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테리우스
배우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얻는 것이 많다. 우선 캐스팅이 되면 돈을 번다. 그리고 유명세를 얻고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팬도 따라온다.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배우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어느 누가 조선 시대 왕이 될 수 있을까. 비록 연기라고 해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그 순간에는 그 사람이 된다. 그가 겪은 감정에 동화되어 말을 하고 움직인다. 그 경험은 배우가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그 과정이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메말라 있던 감정에 물이 스며들고 자연스럽게 생각도 깊어졌다.
“좋은데요?”
오늘 처음 만나는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 지켜보던 임정연 작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성 피디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극의 중심인 주인공의 호흡이 아주 좋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만남이라더니, 두 사람의 연기 톤이 제법 잘 맞았다.
“그나저나, 수한 씨 머리 많이 길렀네요?”
임 작가가 물었다.
“아, 네. 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길러 보려고요.”
“진짜, 보면 볼수록 준비성이 철저한 것 같아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드라마 ‘EXIT’ 촬영이 끝난 후에는 계속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군인 역할이라 머리가 짧았던지라, 제대로 뒷머리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갑자기 사극을 차기작으로 선택했고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머리를 길러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리 요즘 사극이 퓨전이니 뭐니 가벼워지고 있다지만, 고증은 최대한 지키고 싶었다. 머리카락 길이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 하면서 무슨 연기를 하나 싶기도 했고.
“머리 길이 애매하면 그냥 좀 붙일까 해요. 아무래도 상투 틀 거 생각하면 신경 쓰이더라고요.”
윤지성 피디는 유수한을 볼 때마다 미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빛을 유수한도 느끼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예전 유수한과 함께 일했다고 하니, 더더욱 달라진 지금의 모습을 믿지 못할 것이다.
“아, 초원 씨는 오늘 어때요?”
눈이 마주치자, 윤 피디가 시선을 돌려 한초원을 보았다.
“조금 더 생각할 부분도 있지만, 좋았어요.”
한초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연극에서는 주인공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경험이 많은 한초원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처음이었다. 매체 연기에서는 짧은 단막극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게 전부였다.
처음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당연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정도로 놓치면 안 될 작품이었다. 그걸 한초원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연극을 오래 하다가 매체 연기에 도전했다. 부담감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작은 배역부터 시작해서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주인공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연극보다 버는 돈이 달랐기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연기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러려면 생계 부담을 덜어야 한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드라마였다.
그런 드라마에서 첫 주인공 제의가 왔다. 기쁘지 않았다면 솔직히 거짓이겠지. 회사에서는 딱 한마디를 던졌다.
[유수한이 추천했다던데?]
물론 와전된 이야기였다.
처음 한초원을 주목한 사람은 임 작가였다. 그 다음, 윤지성 피디 역시도 좋은 평가를 내렸기에 캐스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유수한 역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그런 말이 나올 수는 있지만, 유수한이 캐스팅에 관여한 적은 없었다.
“수한 씨.”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신경이 쓰인다. 미팅을 마치고 한초원은 유수한에게 다가갔다.
“잠깐 대화할 수 있을까요?”
유수한은 의아한 듯 한초원을 보았다.
“아, 네.”
매니저에게 먼저 차에 가 있으라고 말해 둔 유수한은 한초원과 함께 밖에 나왔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은 유수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니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뭔데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 추천해 준 사람이 수한 씨라고 들어서요.”
“네?”
“이 드라마, 절 추천해 준 거 맞으세요?”
“제가요?”
금시초문이었다.
당황한 듯 눈이 커진 유수한이 말없이 한초원을 보았다. 오해가 있는 듯했다. 물론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니, 그런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유수한은 개인적으로 캐스팅에 관여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추천하지도 않는다. 그럴만한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캐스팅에 대해 말을 얹는 것도 월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니요. 추천한 적 없어요.”
유수한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이 초원 씨 어떠냐고 물어봐서, 좋은 배우라고 했을 뿐이에요.”
“아…….”
“초원 씨가 실력 좋은 배우라서 캐스팅된 거예요.”
사실을 바로잡는다. 한초원은 스스로 자신의 배역을 따냈다. 그 사실은 중요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이루어진 기회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기회는 천지 차이니까.
“그랬구나…….”
한초원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작게 읊조렸다.
“그래도 고마워요.”
“뭐가요?”
“날 좋은 배우라고 말해 준 거.”
“아, 사실인걸요. 별거 아니니까, 저한테 막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어색하다.
애초에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두 사람 모두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다. 한초원은 말수가 적고 늘 차분했다. 함께 촬영하면서도 몇 마디 안 했을 정도였다. 짧게 침묵이 흐른다.
“그래도 반가워요.”
한초원이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 말에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 어색해서 괜히 악수를 청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형,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오셨어요?”
차로 돌아오니, 김민수의 표정이 음흉하다. 둘이서 따로 나가 대화를 한 것에 이상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유수한은 그 얼굴에 혀를 짧게 차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냥 일 얘기 했다.”
“에이, 근데 왜 따로 얘기해요? 왜요? 뭐 있는 거 아니에요? 형?”
“시끄러.”
유수한은 말을 딱 잘라 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초원은 그저 좋은 직장 동료나 다름없었다. 김민수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더더욱 아니었다. 유수한은 지금 당장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누군가를 좋아할 마음도 없었다.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유수한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HOT] 낫플릭스 공개 시사회 반응 뜨거움 +326
어느새 드라마 ‘EXIT’ 공개 시사회가 열렸다. 8부작, 러닝 타임만 9시간이 넘는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4부를 연달아 상영한 후에 중간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나머지 4부를 연달아 보는 일정이었다.
