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백지수표
윤지성 피디는 영업을 뛰고 있다.
목표는 유수한이었다. 이성실이 이 자리에 유수한이 들어오도록 허락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유수한이 여기에 들어오겠다고 한 이유도 가벼울 것이다.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을 것이고, 무슨 카드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윤지성이 갖고 있는 카드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 자세를 낮추고 영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편성은 4분기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거짓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 거짓을 진실로 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필승 카드를 손에 쥔다면 제대로 된 협상을 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확실한 주연 배우를 손에 넣는 일이었다.
“대본은 다 나온 상태구요. 2년이나 준비했으니, 작품성에 자신 있습니다.”
어떻게 2년을 버텼을까?
그 과정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나름 윤지성은 임정연 작가를 믿는다. 서로 함께한 작품은 시청률 15%를 넘겼고 두 사람에게 번듯한 대표작을 안겨 주었다.
가끔 작감이 서로 맞지 않아 작품에 영향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윤지성과 임정연은 잘 맞는 콤비였다. 그 이후에 다시 합을 맞춘 게 ‘나는 왕이로소이다’였다. 하지만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2년이나 준비하며 대본도 수차례 수정했고 방송사 입맛을 맞추려 노력했지만, 결과물을 얻어 낼 수 없었다.
이제 마지노선이었다. SBC 소속 월급쟁이지만, 언제까지 뻗대고 있을 수 없다. 눈치가 보여 그 시간 동안 단막극 하나를 연출하고 B팀으로 합류해서 선배 피디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이러다가 언제 뒷방 신세가 될지 모르니.
“캐스팅은요?”
질문이 이어진다.
“아, 진행 중입니다.”
당연히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
2년 전, 처음 작품을 기획했을 때는 함께 하려 하던 배우가 있었다. 하지만 준비 기간이 길어지니, 하나둘 탈주를 했다. 작품이 엎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마음을 지배했다. 하지만 이대로 놓을 수 없었다. SBC에서는 상품성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임정연도 더 이상 의리를 지킬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다.
여차하면 이 대본을 가지고 다른 방송사로 넘어가거나 외주 제작사로 탈주할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작품에 대한 권한은 임정연에게 있으니.
“사실 편성도 확실한 건 아니죠?”
유수한은 서글서글 잘 웃으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허세를 부리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정곡을 푹 찌른다.
“네-니요?”
순간 유수한 페이스에 말릴 뻔했다.
과거 건방지던 모습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배우였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다루기 힘들어진 듯했다. 예전에는 그냥 재수가 없었다면 지금은 예의 바르면서도 쉽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윤 피디님께서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배우를 찾기 위해 오셨다는 건데, 어느 배우를 생각하셨어요?”
이성실이 대화에 참여했다.
“그야.”
윤지성이 멋쩍은 듯 웃으며 줄줄 말했다.
“당연히 유수한 씨가 가장 탐나고요. 여주로는 역시 민서온 씨만 한 사람이 없죠. 하하.”
지나치게 솔직했나.
하지만 사실이었다. 유수한이나 민서온이나, 둘 다 모자란 게 없는 배우였다. 민서온은 드라마 ‘시간’ 이후로 차기작이 없었다. 대상도 받았겠다, 기세를 타고 활동을 이어 할 거라는 여론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더군다나, 민서온이 생애 최초로 대상을 받았던 작품도 SBC가 아니었던가? 호흡을 같이 맞추었던 남주는 유수한이었고.
생각하면 할수록 야망이 깊어진다.
“서온이는 영화 검토하고 있는 게 있어서 어렵습니다.”
역시.
이성실은 칼이다. 미련을 칼같이 잘라 낸다. 아쉬운 듯, 입을 다시던 윤 피디가 다시 방긋 웃었다. 욕심이라는 걸 알았기에 미련을 단숨에 지운다. 지금은 그저 유수한만을 올곧게 바라보아야 했다.
“수한 씨는요?”
유수한은 여전히 뚜렷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모르겠거든요.”
“네?”
“대본은 재밌게 읽었어요. 4회까지요.”
“더 필요하시면 완결 회차까지 다 드릴까요?”
“아뇨.”
필력은 좋다.
