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25화 (125/175)

125. 그거 나잖아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촬영이 있을 때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서 일찍 잠드는 게 힘들다. 물론 몸이 힘들 때는 세상모르고 잠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눈을 뜬다.

창문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사를 하고 유수한은 새로운 집에서 눈을 뜨는 것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늘 집에 오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처음에는 신선하고 좋았다. 김대한 시절, 항상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내려다보는 것도 이제는 좋지 않았다. 사람은 동등하다.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라는 걸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잡초가 자랐네.”

전원주택에 대한 로망이 있었나?

돌 틈 사이로 자란 잡초는 그 생명력이 억셌다. 한겨울임에도 그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여름이 아니기에 자라다가 말겠지만, 날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다.

“미리 뽑아 놔야지.”

목장갑을 끼고 넓은 마당을 본다.

생각해 보면 본가에서는 언제나 깔끔한 마당을 보았다. 따로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을 고용했으니 늘 좋은 환경을 유지했을 것이다.

물론 유수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람을 고용할 만한 여유도 있었고 직접 잡초를 뽑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굳이 이 집에 외부인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고.”

여름도 아닌데, 잡초는 어찌나 생명력이 질긴지.

투둑.

어떤 잡초는 뿌리를 제법 깊게 내렸는지, 꽤 힘을 써야 한다. 우습게도 그 과정에도 배움은 있었다. 질긴 생명력?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뿌리를 내리고 돌 틈에 얼굴을 내민다. 그 과정에서 햇볕을 받았고 누군가에 의해서 뽑힌다고 해도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김대한도 이런 생명력을 타고 났다면 살아남았을까?”

생명력은 곧 근성이다.

김대한에게는 근성이 없었다. 없이 태어났다고 해도 꿋꿋이 살아남아 빛을 보는 사람이 있다. 출발선이 달라도 한 걸음 더 내딛고 누구보다 앞에 서 있는 사람도 존재한다. 물론 그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만.

“다 했다.”

대강 잡초를 정리하고 허리를 폈다.

한참 유수한으로 곱게 살았더니, 이젠 이런 고된 노동이 꽤 버거웠다. 잡초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 샤워를 한다.

열심히 일했던 유수한에게는 휴식이 주어졌다. 일주일간, 휴양지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매니저와 코디를 데리고 다녀온다. 그 이후에는 늘 그렇듯 차기작을 고를 생각이었다.

“음.”

노트북을 켠다.

역시나 메일에는 차기작 리스트가 쭉 도착해 있었다. 항상 그렇듯, 제목에 보안 유지를 당부하는 말이 적혀 있다.

파일을 내려받기 전에 제목을 훑는다.

[SBC] 나는_왕이로소이다.pdf

[tnV] 촉법소년.pdf

[영화] 이대로_물러설_수_없다_시놉시스.pdf

배우로서 위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놉시스와 대본이 쌓인다. 제목을 쭉 읽는다. 눈에 띄는 제목이 머리에 박힌다. 물론 이건 제목에 불과했다.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지는 열어 봐야 알 수 있었다.

“사극…….”

지금까지 유수한에게 사극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유수한은 의도적으로 사극을 피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유수한은 갑자기 연기를 하게 된 배우였고 처음부터 시대극을 고를 수가 없었다. 사극은 연기를 준수하게 하던 사람도 한순간에 바닥을 보이게 하기 좋은 장르였으니까.

‘금빛이네.’

가장 먼저 열어본 건 SBC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였다. 제목에 드러나듯 딱 봐도 시대극이었다. 차라리 초록빛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도 유수한은 사극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음, 일단 내용이나 읽어 볼까.”

왜 거리를 두나, 하면.

어려울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커리어를 잘 쌓고 있었다. 괜히 새로운 도전을 해서 긁어 부스럼 할 필요가 있나.

우선 제목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은 흔했다. 실제로 동명의 영화가 나와 있으며 1923년도에 발표한 홍사용의 산문시의 제목 역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였다. 즉, 제목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그렇다면 평이한 제목 이상의 내용이 있어야 금빛에 어울릴 텐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외다. 나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인데.]

드라마는 철종을 다룬다.

사실 의외였다. 철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딱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왕족이었지만, 일반 백성처럼 살았던 왕.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하고 허수아비가 되었던 비운의 왕.

그 누구보다 백성의 삶을 잘 알고 있기에 허수아비였어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 했지만, 권력에 눌려 모두 좌절된다.

사실 판타지가 섞이지 않은 한 철종의 이야기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여러 왕이 드라마나 영화로 재조명되어 제작된다.

자주 재조명되는 왕은 역시 세종대왕이나 정조였다. 개인 서사가 확실하고 업적까지 있는 왕. 세조와 단종의 이야기 역시도 스토리가 확실하기에 여러 매체에서 때때로 볼 수 있었고, 반란으로 인해 쫓겨난 왕 광해군 역시도 서사가 풍부하기에 종종 볼 수 있는 왕이었다.

다만.

철종은 스토리는 있지만,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기에는 부족하다. 세도가에 맞서 업적을 이루었나? 아니다. 철종은 몸부림치다가 지쳐 현실에 순응한다. 여색과 술에 빠져 살다가 33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매력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불우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하고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양순아. 나를 보고 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철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내용이 없어 보였다. 유수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놉시스를 읽다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철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알게 된다.

[건드리지 말라!]

아, 로맨스?

“검색해 보니 철종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 있긴 하네.”

아주 오래 전에.

철종은 허수아비 왕으로 알려져 있다. 까막눈이라는 소리까지 돌았지만, 사실 그 정도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 그리 불쌍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무력감에 지쳤다고 하지만, 그 시대 왕족은 씨가 말라 있었다. 헌종의 먼 친척인 철종을 찾아낼 정도로.

