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잔인하다
전쟁.
지금 이 작은 부대 안에서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가끔 이은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을 탈출하려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라 예상했다. 애초에 살아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가? 언론에서는 한국 최초 좀비 바이러스 발원지로 이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정부 역시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시위하고 계세요. 너무, 너무 걱정돼요……. 나 때문에 우리 가족 다치면 어떡해요?]
군인이라고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인 아이들이 많았다. 같은 계급인 강휘민 역시도 젊다. 어린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 이 지옥에서 탈출하려 하는 그 마음도 이해한다.
「여기서 뭐 합니까?」
식당에서 가져온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벽에 기대앉은 채 커피를 마시던 이은결이 고개를 돌렸다.
「왜 나왔어요?」
이제는 좀비로 인해 체계가 무너진 상태라, 이은결의 말투가 한결 풀려 있었다.
「이거라도 먹어요.」
이은결을 찾은 여자는 최유림 상사였다. 20대 후반으로 키가 크고 태권도 선수 출신이었다. 이은결과는 태권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괜찮은데요.」
「먹어. 명령이야.」
최유림이 준 것은 손바닥만 한 초코쿠키였다. 이은결이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량을 제대로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이은결은 웬만하면 먹을 걸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믹스커피 한 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럴 때도 명령입니까.」
「나 결혼한 거 알지?」
이은결 옆에 쪼그려 앉은 최유림이 말했다.
「결혼하지 말 걸 그랬나 봐.」
「갑자기?」
「나를 기다릴 테니까.」
최유림은 작년 겨울에 오랫동안 만났던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하고 최유림은 한결 안정을 찾았다. 남자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웹툰 작가였다. 가정적인 남자였고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근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이 일이 터지고 내가 그랬거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기다리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이제 연락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
이제 인터넷조차 연결이 되지 않는다. 밖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예측할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전 세계가 의문의 좀비 바이러스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다는 것. 생각보다 쉽게 사그라들 문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을 돌린다면 말이야.」
「…….」
「그쪽을 도왔을 텐데. 대대장이 당신을 영창에 처넣었을 때,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그때는 회피가 먼저였나 봐. 사람이 죽었고 또 죽었고 죽었어. 그 사실에 패닉이 왔었나 봐. 이성적인 생각도 안 됐고.」
「이미 지난 일입니다.」
지난 일을 되짚어 봤자 남는 건 없다.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전투 인원을 끌고 좀비를 치러 가야 한다.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좋은 결말은 아닐 것이다. 발원지에서 나온 사람이 감염되지 않았다는 걸 필사적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믿어 줄 생각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은 좀비들을 모두 말살하는 것밖에 없다.
「돌아가서 눈이라도 붙이세요. 당장 내일 전투하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은결이 믹스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구기며 말했다.
「그건 이은결 하사도 마찬가지야.」
「그렇습니다.」
「대단해. 다들 멘탈이 모래알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그걸 다시 뭉치게 하는 사람이 이 하사잖아.」
「그렇지도 않아요.」
「그래서.」
결말을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최유림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물었다.
「우리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빈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 이은결이다.
허허실실 잘 웃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냉정한 사람이 이은결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최유림의 물음에 이은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회피하고 눈을 감는다. 그 모습에 최유림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유수한은 꼼꼼히 자신의 연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감정 표현이 잘됐는지, 표정은 자연스러운지 확인한다.
이은결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살아남고 싶다는 열망 탓에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은다. 그들을 이끌고 진두지휘하는 이은결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이 장면은 그가 가지고 있는 고뇌가 간접적이나마 표현돼야 했다. 그렇기에 유수한 역시도 수차례 반복해 보면서 미흡한 부분을 체크하고 있다. 나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는 캐릭터가 아니었기에 연기할 때 어렵다고 느꼈지만, 표현은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항상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말하는 거지만.」
이은결은 오늘 전투에 차출된 인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살아남자.」
결국 최종 목표는 사는 것이었다.
이 전쟁을 마치고,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다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이은결은 하루에 한 번 전투에 나선다. 궁극적인 목표는 무기고 탈환이었다. 두 번째는 좀비 수를 줄이는 것.
「조심해.」
이은결이 하마터면 좀비에 물릴 뻔한 강휘민을 구하며 말했다. 처음 오합지졸이었던 군인들은 실전을 경험하며 조금씩 실력이 나아지고 있었다.
강휘민은 본래 유약한 성격이다. 함께 군에 들어온 여자 친구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그 사실에 절망하여 목숨을 끊으려던 인물이었다. 그런 강휘민을 붙잡은 사람이 이은결이었다.
[살아. 그게 네가 윤 하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앳된 외모와 달리 씩씩한 성격이었던 윤진아 하사는 이은결에게도 인상 깊은 군인이었다. 오히려 강휘민보다 더 다부진 여자였다. 겁이 없어 총 없이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좀비에게 덤벼들던 사람이었다.
[내가 죽였어요. 그 사람, 살고 싶어 했어요. 살고 싶은 눈빛이었어요…….]
윤진아는 강휘민이 죽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유약한 강휘민은 총을 들었고 손을 떨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윤진아는 강휘민을 탓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
좀비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무기는 역시 수류탄이었다.