철종의 절절한 사랑과 무능력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갇혀 무너지는 그 심리 묘사가 탁월했다. 철종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한순간에 나무꾼에서 왕으로 신분 상승한 철종, 그는 까막눈이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사실은 글은 읽을 줄 알았다. 제왕학을 몰랐을 뿐, 그리 멍청한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철종은 뚜렷한 업적도 없고. 그렇다고 결말이 좋은 것도 아닌데, 어떤 스토리가 이어질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요.”
SBC에서 서포트해 주지 않는 이유와 거의 일맥상통한다. 방송사에서는 철종 이야기가 그리 큰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무능력한 왕으로 기억되는 선조와 인조가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는 큰 줄기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이 있고 인조에게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한 인조반정, 청과 척을 지면서 겪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있다. 반면 철종에게는 고작 세도정치에 휘둘린 허수아비 왕이라는 스토리뿐이었다.
“이 작품은 야사를 중심으로 한 철종의 이야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모르는 철종의 이야기도 있죠. 요즘 익히 말하는 사이다는 없지만, 절절한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물론 진지하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있겠지만, 발을 들이는 순간 깊게 빠져들 겁니다.”
지금 윤 피디에게 가장 큰 무기는 자신감이었다.
“예전 작품 중에 비극으로 끝나고 슬픈 정서를 공유하지만, 결국 명작으로 남은 드라마가 많잖아요. 그 명맥이 지금은 끊긴 상태고요. 올드하지 않게, 그 명맥을 이어 가면서 명작을 만들 자신 있습니다.”
여전히 유수한은 웃고 있다.
귀를 만지며 여러모로 계산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딱 봐도 지금 진전된 상황이 없다. K엔터에 찾아온 것도 필승 카드로 쓸 법한 주연 배우를 낚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지금 그 필승 카드가 유수한이었고,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세상에 선보이려면 유수한이 필요했다.
“제가 만약 작품에 합류한다면.”
대본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다. 임정연 작가는 글을 잘 쓴다. 그가 그릴 철종의 세밀한 내면세계도 기대가 된다. 하지만 쉽게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제게 뭘 해 주실 수 있죠?”
금빛 대본이라도 아직은 불확실하다.
세상에 이 작품이 나와야만, 금빛 작품으로 남는 것이다. 물론 유수한이 합류한다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위치가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대표작.”
에라, 모르겠다.
“대표작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윤지성 피디가 백지 수표를 던졌다.
* * *
[연예이슈] 유수한, 나무꾼 출신 왕 된다?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남주 물망
빠르다.
아마 확인 사살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수한은 윤 피디의 백지 수표가 마음에 들었다. 이미 작품성은 [작품 보는 눈(S)]으로 확인했다. 편성을 받고 제작만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대표작이 될 수도 있다.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닌 것이다.
[OKEN] 지지부진했던 SBC ‘나는 왕이로소이다’ 유수한 합류로 급물살 타나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난파될 뻔했던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유수한 덕분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윤지성 피디는 드디어 편성을 따냈다. 예상했던 건 4분기였지만, 잘하면 3분기에도 진입할 가능성이 있었다. 3분기에 밀어낼 만한 작품이 보인다. 예전처럼 방송사에서 드라마 제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자리를 만들어서 들어갈 수도 있다.
“무조건 3분기요.”
“아니, 제작비 여력이 없다니까.”
“무려 유수한이에요. 국장님, 요 근래 유수한이 실패하는 거 보셨어요?”
작품에 톱스타를 쓰는 이유는 역시 제작비였다.
작품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에 톱배우가 들어가면 투자가 원활해진다. 더군다나, PPL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출연료가 나가지만, 해외 판권을 생각하면 아쉬운 장사는 아니다. 그러니 너나 할 것 없이 유명한 배우를 기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임 작가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파란뱀으로 탈주할 기세라고요.”
물론 약간 거짓이 들어 있다.
임정연 작가는 그 누구보다 유수한 캐스팅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제야 지지부진했던 작품이 빛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곳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 임 작가는 작품을 들고 탈주할 수 있다.
