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끝이 있을까?
드라마 ‘EXIT’ 첫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낫플릭스 제작이라 사전 촬영이나 다름없었다. 초치기 촬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한결 편했다. 모니터링 하면서 유수한은 앞으로 어떻게 연기할지 가닥을 잡고 있었다.
첫 촬영은 다른 때보다 시간이 몇 배는 오래 걸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첫 순간이기에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유수한은 오늘 연기에 대해서 김승찬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김승찬은 오늘 촬영한 내용을 복기하며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생각이었다.
담배를 끊은 유수한은 이제는 담배 연기만 맡아도 싫어하는 단계가 되었다. 예전에는 담배는 죽어도 못 끊을 줄 알았는데, 참다 보니 그게 되더라.
“오늘 제 연기 괜찮았어요?”
솔직하게 묻는다.
오늘 김승찬은 유수한에게는 크게 터치가 없었다.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보여 주는 신뢰, 유수한에게는 그 신뢰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김승찬은 유수한과 함께 나오는 다른 배우에게 더 디렉션을 주었다. 물론 유수한에게도 지적할 부분이 있다면 입을 열었겠지만, 성실한 성향답게 철저히 준비해 온 터라, 할 말이 없었다.
“말해 뭐 해. 좋았죠?”
유수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유수한이 김승찬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이은결은 사실 상관에게 사랑받던 사람이잖습니까.”
서서히.
앞으로 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할 태세였다. 김승찬은 줄줄이 이어지는 유수한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오늘은 첫 촬영인 만큼 다른 날보다 적은 분량을 공들여 찍었다. 감독으로서 배우들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주인공인 이은결은 유수한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 해석이 완벽했다. 초반,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는 유들유들한 모습을 보였고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는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움직였다.
그 표정 변화가 탁월했다. 자연스럽게 감정선이 움직였다. 스토리 흐름대로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서 감정선이 왔다 갔다 할 법한데, 유수한은 가볍게 감정을 움직였다.
“점차 본모습이 드러나는데, 이은결은 사실 비인간적인 모습도 보이잖아요. 어느 선까지 보여 줘야 할지. 너무 과해지면 시청자들이 공감을 못 할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이은결은 딱 군인에 맞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전쟁터에 떨어지면 그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성향으로 움직일 사람이었다. 치밀한 계산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는다. 그렇기에 이은결은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최선이라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쉽게 잘라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수한 씨는 정답을 잘 찾아낼 것 같은데요?”
“네?”
“시청자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려고 그 배역을 만든 거니까.”
그 배역.
유수한은 돌려 말하는 김승찬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배역은 어쩌면 이은결을 위한 배역일지도 몰랐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은결은 그 누구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배역의 마지막, 최후의 사건은 이은결에게 인간미를 다시 가져다준다.
“그 장면 잘 준비하겠습니다.”
결론이 나왔다.
유수한은 씩 웃고는 뒤돌아섰다.
* * *
[OKEN] 유수한 효과 영화에도 통했다! ‘내 심장을 향해 쏴라’ 800만 돌파!
12월 말.
정신없이 드라마 촬영을 이어 가고,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상영관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수한의 첫 영화는 성공적이었다. 특별 출연이었던 ‘사냥개’ 역시도 성적은 좋았지만, 주연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는 중요했다.
유수한은 드라마판에서 존재감이 있는 배우였다. 지금껏 그 능력을 여과 없이 보여 줬다. 하지만 아직 영화판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도 통하는 배우라는 걸 보여 줘야 했다.
“EXIT 촬영이 막바지입니다.”
이성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간 진행한 촬영이었다. 8회차라는 적은 분량이었지만, 김승찬은 2개월 이상 촬영에 힘쓰며 공들이고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요즘 이성실은 인물 하나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연예이슈] 연기 첫 도전 하는 이정우 “유수한은 연기에 미친 사람, 지겹도록 연기 배웠다.”
보이그룹 멤버 이정우였다.
이정우의 촬영은 유수한보다 빨리 끝났다. 격려차 이성실은 촬영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커피와 간식거리를 잔뜩 사들고 현장을 찾았는데, 그때 이정우의 눈빛이 섬뜩했다.
뭔가 돌아 버린 눈빛이었다.
듣기로 유수한이 직접 챙기며 연기를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그런 일도 처음이었다. 유수한은 본디 개인플레이 성향이 짙은 배우였다. 따로 친목을 다지는 성향도 아니었고 알고 지내는 배우들도 예능 ‘노예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런 유수한이 직접 챙긴다고 들었기에 궁금했던 찰나였다. 이정우는 양아치라는 소문과 달리 생각보다 조용했고,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 오늘은 괜, 괜찮았죠?]
그 작은 목소리가 이성실 귀에 들렸다. 유수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이정우의 모습은 가여울 정도였다.
[연예토크] 연기자 도전 이정우 “유수한 선배요? 무섭죠. 연기에 미친 사람이에요. 하하.”
이정우는 하는 인터뷰마다 유수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유수한을 칭찬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성실은 이정우의 맛 간 눈을 보았다.
“세뇌라도 당했나?”
아니다.
[연기자 도전에 나선 이정우는 예능 ‘나의 하루’에서 배우 선배 유수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정우는 “유수한 선배요? 하하.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드시면 항상 집으로 끌고 가셨어요. 제 연기가 마음에 들 때까지 혹독하게 연기를 가르쳐 주셨는데, 진짜 말 그대로 연기에 미친 새, 아니, 사람이라니까요.”]
이거 하소연하는 거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유수한에게는 나쁠 것 없었다.
