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대학로.
임정연 작가는 햄버거로 가볍게 이른 저녁을 먹고 움직였다. 오늘 볼 연극은 국내 창작극 ‘화경’이었다. 화경은 숙빈 최씨의 시호로, 말 그대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의 이야기였다.
숙종의 이야기는 주로 여성을 위주로 다룬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숙종의 면모를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승리자는 숙빈 최씨나 다름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의 눈에 띄었고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이 배우 연기 참 괜찮은데.”
오늘 연극의 주연 배우는 한초원이었다. 한창 매체 연기를 하던 한초원은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연극계 아이돌로 불리는 한초원답게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연극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여주를 맡을 만한 배우가 있을지 찾아보기 위해 예매했다. 일단 장르가 사극이었고, 한초원 외에도 빛나는 보석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한초원이었다.
“궁.”
숙빈 최씨와 ‘나는 왕이로소이다’ 양순은 겹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무수리로 궁에 입궐하여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는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하지만 숙종 사이에서 자식을 가장 많이 낳았던 만큼, 숙종의 총애가 있었을 거라 보인다.
무수리설도 수많은 설 중에 하나였다. 가장 드라마로 다루기 쉽기 때문에 무수리에서 왕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는 설을 주로 사용했다.
“나는 궁에 갈 거야.”
어린 숙빈이 사라지고 어느새 성장한 숙빈이 나타난다. 어릴 적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숙빈 최씨는 굶지 않는 삶을 위해 궁을 선택한다.
“가지 말아라…….”
그런 숙빈을 붙잡는 사내가 있다. 늘 그렇듯 여주에게는 남주 외에도 서브가 붙는 법이었다.
“동아, 내가 지켜 줄게.”
그런 사내를 바라본다. 어릴 때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사는 데 도움을 받았던 친구였다. 하지만 숙빈은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괜찮아.”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다. 다시 고개를 든 숙빈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그는 분명 믿을 만한 남자였다. 가끔은 어린 마음에 그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심은 아니었다.
“난 내가 지킬 거야.”
옅은 미소를 짓는다.
임정연 작가는 한초원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다양한 감정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지켜 주겠다는 남자의 말에 시선을 떨어뜨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는 생각을 접은 결연함이 짙게 번졌다. 옅은 미소는 어딘가 서글펐다.
한초원의 연기는 더 세밀해졌다.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한초원은 매체 연기에 도전하며 세밀한 표정 연기가 늘었다. 특히 눈빛이 살아 있었다.
“저 여인은 누구인가.”
천한 신분으로 궁에 들어왔다. 궁녀도 아닌 무수리. 자질구레한 일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
숙종은 달빛 아래, 화사하게 핀 꽃을 보며 웃고 있는 여인을 바라본다. 숙빈 최씨, 아니, 최 무수리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예뻐.’
극중 내내,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숙빈 최씨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임정연이었다. 달빛 아래, 웃고 있는 숙빈의 얼굴은 아름답다. 처음으로 마음 놓고 웃는 그 모습에 반한 숙종의 마음이 이해될 정도로.
연극이 끝나고 임정연은 퇴근길에 몰린 팬들을 보았다. 한초원을 보러 온 팬들이 꽤 많다. 매체 연기에 뛰어든 그녀였기에, 더더욱 이 무대를 기다려 왔을 사람들이었다.
괜히 그 인파에 섞여 든 임정연은 팬들을 따라 기웃거렸다. 고개를 저리 홱, 이리 홱. 그러다가 진한 현타감이 밀려왔다.
나름 방송 일을 하는 작가로서 팬들과 함께 배우를 기다린다는 게 참. 하지만 좋은 연극을 보고 좋은 연기를 보고 나면 작은 팬심이 싹튼다. 배우는 역시 외모보다 연기력이다. 물론 한초원도 예쁜 건 마찬가지다.
특히 방송을 시작하면서 카메라 마사지라도 받았는지, 날이 갈수록 외모가 수려해지고 있었으니까.
“집이나 가자.”
10분 정도 팬 사이에 머물러 있던 임정연이 급하게 정신을 챙겨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드라마 남주는 유수한으로 낙점됐다. 천군만마를 얻었다. 그다음 작업은 역시 여주였다.
“피디님은 역시 유명한 사람 좋아하죠?”
집으로 가는 길, 임정연은 윤 피디에게 전화를 건다.
- 왜요? 이번엔 누구한테 꽂혔어요?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임정연은 연극 마니아였다. 가끔은 뮤지컬도 보고 쉬는 날만 생기면 대학로로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이미 유명한 배우보다는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배우를 발굴하는 걸 좋아했다.
임정연은 실제로 단막극을 집필했을 때, 연극 무대에서 신인을 발굴해 발탁했었다. 미니시리즈에도 주연은 아니더라도 조연에 자신이 눈여겨본 배우를 은근슬쩍 추천하기도 하던 임정연이었다.
“이번엔 그래도 무명은 아니에요.”
한초원은 연극계 아이돌이다. 그게 쉽게 붙여지는 별명은 아니었다. 더불어 매체에서도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 누군데요?
궁금한 듯 윤지성 피디가 물었다.
“한초원이요.”
- 아, 한초원.
“아시네요?”
- 저 피딥니다. 드라마 연출하는 피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우에 관해서는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캐스팅 작업을 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만, 결국 선택권자는 피디였다. 아는 배우가 많아야 리스트를 꾸리기도 좋다. 그러다 보니, 임정연 작가처럼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는 연출자가 많았다. 이미 알고 있는 배우보다 새로운 보석을 발견하는 건, 생각보다 중독적인 쾌감을 준다.
