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닥쳐, 과거의 나
K엔터는 평소와 같았다.
사고 치는 소속 배우도 없었고 평안한 하루를 이어 가고 있다. 매니지먼트는 늘 그렇다. 소속 배우 상황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소속 배우가 스캔들에 휘말리면 그 순간 회사는 비상 상태가 된다.
지금은 그런 일 없이 차분한 상태였다. 주어진 일을 하고 퇴근을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의 삶.
“지금?”
그 고요한 흐름을 깨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네, 대표님 얼굴 한번 보고 싶으시다고…….”
“약속도 없이?”
“대표님께서 연락이 안 되신다는데요.”
그 말에 이성실이 핸드폰을 찾았다. 책상 구석에 있던 핸드폰. 매니지먼트 일을 하다 보면 핸드폰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슈가 없어서 잠시 핸드폰을 잊고 있었다.
핸드폰을 켜니, 액정에 부재중 전화가 10통 넘게 찍혀 있었다. 발신인은 동일했다. 일전에 드라마 건으로 짧게 통화했던 윤지성 피디였다.
“오긴 했네.”
물론 전화를 받지 못했기에 회사 입장에서는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공중파 피디였다. 메인 입봉을 했고 여전히 SBC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피디.
“일단 오시라고 해.”
“네.”
“커피와 다과 좀 준비하고.”
“네, 알겠습니다.”
매니지먼트 사업도 결국 영업이다.
배우 하나가 자리를 잡기 위한 과정에서 노력이 빠질 수 없다. 오디션을 참여하며 자신의 배역을 따내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매니지먼트의 영업력에서 성장의 차이가 난다. 방송국 인맥은 위치와 상관없이 안면을 트고 지내는 것이 좋다.
예능에서 막내 작가가 영원히 막내 작가일 리가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바닥부터 시작해서 성장을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해진 길을 걷지 않고 이탈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은 시간이 지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
“안녕하세요.”
이성실은 여유롭게 윤지성 피디를 반겼다.
“아, 죄송합니다. 연락을 하긴 했는데, 급해서 이렇게 찾아왔네요.”
“괜찮습니다. 마침 제가 회사에 있어서 다행이죠.”
지금 윤지성은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회사에 이성실이 계속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영업을 위해 외부 일정을 소화할 때가 더 많았다. 이렇게 용기를 내서 찾아와도 만나야 할 사람이 없다면 허탕을 치는 일이었다.
기껏 자존심을 버리고 용기를 내도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용기는 어떨 때는 쉽게 찾아오지만, 어떨 때는 쉽게 사라지기도 한다.
“일단 앉으시죠.”
이성실에게는 아쉬울 것 없는 만남이었다.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찾아왔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급할 건 없었다. 지금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훨씬 급할 테니.
“저.”
자리에 앉은 윤지성이 차가운 커피를 보다가 고개를 들며 이성실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미팅 요청에도 이성실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그 짧은 시간에 커피를 준비했고 입가심으로 먹을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윤지성은 쓸데없는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일전에 드라마 관련해서 전화하셨잖아요.”
운을 뗀다.
“네.”
“혹시 제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배우라도-”
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윤지성 피디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성실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아무래도 K엔터에는 좋은 배우가 많으니까요.”
하하.
웃는 얼굴에 여유가 없다. 이성실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윤지성을 보고 있었다. 30대 중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SBC에 입사했다던 윤지성. 조연출 기간을 거쳐 일일 드라마로 메인 입봉을 한 윤지성은 나쁘지 않은 연출력을 가진 피디였다.
듣기로 사극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고집하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 진행이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아직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편성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도 작품을 홍보할 좋은 배우라도 확보할 생각일 것이다.
“글쎄요.”
이성실은 한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론 윤지성 피디 말대로 회사 내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배우가 있다. 그것도 윤지성이 좋아할 만한 톱배우가. 하지만 그 사실을 티 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유수한과 통화를 했던 것처럼 불확실한 작품에 뛰어들 이유는 없었다. 지금 유수한은 작품 하나가 급한 상태도 아니었고 밀려드는 시나리오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수준이었으니까.
“관심을 보이는 배우는 있지만, 아직 딱히 정해진 게 없어 보여서요.”
꿀꺽.
윤지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너 연출자라고 해서 영업을 안 하는 것 같냐? 네가 원하는 배우가 있으면 어떨 때는 자존심 다 버려 가면서 애걸복걸해야 해. 그런 순간이 온다. 뭔 옛날처럼 연출자가 왕인 줄 알아?]
왜 이 순간, 그리 존경하지 않았던 선배의 목소리가 들릴까.
조연출 시절 윤지성은 주연 배우에게 설설 기는 선배를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 배우는 연기를 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실했나? 그렇지도 않았다. 대사를 제대로 숙지 못해서 현장에서 버벅거리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뿐인가.
촬영 스케줄을 받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멋대로 일정 변경을 요구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양아치였다. 그런데 그걸 모두 받아 주던 선배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시청률 얼마냐? 바닥을 기고 있잖아. 내가 할 말이 있겠냐? 하기 싫겠지. 주연 배우가 책임감 없는 거, 나도 싫지. 하지만 어쩌냐. 연출자로서 2%도 안 되는 성적 때문에 면이 안 서는 걸. 배우가 더 엇나가기 전에 살살 달래는 수밖에.]
촬영을 마치고 속이 쓰린 듯 술을 마시던 그 선배.