- 유수한 ㅋㅋㅋ 이정우 연기 직접 가르쳤나 봐 ㅋㅋㅋㅋㅋㅋ
- 이정우 얘 유수한 돌려 까는데?
└ 22 지 힘들었다고 팬에게 이르는 느낌 ㅇㅇ
└└ 333333 요즘 인터뷰마다 유수한 얘기 하는데 좋은 느낌은 아닌 듯
└└└ 4444444
- 유수한 보살 아니냐? 이정우 연기 존못이잖아 뮤비도 버거워하는 앤데
└ 222 이정우 끼 조온나 없음 무대에서 표정 연기 존나 못해;;
└└ 33333 ㅇㅈ 이정우 때문에 못한 컨셉이 몇 개냐?
└└└ 444 존나 보살 쌉인정 저걸 끌고 가겠다고 집까지 데려가서 연기 가르친거잖아 ㄷㄷ
└└└└ 5555 유수한 고생했네 ㅋㅋㅋㅋ
이정우의 본심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었다면.
- 왜 그러냐? 둘이 친한 것 같은데 ㅋㅋㅋ 싫은 사람 집까지 데려가겠냐?
└ 222222
└└ 33 이정우 까려는 거 넘나 투명하쥬?
└└└ 4444 가만 좀 둬라
└└└└ 55555 못 까서 안달
어딜 가나 눈치 없는 사람은 존재한다. 물론 대부분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배우가 연기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는 건 칭찬받을 일이다. 연기 문외한인 이정우를 끌고 갔다는 사실은 욕먹을 일이 아니었다.
“이번 영화도 성적이 좋고 아시는 것처럼 노예주점도 잘됐습니다.”
“그렇지.”
이성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년 백호영화제, 천상예술대상에서 의미 있는 수상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영화계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낸 유수한이었기에, 내년에 열릴 영화제에서 수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영화의 흥행뿐만 아니라, 유수한의 연기력 역시도 탁월했다. 시간이 갈수록 유수한의 연기력이 늘어 가고 있었다.
유수한은 이번 영화를 통해 한층 더 발전했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정동인과 많은 촬영을 하며 얻어 간 것이 많았다. 유수한은 선배를 통해 연기를 배웠고, 배움을 얻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번 촬영 끝나면 여행 간다고?”
“네. 팀 식구들 데리고 동남아 다녀오신다고…….”
“민수 녀석, 노났네.”
유수한은 그동안 쉼 없이 달렸다.
작품이 끝나기도 전에 차기작을 결정지었고 앞만 보고 달렸다. 이번에는 차기작을 검토하기 전에 짧게나마 해외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유수한을 서포트하는 팀 식구를 데리고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회사 내에서도 유수한의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피해야할 폭탄이었다면 지금은 가까이하고 싶은 배우였다. 유수한이 김민수에게 하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김민수는 종종 값비싼 선물을 유수한에게 받았고 따로 보너스도 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행도 같이 간다니, 부러울 수밖에.
“쉴 거래?”
이성실이 질문을 던진다.
“아니요. 다녀와서 바로 차기작 고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할 만한 것 추려 놔.”
“네.”
앞으로 유수한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이성실은 유수한의 거침없는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꽤 즐겁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가며 성장하고 있다. 그 성장의 끝은 어딜까.
아니, 끝은 있을까?
* * *
“잘 들어.”
마지막 촬영.
유수한은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많은 엑스트라와 함께 하는 까다로운 신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경을 썼다. 동선을 여러 번 확인하고 몸에 익혔다.
“우리는 군인이다.”
어딜 가든 그 무리의 머리가 중요하다.
즉, 우두머리가 좋은 판단을 내렸을 때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부대는 좀비 소굴이 되었다.
이은결을 살인 혐의로 영창에 넣었던 대대장은 오판을 반복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좀비가 된 그는 독선적인 성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누구보다 잔혹한 좀비가 된 대대장을 이은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살한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지켜야 한다. 그 자긍심, 잊지 마라.”
총을 든다.
이은결은 지금까지 부대 밖으로 나가려는 모든 병사들을 죽여 왔다. 예외는 없었다. 만약 이은결은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감염된다면 바로 스스로 머리에 총을 겨눌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부대 내에 번진 좀비 바이러스를 막는다.
그게 군인으로서 해야 할 행동이었으며 나라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가자.”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이은결을 포함해 생존자는 고작 여섯. 좀비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상 남은 그들에게 주어진 건 절망이었다. 좀비를 소탕하는 건 죽음보다 힘든 일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좀비 바이러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은결은 총을 들었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빠르게 튀어 오는 좀비들을 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차라리 이은결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은결이 영창에 갇혀 있지 않았더라면 여기 남은 사람들이 개죽음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지 마라!”
이은결은 티끌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자…….”
동료들이 쓰러져 간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좀비 떼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이은결 역시도 그 모습에 굳은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아윽…….”
목덜미를 물린 채로 이은결이 비틀거린다.
여전히 총을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저항한다. 이제 더 이상 그의 곁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타앙-
이은결은 끝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목덜미에서 왈칵 피가 쏟아진다.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주마등, 이은결은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하나하나, 감염된 동료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던 그 순간이 흐려지는 의식을 꽉 채우고 있었다.
“……미안하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무수한 순간들이 그에게 후회로 다가왔다.
이은결은 쓰러진 자신에게 몰려오는 좀비들을 보았다. 하나하나,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며 웃고,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며 미래를 이야기했던 동료들이었다.
달깍, 달깍.
총알이 바닥났다.
“곱게 죽지 말라는 뜻인가…….”
툭.
이은결은 힘없이 총을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