나름 즉위 초반에는 의욕을 갖던 왕이었지만, 현실에 부딪히며 무너진다. 어차피 왕으로 죽었고 일반 백성으로는 누리지 못할 많은 것들을 누렸다. 그러니 그리 딱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생각한다.

“비극적인 로맨스라.”

뭔가 구미가 당기면서도 당기지 않는다.

철종이 갖고 있는 무력한 이미지, 그 속에서도 로맨스가 있다고 하지만 결말이 뻔히 보인다. 사이다 없는 이야기를 대중이 좋아할까? 조금이라도 답답해지면 비난이 쏟아질 텐데.

“생각은 그만.”

유수한은 시놉시스 창을 껐다.

“대본을 확인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뭐든.

답은 대본에 나와 있다.

* * *

“와, 질린다.”

보라는 공항에 와서도 대본을 읽고 있는 유수한을 보며 혀를 찼다.

유수한은 차기작 후보를 추렸다. 그중에 관심 있는 작품은 따로 출력했고 이렇게 여행길에도 함께하고 있었다.

“형님, 그거 잃어버리면 안 돼요.”

“응, 조심할게.”

대본은 보안이 가장 중요하다.

그걸 유수한도 알고 있었기에 가방에 넣지 않고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읽고 있는 대본은 ‘나는 왕이로소이다’였다. 지금 4회차까지 전달되었고 나머지 대본은 미팅 때나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읽은 대본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다.

‘애초에 이 배역을 연기할 수가 있나?’

연기자로서 유수한에게 약점은 ‘사랑’이다.

모태솔로. 지금까지 살면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독한 짝사랑을 해 본 적은 있지만, 그렇기에 혼자 하는 사랑에는 익숙하지만,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는 서툴다.

지금까지 필모그래피를 되새겨 보면 직접적으로 사랑을 다룬 내용은 SBC의 ‘시간’이 끝이다. 물론 드라마 ‘식사남녀’에서도 로맨스는 그렸지만, 사랑이 주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벼운 느낌이었고.

‘무거워.’

양순이라는 인물은 천민이다.

철종은 신분과 관계없이 양순이라는 여인을 사랑했다. 왕이 되지 않았다면 둘은 혼인을 했을 것이며,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고 평탄하게 살았을 것이다.

물론 운명이라는 시답잖은 것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하게 달라진다.

왕이 되어서도 양순을 사랑하는 철종, 그를 따라 궁에 무수리로 들어온 양순. 그리고 그 사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중전.

철종 : 왜 나를 거부하는 것이야? 난 널 잃고 싶지 않다.

허수아비였지만, 왕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조선팔도 어느 여인이든, 철종이 마음만 먹는다면 가질 수 있다. 물론 예외의 존재가 있겠지만, 철종은 대부분의 여인을 안을 수 있었다.

철종은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두고자 한다. 한낱 무수리가 아닌, 번듯한 후궁으로 곁에 두려 한다.

‘대체 왜 거부하지?’

쉬운 길을 두고 양순은 왜 험한 길을 걸으려 하는가.

그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양순은 자신이 사랑했던 이원범이라는 남자가 성군이 되기를 원한다.

뭐지.

왜?

“뒤에 내용을 보면 좀 이해가 되나?”

아니, 안 될 것 같은데.

사실상 연기는 허구다. 살인자 역할을 한다고 해서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다. 살인을 해 봐야만 살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것은 그럴싸하게 꾸민 허구.

연기는 상상이었다.

따라서 배우는 대본을 받고 어떻게 연기할지 분석하고 계산한다. 모든 배우들이 절절한 사랑을 해 보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사랑은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걸 테니.

‘내가 거리를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기내에서도 대본을 손에 들고 있었다. 대본을 접어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동남아는 한국이 한겨울이라도 덥다. 아무래도 이대로 들고 다니는 건 위험했고, 때 되면 그냥 태워 버리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보안을 생각하면 태블릿으로 보는 게 편할 텐데, 이상하게 종이로 보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다.

“계속 일할 거예요?”

보라가 불만을 표한다.

“아니.”

탁탁.

김민수에게서 라이터를 빌린 유수한은 대본을 태워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놀자.”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4회분의 대본은 질리도록 읽었기 때문에 머리에 남아 있다. 편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이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판단을 내려야겠다.

“와우.”

태국 크라비.

유수한은 첫 해외여행지로 크라비를 선택했다. 날씨는 좋고 사람은 많다. 새해 연초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왔다.

“저 원숭이 조심해. 자칫하면 털리겠다.”

이미 앞서 봤다.

핸드폰을 강탈해서 달아나는 원숭이의 모습을. 그리고 바나나와 교환하는 치밀한 모습까지. 덕분에 일에 대한 생각을 한결 털어 낸 유수한이었다.

“유수한이다.”

“헐, 유수한이다. 유수한.”

태국에서도 유수한은 유명하다. 모자를 푹 눌러 써도 외모는 숨겨지지 않는다.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며 해수욕을 즐겼고 맥주 한 잔을 하며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일에 대한 생각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말처럼 그게 쉽지는 않다. 때때로 혼자 호텔에서 떠오르는 대사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가볍게 조식을 먹고 혼자 산책을 나왔다. 김민수와 보라는 유수한을 두고 놀러 나갔다. 문득 성인 남녀기에 김민수와 보라 사이에 무슨 썸씽이라도 있을까 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김민수는 모를까, 보라는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신분상승.”

말없이 걷던 유수한은 문득 철종 생각이 들었다.

“……그거 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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