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26화 (126/175)

126. 이름값 하는 배우

짧은 휴가.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보고 맛있는 걸 먹는다. 가끔 배가 부르면 산책을 했고 일 생각은 아주 최소한으로 했다.

집에 돌아왔다.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자 이제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여행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왔다. 유수한이 되면서 앞만 보고 달렸기에 한 템포 쉬어 갈 필요가 있었다.

“아, 네. 대표님.”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성실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잘 쉬고 왔습니다.”

가볍게 대화를 나눈다. 요즘 이성실은 유수한에게 잘해 준다. 돈 잘 벌어 오는 소속 배우였으니, 못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유수한은 커피를 내리며 이성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계속 차기작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히 하고 싶은 작품은 없었다.

계속 머리에 남아 있는 작품은 ‘나는 왕이로소이다’였다. 사극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은 철종과 닮은 부분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다는 것.

“요즘 관심 가는 작품이 있는데요. 딱 확신은 없어서요.”

- 뭔데?

이성실이 묻는다.

사실 이렇게 전화를 걸었던 이유도 차기작에 대해 생각이 있는지 엿보기 위해서였다. 유수한은 커피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사극인데, 고민 중이에요.”

- 나는 왕이로소이다?

“아, 네.”

이성실은 사극이라는 키워드만 듣고도 무슨 작품을 이야기 하는지 눈치챘다.

“어떠세요?”

유수한이 의견을 물었다. 확신이 들지 않고 고민이 될 때는 남의 생각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사극이라.

생각해 보면 유수한은 시대극을 해 본 적이 없다. 필모가 모두 현대극이었다. 이쯤 되면 한 번 쯤은 사극을 해 볼 때도 됐다.

- 자세한 건 알아봐야겠지만, 감독이나 작가는 괜찮아.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영화를 성공적으로 끝냈고 낫플릭스 제작 ‘EXIT’도 촬영을 마쳤다. 그동안 유수한은 열심히 일했다. 회사 내에서 유수한보다 열심히 일한 배우는 없을 정도였다.

- 근데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니?

“네. 충분히 쉬었어요.”

당장 낫플릭스 ‘EXIT’는 올해 여름 공개였다.

피가 튀는 좀비물은 다른 계절보다 무더운 여름이 가장 어울렸다. 뭐든 일은 하는 게 좋다. 젊을 때 이런저런 작품을 경험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 일단 이 드라마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 좀 알아보고 연락 주마.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치고 유수한은 커피를 마셨다. 잠시 생각을 접어 둔다. 알아서 이성실이 드라마에 대해 알아봐 줄 테니 그 시간동안은 마음 편히 있는 게 좋았다.

* * *

[연예뉴스] ‘연애하고 싶은 남자’ 1위 유수한, 인기 비결은?

유수한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고 올라간다.

‘연애하고 싶은 남자’ 1위는 물론이며 ‘사위 삼고 싶은 남자’에서도 1위를 거머쥐었다. 사실 이런 설문 조사는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배우로서 나쁠 건 없었다.

[OKEN] “유수한을 잡아라!” 유수한에게 쏟아지는 러브콜, 과연 그의 선택은?

현재 차기작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은 ‘나는 왕이로소이다’였다. 하지만 아직 확신은 아니었다.

- 이게 말이다. 좀 애매한데?

이성실은 2일 후에 연락이 왔다.

- 사극이라, 제작이 불투명한가 봐. 뭐, 대본까지 나와도 엎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

점차 방송국에서 사극 제작을 기피하고 있다. 일단 제작비에서 리스크가 컸다. 우선 정통 사극은 거의 제작을 안 하는 추세였고 대부분 퓨전 사극이었다.

글발 있는 작가와 나름 안정적인 연출력을 보여 주는 피디였지만, 문제는 작품의 매력이었다. 제작사에서 열심히 홍보하고 있음에도 SBC에서는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철종에 대한 이야기에서 매력을 찾을 수 없다는 투였다.

“캐스팅은요?”

유수한이 물었다.

- 난항이지. 제작 자체가 불투명한데, 달려들 배우가 몇이나 되겠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유였다. 불확실한 상황에 뛰어들 바보는 몇 없었다. 유수한 역시도 그랬다. 물론 가끔 불확실한 상황에서 뛰어들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호기심이 당기지만, 뭔가 나서서 주체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 기다려 보는 건 어떠니?

이성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사극이 그것 하나만 있는 건 아닐 테니.

그 말도 맞다.

방송국이 아무리 사극 제작 기피 현상을 보여도 계속 시대극은 나온다. 하지만 금빛 대본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일단 알겠습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본다. 작품이 급한 것도 아니었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든 확신이 들 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았다.

어느새 1월.

앞으로 굵직한 스케줄이 몇 있었다. 우선 ‘천상예술대상’이 5월에 열린다. 그 외에 ‘대종영화제’ 역시 5월이었다. 모두 의미 있는 수상이 점쳐지고 있었다.

“급할 건 없지.”

탁.

유수한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 * *

엎어지나?

“지금 이야기해 보고 있다니까.”

될 듯 안 될 듯.

SBC ‘나는 왕이로소이다’ 연출 PD 윤지성은 답답함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나름 작품에 자신감이 있는데, 윗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덕분에 캐스팅도 난항이었다. 소문은 귀신같이 퍼진다. 편성도 제대로 못 받고 제작 자체가 불투명하니, 관심 갖고 오는 배우들마저 발을 빼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요? 지금 벌서 3분기까지 꽉 찼잖아요.”

“그야, 그렇지.”

“국장님, 저 이거 엄청 오래 기다린 거 아시잖아요.”