시사회에 초청된 평론가와 기자들은 물도 마시지 않고 드라마에 집중했다. 괜히 물을 마셨다가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낭패였다. 이것 역시도 일이기 때문에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몰입하고 있었다.
- 존나 기대된다 좀비물 덕후 심장 떨려
- 낫플릭스 제작이면 일단 제작비는 빵빵하겠다.. 존버존버
- 평점 미쳤네 재미없다는 반응을 찾아볼 수가 없어 ㅋ
└ 진심 아무리 뒤져도 재미없다는 글은 없더라;;
└└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온라인 상영회 시청할걸
이어서 낫플릭스에서 ‘온라인 상영회’가 열렸다. 앞선 공개 시사회는 평론가를 비롯한 전문가를 위한 자리였다면 ‘온라인 상영회’는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자리였다. 그렇기에 파랑새나 대형 커뮤니티에서 날것에 가까운 평가가 터져 나왔다.
[파랑새] EXIT 상영회 스포 없는 후기. 좀비가 사람을 그냥 찢네요?
[파랑새] 낫플릭스는 닥치고 EXIT 시즌2 내놔.
[파랑새] EXIT 좀비물 좋아한다? 무조건 보세요. 상영회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어서 오줌 지릴 뻔한 거 함정 ㅇㅇ
여러모로 반응은 좋았다. 물론 실제 뚜껑을 열어 봐야 정확한 반응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낫플릭스 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대감은 날로 커져 가고 있었다.
[빛유/후기] 와, 진짜 이은결 하사님 존멋이에요 ㅠㅠㅠㅠㅠ +165
[빛유/후기] 온라인 상영회 당첨♡ 감히 말하자면 이번에도 대에에에에박임!!! +95
[빛유/후기] 헉헉, 이 하사님 기대돼서 미치겠으뮤ㅠㅠㅠㅠㅠㅠ +47
유수한 팬사이트도 난리였다. 이미 온라인 상영회로 봤던 팬들과 그 후기를 들으며 기대감에 부푸는 팬들이 정신없이 뒤섞였다.
[빛유/자유] 떡밥에 떡밥에 떡밥을 더해서 어머 깜짝야 +7
[빛유/자유] 덕질 시작하고 어떻게 떡밥이 떨어진 날이 없냐 +21
[빛유/자유] 보통 덕질하면 좀 일하라고 재촉하는데, 우리는 좀 쉬라고 함;; +48
슬슬 팬들은 걱정되나 보다.
계속 떡밥이 떨어지지 않고 쏟아지고 있었다. 드라마 ‘낫플릭스’도 아직 공개를 안 했는데, 벌써 차기작 떡밥이 뚝 떨어졌다. 거기에 공식 시사회에서 길어진 머리로 나타난 유수한의 모습까지, 팬들은 우수수 떨어지는 떡밥을 주워 먹느라 바빴다.
[빛유/자유] 진심 머리 기니까, 무슨 왕자님 같음 ㄷㄷㄷ +11
[빛유/자유] 이거 무슨 테리우스 아니냐? +24
결국 유수한은 머리를 붙였다. 아직 촬영하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익숙해질 겸 아예 숍에서 머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어깨에 닿는 머리칼이 어색했지만, 또 제법 잘 어울렸다.
[HOT] 미남이즈뭔들, 장발도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유수한 +458
커뮤니티 반응도 폭발했다.
- 엥? 분명 짧았는데, 언제 장발 된 거임?
└ 사극 때문에 머리 붙였대
└└ 와, 준비력 머선일이고????
- 진심 존나 잘생겨서 킹받아 매번 새로워 짜릿해 미친놈임 저거
└ ㅋㅋㅋㅋㅋ 잘생겨서 킹받는 건 뭐야 ㅋㅋㅋㅋ
- 와, 나 이런 취향 있었네 지금까지 장발 못 먹는 줄 알았는데, 먹을 줄 알았네
└ 2222 나도 못 먹는 줄 알았는데 지금 없어서 굶주릴 판 ㅇㅇ
└└ 33333 저 머리로 화보 좀 달라
└└└ 44444 진심 머리 기르니까 분위기 미쳤음 ㄷㄷㄷㄷ
└└└└ 555 당분간 머리 자르지 마라... 존잘...
자연스럽게 장발 이야기로 시작해서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로 번진다.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수한의 차기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유수한 도포자락 휘날리며 걷는 모습 상상하니, 잠 못 잘 거 같아
└ 뭔 상상 하길래 네가 왜 못 자?
└└ 아니, 넌 자도 돼 ㅇㅇ
└└└ 넌 제발 좀 자
- 됐고, 얘들아. 유수한 한복 존나 지릴 것 같지 않냐?
└ 말해 뭐해
└└ 말모말모 키도 커서 지리다 못해 기절할 듯
└└└ ㅇㅈㅇㅈ 갓 쓴 것도 너무너무 기대됨
유수한의 필모에 사극이 없다보니, 더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유수한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봤더니, 괜히 어깨에 닿는 머리칼이 신경 쓰였다.
조금씩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첫 촬영 날이 정해졌고 유수한은 촬영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빛유/공지] 토요일 1시 낫플릭스 단관회 안내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던 드라마 ‘EXIT’가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