안전핀을 뽑은 이은결은 뒤로 물러서는 군인들을 확인하고 수류탄을 멀리 던졌다.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살이 타는 냄새가 역하게 풍긴다.
이 냄새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금은 적이고 좀비지만, 한때는 동료였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이은결에게도 고통이었다. 아니, 모든 살아남은 사람에게 고통이다.
「전투 완료.」
치열한 격전.
총탄이 날아오는 치열한 전쟁을 마쳤다. 죽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희생은 불가피했다. 이은결은 눈을 뜬 채로 숨이 끊어진 동료를 참담한 얼굴로 바라본다.
스윽.
눈을 감겨 주는 그 순간, 총을 든 강휘민이 걸어왔다.
「이 하사님.」
강휘민은 고개를 드는 이은결에게 총을 내밀었다.
「뭐냐?」
「약속하셨잖습니까.」
「뭐를.」
「감염됐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강휘민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미소에는 삶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잔인하다.」
이은결의 얼굴이 절망에 구겨진다.
강휘민은 그의 손에 총을 쥐여 주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스스로 손을 움직여 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
「아직 감염된 거 확인 안 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이은결이 말했다.
「이미 아시잖습니까.」
주위에 사람이 모여든다.
강휘민 허벅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옷이 찢겼고 살점도 떨어져 있다. 누가 봐도 좀비가 물어뜯은 흔적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스스로 총구를 이마에 대고 있는 모습. 이은결의 눈이 붉게 물든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심적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둘,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외면한다.
「휘민아.」
「괜찮습니다.」
「너무, 너무 잔인하다.」
강휘민은 웃고 있었다. 이은결 역시도 그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강휘민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직접 죽였을 때, 무너지며 오열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제 그만 가고 싶습니다.」
그 말에 이은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히 가라…….」
타앙-!
격발음이 울리고 무릎을 꿇고 있던 강휘민의 몸이 휘청인다. 그대로 쓰러진 강휘민을 이은결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툭.
총을 바닥에 떨어뜨린 이은결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는 것이 지난하다. 죽이고 죽고 죽는 상황을 반복한다. 이은결은 붉어진 눈으로 텅 빈 허공을 바라보다 무겁게 숨을 내뱉었다.
* * *
[HOT] 스포주의! EXIT 6화 맴찢 포인트 +347
‘EXIT’ 6화는 주요 인물의 죽음을 다룬 충격적인 회차였다. 하나둘, 주연이라고 이름을 올렸던 배우들이 극중에서 사라지고 있다.
강휘민 역시도 초반부터 사망 플래그가 돈 역할이었던 만큼, 그의 죽음 자체는 큰 충격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죽을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 와, 강휘민 이렇게 보냄? ㅠㅠㅠ 진짜 맴찢이야 ㅠㅠㅠㅠㅠ
- 강휘민 여자친구 죽은 뒤로 살자 하고 싶은 마음 절실해 보이긴 했음... ㅠㅠㅠ
- 이은결이 막 잔인하다고 하잖아... 그 말이 내 마음임...
└ 222 잔인해... 이은결에게 너무 가혹해...
└└ 3333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 죽여달라고 하는데, 이은결 입장에서는 존나 잔인하지
└└└ 44444 강휘민은 후련한 듯 웃는데 이은결은 고통스러워하더라...
└└└└ 55 강휘민 잔인한 새끼 ㅠㅠㅠㅠ
개인적으로 강휘민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유수한이 가장 힘겨워했던 촬영이었다. 그 상황에 놓인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는데, 이은결은 울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다.
OK 사인이 난 후에야 눈물을 쏟을 수 있었는데, 쉽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그 상황은 이은결에게 잔인했다.
- 이은결 울긴 할까?
└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안 울듯...
└└ 맞아 울어도 몰래 숨어서 울 것 같아
└└└ 숨어서 울어도 오열은 아님 눈물 좀 흘리고 털어낼 듯
└└└└ 근데 이런 애가 속은 진짜 말이 아닐 듯... 맴찢
이은결은 사람 앞에서 울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수한은 연기하면서 울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잔인한 상황이 연거푸 다가오는데, 이은결이 흔들리면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흔들린다. 그렇기에 이은결은 더 강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나 지금 딱 6화까지 봤거든...? 이젠 무서울 지경임 ㅋ 누가 죽을지 몰라 존나...
└ 주연이라도 정 주면 안 돼. 나 벌써 최유림 정 떼고 있음 ㅇㅇ
└└ ㅇㅈ 최유림 언제 죽을지 몰라
└└└ 맞아;;; 웃다가 갑자기 죽고 이러니까 감정소모 커서 하나 까고 나면 좀 쉬어야 함;;
유수한 역시도 그랬다.
연기할 때도 감정 소모가 크다고 느꼈지만, 다시 드라마를 보니 더욱 그랬다. 하나둘, 이은결이 지키려던 사람들이 죽는다. 이은결이 직접 사람을 죽일 때, 심적 고통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렇기에 유수한도 ‘EXIT’ 모니터링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좀 쉬자.”
노트북을 끈 유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슬퍼서 머리가 아플 때는 잠시 눈을 감고 낮잠을 늘어지게 잔다. 어떤 누구는 우울감을 털어 내고 자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지만, 유수한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잠을 선택했다.
우선 지금은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중요했다. 내일은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첫 촬영이었고 앞으로는 잘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