“알지. 좀만 기다려 보라니까.”

다 허울뿐인 말이었다.

SBC에서는 윤지성 PD가 알아서 나가떨어져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요즘 공중파는 드라마 자체를 예전처럼 활발히 제작하지 않는다. 사극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최근 타 방송사에서 방영한 사극도 탄탄한 원작이 있던 드라마였다.

최근 사극은 인기 웹소설이나 유명 웹툰에서 원작을 가져왔다.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원작 이름 자체가 홍보였기 때문에 판권을 사는 게 보통이었다.

“언제까지요? 네? 국장님!”

오늘 윤지성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귀찮은 듯 윤지성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던 국장이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오늘 윤지성은 제대로 된 확답을 받기 전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생각을 해 봐라.”

“뭐가요.”

“네가 지금 내세울 게 뭐가 있냐?”

“…….”

“아무것도 없잖아. 인기 좋은 원작이 딱 있는 것도 아니고. 정조나 세종 같은 네임드 왕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철종? 철종으로 뭐할 건데. 나도 위에 할 말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렇다고 너 아무 자리에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지 않냐? 좋은 자리 들어가고 싶잖아. 어?”

결국은 상품성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제대로 된 배우라도 잡아 오든가.”

“배우요?”

“그래. 이름값 하는 배우!”

그때부터 윤지성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배우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배우를 앞세워서 투자를 받는 경우는 흔하니까. 지금까지 캐스팅을 위해 여기저기 시놉시스와 대본을 뿌렸다. 물론 긍정적인 반응이 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되레 신인급 배우를 들이미는 기획사도 수두룩했다.

“포기할까요.”

힘없는 목소리에 윤지성이 고개를 들었다.

“네?”

“지금 2년이에요.”

“아.”

“이 정도면 SBC는 가망 없다는 소리예요.”

2년.

편성을 2년 가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지성은 월급쟁이였으니 돈이 떨어질 일은 없지만, 작가는 달랐다. 작품을 하지 못하면 돈이 뚝뚝 떨어진다.

드라마 ‘나는 왕이로소이다’ 작가 임정연은 슬슬 모아 둔 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자존심이었다.

나름대로 히트작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 있는 작품이었기에 자존심으로 버텼다. 더군다나, 윤지성 피디는 이미 수차례 호흡을 맞춘 적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함께 힘을 모아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오래 진척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윤 피디님도 나가리 되겠어요.”

“네?”

“지금 작품 못 하고 있잖아요. 심지어 해보 라는 작품도 몇 번이나 거절했잖아요.”

“그야, 우린 이거 해야 하니까요.”

“언제까지요?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는 도태된다니까요.”

돈 앞에서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임정연 작가는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윤지성은 아직도 작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 지금 파란뱀에서 찾아요. 여차하면 그쪽이랑 하나 해 볼 생각이에요. 아쉽지만, 이번에는 포기하는 수밖에는-”

“아니요.”

윤지성은 작품의 얼굴이 될 만한 배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름값이 확실하고 방송사에서도 당연히 황금 시간대에 편성을 내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배우.

“딱 사흘만 기다려 보세요.”

일전에 윤지성 피디는 K엔터와 짧게 전화 통화를 했다. K엔터는 대형 매니지먼트였고 그 안에 좋은 배우들이 즐비했다. 당연히 관심 가는 배우도 있었다.

윤지성이 생각하는 배우는 유수한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톱스타였다. 작품 보는 눈이 좋아 하는 것마다 히트 치는 배우였고, 연기력도 좋았다. 5년 전에는 쉴 새 없이 사고치는 배우로 유명했다면 지금은 성실한 배우로 거듭났다.

“그 이후에는 임 작가님 생각 존중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윤지성이 코트를 입었다. 가방을 챙기는 모습에 임 작가가 미간을 좁힌다.

“어디 가려고요?”

“네.”

이제는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SBC 소속으로 윤지성은 따박따박 월급을 받고 있다. 임정연 작가의 수입이 공백기 때문에 뚝 떨어진 걸 알면서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처럼 국장에게 달려가 편성 좀 내 달라고 징징거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이제는 발로 뛰어야 할 때였다.

“어디 가는데요?”

임정연 작가가 물었다.

“K엔터요.”

“네?”

“최근에 K엔터에서 연락 왔었거든요. 작품 관련해서 대화를 했는데, 느낌이 괜찮았어요.”

“그래서 느낌 하나로 K엔터를 찾아간다고요?”

“네. 목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을 찾아가는 법이잖아요.”

결연한 표정.

지금 윤지성 피디의 표정은 마치 전장을 향해 달려가는 장군 같았다. 임정연은 이런 윤지성 피디를 말려야 하는지, 가만 보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하지만 지금 윤지성은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녀와서 전화할게요.”

결국, 임정연은 그대로 윤지성 피디를 보냈다.

작품에 대한 애착은 임정연 작가 역시도 가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윤지성보다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2년이라는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2년을 버티고도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 안 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대체 누굴 잡으러 간다는 거야.”

임정연이 핸드폰을 들었다.

K엔터 소속 배우가 누가 있는지 찾아본다. K엔터는 유명했다. 유명한 만큼 유명한 배우 역시도 많다. 검색창에 K엔터를 검색하니,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은.

“민서온.”

이었다. 드라마 ‘시간’ 이후에 뚜렷한 활동은 없지만, K엔터 간판 배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마 민서온을 잡으러 간 건 아닐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은 철종, 즉 남자 주인공이었으니까.

“…….”

그 다음 보이는 배우는 유수한이었다. 유심히 유수한 프로필 사진을 보던 임정연이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유수한 잡아 오면 진짜 내가 절한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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