연출자에게 시청률은 절대적이다. 그 드라마는 말 그대로 처참하게 폭망했고 결국 조기 종영 하고 말았다. 그 선배에게는 그 이후로 미니시리즈 기회가 오지 않았고 일일 드라마, 아침 드라마나 종종 연출하며 뒷방 신세가 되었다.
“작품은 정말 괜찮거든요.”
근데, 그때 그 주연 배우가 누구였지?
“그래서 저나 임 작가나 2년을 끌고 있고요.”
드라마 제목은 생각이 난다.
첫 미니시리즈라고 선배가 주연 배우까지 직접 영업해서 캐스팅했던 그 드라마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였다.
“도와주시면 그만큼 시청률로 보답하겠습니다.”
* * *
유수한은 지금 회사에 와 있었다.
차기작 관련해서 이성실 대표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가방에는 대본으로 가득했다. 하나하나 둘러보며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앞선 약속이 있단다.
“오늘 대표님 일정 비어 있다고 들었는데, 누구야?”
유수한이 얼굴이 새까맣게 탄 김민수를 보며 물었다.
“아, SBC 피디요. 윤지성 피디.”
“그분이 여기까지 왜?”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찾아오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
뭐, 피디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들은 대로 드라마 제작이 원활하지 않았고 돌파구를 찾을 겸,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들어가 볼까?”
“네?”
“아니, 대화가 궁금해서.”
공교롭게도 윤지성 피디가 찾고 있는 배우가 유수한이었다. 윤 피디는 누가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성실은 쉬이 그 이름을 알려 주지 않고 있었다. 유수한 이름을 듣는 순간, 엄청난 관심과 영업이 밀려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저 김 비서님.”
유수한이 김 비서에게 다가갔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지, 대표님께 여쭤봐 주실 수 있나요?”
김 비서가 짧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성실 대표의 스케줄은 단출했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유수한과의 면담이 끝이었다.
지금은 오후 3시였고 돌발 상황 때문에 면담 시간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원래 이 시간에 약속을 잡은 사람이 유수한이었기에,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다.
“네, 대표님. 지금 유수한 씨 오셨습니다. 함께 대화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떡할까요?”
수화기를 든 김 비서는 기계적인 톤으로 말했다.
[잠깐만.]
이성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책상에 일어나 수화기를 든 채로 윤지성 피디를 보았다. 그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무슨 말이 나왔는지 모르는 눈치지만,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들어오라 해.”
툭.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윤지성 피디 앞에 앉은 이성실이 말했다.
“사실 지금 수한이와 면담할 시간이었거든요.”
“수한…… 아, 유수한 씨요?”
이제 유수한은 그런 위치였다.
이름만 나와도 업계 사람들의 눈을 번뜩이게 하는. 윤지성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유수한 이름만 들어도 침이 줄줄 흐른다. 유수한이면 무슨 일이든 해결 가능했다.
“네. 공교롭게도 윤지성 피디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
“정말이요?”
어찌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튀었다.
“괜찮으시죠?”
이성실은 당연하다는 듯 묻고 있었다.
윤지성 피디가 마다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가 K엔터를 찾은 이유가 좋은 배우를 건지기 위해서였으니까. 유수한은 K엔터 남자 배우 중 단연 간판이었다. 연출자라면 탐낼 배우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영광이죠.”
윤지성 피디는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어차피 자존심 버려 가며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속내를 숨기는 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었다.
연출자로서 자존심을 버리는 순간이 온다던 선배의 말이 이제야 비로소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 윤지성의 머리는 오직 유수한뿐이었다.
K엔터에 찾아왔을 때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그저 걸출한 주연 배우만 낚아채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유수한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목표가 생겼다.
‘이건 기회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이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페인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맑게 한다.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 피디가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보았다.
“빛?”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유수한의 얼굴에서 순간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 톱스타의 얼굴에서 인위적인 조명 없이도 볼 수 있다던 후광, 그 말로만 듣던 후광이었다.
저벅저벅.
유수한이 걸어온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코앞에 다가온 유수한을 윤지성 피디는 홀린 듯 보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 총명하게 빛나는 눈빛, 조곤조곤 다정한 말투.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배우였다.
근데.
“어, 우리 초면 맞나요?”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네?”
유수한은 미간을 좁히며 윤지성을 보았다. 당연히 유수한에게는 초면인 사람이었다. 윤지성은 말없이 유수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윤 피디님, 조연출 시절에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셨죠?”
그 순간, 윤지성의 머리에 번개가 떨어졌다.
“그때, 수한이가 주연 배우였죠.”
이성실에게도 그리 달갑지 않은 작품이었다. 조기 종영으로 폭망한 드라마였고 바로 유수한의 병크가 터져서 이중고를 겪었다. 아마 그 기억 때문에 더더욱 윤지성 피디를 멀리했을지도 몰랐다. 메인 연출자는 아니지만, 윤 피디 역시도 그 작품에 참여했으니.
“아.”
윤지성 눈이 흔들린다.
[선배, 왜 그렇게 배우에게 흔들리세요? 아니, 시청률 책임에 왜 주연 배우가 빠져요? 지가 연기를 잘했으면 이 정도로 처참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아니!]
기, 기억난다.
[유수한이 대체 뭐라고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배우라 기억에서 지워 버렸던 배우.
[전 제가 메인이 되면 그런 새끼랑은 같이 작품 안 해요!]
그랬지.
“이렇게 다,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의 유수한은 너무 달았다.
“윤지성 피디입니다. 수한 씨.”
과거의 기억을 지우개로 슥삭슥삭 지워 버린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유수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유수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전 입봉하면 배우에게 자존심 따위 팔지 않을 거예요!]
닥쳐, 과거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