 가끔 귀찮았다.

“형, 쉬세요.”

“그래.”

객실로 들어온 유수한은 가방을 대충 소파에 던져 놓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이제야 하루가 지나갔다. 오늘 하루를 복기하며 유수한은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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