“괜-찮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말을 늘어뜨리며 생각을 물어본다.
- 괜찮죠. 그, 뭐냐. 작년에 단막극 나오는 거 봤는데, 눈빛이 좋더라고요. 근데 이게 우리가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그 말에 임정연이 미간을 좁혔다.
“왜요?”
알면서도 이유를 묻는다.
- 그야, 유수한 씨가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허.”
짧게 혀를 차고.
“언제는 배우 눈치 안 보는 연출자가 되겠다면서요?”
- 그게,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충분히 이해한다.
편성조차 따내지 못했던 드라마가 유수한이 합류하면서 제작에 급물살을 타고 있었으니.
“연출자로서 철드셨네요.”
- 뭐라고요?
“그렇잖아요. 배우랑 기 싸움 하시던 거 기억 안 나시나.”
그랬다.
윤 피디는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배우와 날선 대립을 자주 했다. 배우에게 흔들리지 않는 연출자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쉬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건 때때로 악영향을 주었다.
현장 분위기가 파탄 났으니까.
물론 적당히 하는 게 중요했다. 배우가 날뛰지 않도록 적당히 제어하면서 당근을 줄 때는 확실히 줘야 한다. 다만 윤 피디는 끊임없이 채찍만 날렸고, 덕분에 배우가 현장을 이탈하는 일도 생겼었다.
“수한 씨는 어때요, 성격.”
임정연이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 아직은 나이스.
시동을 건다.
“아직은?”
- 과거에 깽판 친 기억이 있어서 아직은 경계 중?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만나 보면 알겠죠.”
유수한이 변했다는 소문이 방송가에 퍼졌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많은 사람들이 입 모아 개차반이라고 말했던 과거는 이제 퇴색되고 있었다.
“저 운전해야 해서 끊어요.”
통화를 마친 임정연은 핸들을 잡았다. 뭐든 실제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 여러모로 유수한의 존재는 크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배우여도 유수한이 거부하면 별 수 없었다.
어쩌겠는가.
배우 힘으로 편성을 따낸 입장에 눈치를 볼 수밖에.
* * *
유수한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대본을 모두 읽었다.
윤 피디는 회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지만, 임정연 작가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작가에 대한 예의는 역시 대본이다. 그가 쓴 대본을 읽고 만나는 것이 배우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반가워요, 수한 씨.”
살갑다.
처음 보는 임정연 작가는 생글생글 잘 웃었다. 톱이 어울리는 배우가 된 유수한은 이런 호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작품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윤 피디는 기어코 3분기 편성을 따냈고 캐스팅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한초원 씨요?”
자연스럽게 한초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윤 피디는 임정연 작가의 말을 듣고 한초원의 필모를 살펴보았다. 재밌는 사실은 유수한과 두 번의 접점이 있다는 거였다. 하나는 단막극, 나머지 하나는 드라마.
“어떠세요?”
남주를 톱배우로 박아 놓았으니, 자연스럽게 여주 역시도 톱으로 채우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기력이 탄탄하고 신선한 얼굴을 발굴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물론 미팅을 진행하며 정말 여주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검증을 해야 하지만, 한초원의 경력이라면 잘할 것이다.
“좋죠.”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좋은 배우잖아요, 초원 씨.”
두 번의 만남.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만났던 배우였던지라, 의미가 새롭기도 했다. 한초원에게 연기에 대해 조언도 들었고 그 이후 ‘식사남녀’에서 짧게 만났었다.
한초원은 청초한 느낌이 있었다. 맑은 이미지가 있는데, 그렇다고 어리게 느껴지는 맑음은 아니었다. 어딘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대본을 보며 생각했던 여주의 이미지.
“초원 씨는 가끔 되게 서글픈 표정을 잘 지어요.”
배우에게 분위기는 또 다른 무기였다.
한초원에게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웃으면서도 어딘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 그랬다. 그래서 양순이와 잘 어울릴 듯했다. 멀리서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보면서도 다가가지 못하고 그가 다칠까 봐 밀어내면서도 달아나지도 못한다. 지독한 딜레마에 빠진 여자.
“상대역으로 캐스팅해도 될까요?”
윤지성 피디가 넌지시 물었다.
“네.”
유수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아무리 톱배우가 되었다고 해도 월권을 할 생각은 없었다. 연출자를 존중하고 작가를 존중했다. 배우는 배우답게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캐스팅에 대해 추천을 원한다면 흔쾌히 생각을 말해 줄 수는 있지만, 이미 연출자가 생각한 캐스팅에 어깃장을 놓으며 뒤엎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수한 씨 의견도 중요하니까.”
“저는 괜찮아요. 하나하나 저한테 확인 안 하셔도 돼요.”
윤 피디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예전 드라마에서 보았던 유수한이 아니었다. 과거 유수한이라면 가장 나서서 배우 ‘급’을 챙겼을 텐데.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되잖아요.”
유수한이 대본을 꺼낸다.
“오늘은 작가님께 여쭙고 싶은 부분이 많아요.”
하나하나, 캐릭터 분석을 하며 의문이 드는 부분을 따로 체크해 왔다. 탁, 설마 16부작 대본 전부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임정연 작가가 놀란 듯 테이블에 쌓인 대본을 보았다. 지독한 연미새라더니, 그 말이 맞다.
“아마.”
유수한이 1부를 펼치며 말했다.
“저와 오늘 밤새우셔야 할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들은 임정연이 슬몃 웃는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유수한의 외모에 홀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솔직한 심정은.
“아, 진짜요?”
당연히.
“저 집 안 가도 돼요.”
집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