SBC 소속인 피디 윤지성과 다르게 임정연은 프리랜서다. 언제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그건 어떨 때는 단점이었지만, 어떨 때는 큰 장점이었다. 능력만 있다면 다양한 곳에 둥지를 만들 수 있으니.
“유수한까지 합류했는데, 이대로 뺏기실 거예요?”
그게 쉽나.
“일단 이게 내 마음대로 안 된다니까? 편성국장하고 의논을 해야 한다고.”
“아, 확실하잖아요. 언제는 톱스타만 가지고 오라면서요.”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닦달해!”
설마 말 그대로 톱스타를 붙잡아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대형이었다. 요 근래, 실패한 작품이 없다던 유수한. 3분기에 꽂아 넣는다고 해도 쉽게 이견이 나오지 않을 톱배우였다. 물론 내부 회의를 해야 하고 제작비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방송사 입장에서는 놓쳐서 안 될 카드였다.
“오늘 중으로 확정 지어 줄 테니, 돌아가.”
윤지성이 왜 이렇게 닦달하는지 이해한다.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2년 동안 홀대를 받아 왔다. 작품성은 있지만, 상업성은 없다는 내부 평가 탓이었다. 오래 기다렸으니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필승 카드를 손에 쥐었으니 더더욱 참을성이 바닥날 만했다.
“어떻게 됐어요?”
소회의실로 들어가니 임정연 작가가 앉아 있었다.
“잘 될 것 같아요. 3분기 편성 압박하고 왔어요.”
“그래요?”
“오늘 편성국과 회의하신다니,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이제 조금씩 빛이 보인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 오아시스를 찾았다. 아무리 헤매도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아서 결국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세월이 2년이었다. 땅을 파고 또 파도 물 한 방울조차 보기 힘들었는데, 죽기 직전에 물이 샘솟았다. 물론 2년을 목마른 채, 땅을 팠기 때문에 물을 마셔도 갈증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욕심을 내 물을 퍼마시며 3분기 편성을 외치게 된 것이다.
“슬슬 팀을 꾸리려고요.”
편성이 지지부진해서 팀도 제대로 꾸리지 못했다. 우선 손발이 잘 맞는 후배부터 선점해야 한다. 능력 좋은 조연출은 매일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윤 피디는 노트에 스태프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미 제작 PD나 현장에서 중요한 촬영 감독은 연락을 해 놓았다. 하나하나, 능력이 좋은 동료들을 잡아 오면 된다.
“이제야 좀 마음이 놓여요. 요즘 진짜 속상해서 잠도 안 왔는데.”
임정연이 후련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대박 나야 해요.”
반드시 이 작품은 성공을 해야 한다.
이미 윤지성 피디는 유수한에게 백지 수표를 던졌다. 그 백지 수표에 뭐가 적힐지는 미지수였다. 무엇보다 흥행 불패로 불리는 유수한인데, 그 커리어에 오점이 되고 싶지 않다. 자존심이 있지, 망하고 싶지 않았다.
“또 어디 가요?”
할 말은 끝냈으니 임정연 작가는 노트북을 정리했다. 이미 대본 집필은 옛날에 끝났다. 요즘은 차기작으로 낼 작품 구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정리되지 않아 지지부진했다. 현 작품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데, 어떻게 차기작이 써질까.
“연극 보러 가요.”
“연극이요?”
“이제 마음도 편해졌겠다, 영감 찾으러 가야죠.”
드라마를 쓰는 작가이니, 드라마를 보는 건 당연하고 영화나 연극도 자주 본다. 이 세상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영감을 찾는 작업은 뭐든, 남의 것을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물론 따라하면 그대로 표절이 되지만, 다른 아이디어로 충분히 파생이 가능하다.
“뭐, 여차하면 좋은 배우를 발견할지도?”
작가에게 캐스팅 권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추천은 가능하다. 가끔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서 눈에 띄는 배우는 따로 추천도 하는 임 작가였다. 자신이 만든 캐릭터이기에 그 누구보다 보는 눈이 탁월했다. 물론 그 추천을 수용하는 건 피디의 재량이다.
“좋은 배우 있음 말해요.”
“왜요. 바로 써 주게요?”
그리고.
윤 피디는 작가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연출자였다.
“뭐, 고려는 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